(CNB저널 = 도기천 기자)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을 비롯한 금융사 최고경영자들이 최근 잇달아 자사주를 사들이고 있어 주목된다. 자사주 매입은 경영실적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주가부양 의지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회장님들의 기대와 달리 주가는 신통치 않아 보인다. 이유가 뭘까.
자사주 매입은 회사 주식가격이 지나치게 낮게 평가됐을 때 오너나 기업이 자기자금으로 회사 주식을 사들이는 것을 말한다.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비해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통한다.
자사주 취득으로 인해 시중에 유통되는 주식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주가는 상승하는 게 일반적이다. 또 회사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경영진이 매수 시점을 정했다는 점에서 일반 투자자들은 ‘호재’로 받아들인다. ‘매수 타임’의 신호로 본다는 얘기다.
올해 들어서만 회사 주식을 매입한 금융사 CEO들은 10여명에 달한다.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은 지난 2월부터 4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회사 주식을 매입해 총 5만3127주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금융지주가 신규 상장되면서 주식을 사들인 것. 현재 주가(9일 종가 기준)가 1만3850원인 점을 감안하면 약 7억3600만원어치다.
지성규 KEB하나은행장은 지난 3월 22일 취임과 동시에 하나금융지주 주식 4000주를 매입했다. 주당 매입가는 3만7000원으로 총 1억4800만원 규모다.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은 지난 3월 자사주 1000주를 추가로 사들였다. 주당 취득가는 4만3050원으로 4300만원어치다. 윤 회장은 2015년 회장 취임 이후 14차례에 걸쳐 2만여주의 주식을 사들였다.
허인 국민은행장도 같은 달 KB금융지주 3062주를 장내매수했다. 주당 취득가는 4만2401원으로 총 1억2983만원 규모다.
이밖에 지난해 회장으로 취임한 김태오 DGB금융지주 회장은 최근 자사주 5000주를 처음으로 매입했으며, BNK금융지주는 김지완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 10명이 최근 4만3656주를 장내 매수했다.
금융수장들, 앞다퉈 매수 경쟁
은행권 뿐 아니라 증권·보험사 CEO들도 매수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한화투자증권은 지난 3월 권희백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이 자사주를 매입했다. 권 대표이사는 총 2만 9445주의 자사주를 매입해 총 12만 3600주를 보유하고 있으며, 배준근 전무 등 임원진도 12만 5438주를 매입했다.
대신증권은 지난달 26일 보통주 자기주식 150만주(총 발행주식의 2.9%)를 매입한다고 밝혔다. 취득기간은 오는 7월 26일까지며 취득 예정금액은 182억 3000만원에 이른다.
한화생명은 지난 3월 차남규 대표이사 부회장이 자사주 4만4000주, 여승주 대표이사 사장이 2만주를 장내 매수했다. 이에 따라 차 부회장은 13만4000주, 여 사장은 6만8650주의 자사주를 갖고 있다.
여기까지가 올해 주요 금융사 수장들의 대략적인 자사주 매입 현황이다.
이외에도 최근 수년 간 자사주를 사들인 금융지주 회장이 여럿이다.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2015년부터 몇 차례 자사주를 사들여 현재 5만주 넘는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작년 3월 자사주 2171주를 사들여 1만5600주를 보유하고 있다. 김지완 BNK금융지주 회장은 작년 9월 자사주 5000주를 매입해 총 2만주를 갖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책임경영’을 자사주 매입의 이유로 밝히고 있다.
“회사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키겠다는 경영진의 책임경영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한화투자증권), “책임경영 및 주가부양의 의지를 대내외로 표명한 것”(한화생명) “그룹 경영실적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낸 것”(우리금융지주) 등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주가는 신통치 못하다.
손 회장이 재상장 당시(2월13일) 1만5000원대에 사들인 우리금융지주 주가는 10%가량 하락한 1만3850원(9일 종가 기준)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하나금융지주 주가는 지 행장이 3월 22일 취득한 3만7000원보다 다소 내려간 3만6500원이다. 한화투자증권, 한화생명도 CEO들이 주식을 매입할 당시보다 주가가 내려갔다. 다만 KB금융지주는 지난 3월 윤 회장 등이 산 가격보다 다소 올랐지만 의미있는 변화로 읽히진 않는다.
총수집단도 아니면서 왜?
회장님들이 직접 나섰음에도 주가가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핀테크(금융+IT)’의 발달로 금융사의 설 자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인터넷 및 모바일 이용 건수는 최근 5년간 연평균 20% 이상씩 증가하고 있으며, 비대면거래가 전체 거래건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90%를 넘어섰다. 국회 정무위원회가 금감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 등에 따르면 2012년 이후 최근까지 시중은행의 폐쇄된 점포수는 2000여곳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영업점 관리비용, 인건비 등 지출이 줄고 인터넷뱅킹 수수료 등 비이자이익이 크게 늘면서 실적이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주가는 미래가치를 선반영 한다는 점에서 당장의 실적보다 장기적인 추세가 주가에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이다.
금융업이 규제산업이라는 점도 발목을 잡고 있다. 금융업은 제조업보다 정부의 관리감독이나 통제가 상대적으로 강해 급속하게 성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성장 테마주’로 불리는 에너지, 제약, 남북경협 등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다 올해 전망이 작년에 비해 밝지 않은 점도 단기적인 악재로 꼽힌다.
정부는 작년 9.13부동산 대책 이후 금융사들의 대출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주수입원인 예대 마진(예금-대출 간 금리 차이에서 발생하는 수익)이 작년보다 나빠지고 있으며, 대형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 줄고 있다. 경기불황으로 신용대출 리스크도 커진 상황이다.
절세·배당금 ‘숨은 매력’
이런 환경임에도 금융권 CEO들이 주식매입에 나선 데는 장기적인 안정성이 매력 포인트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은행·금융주는 전망이 밝고 매출이나 이익 증가율이 높은 기업을 뜻하는 ‘성장주’가 아니라 꾸준히 이익을 내지만 이익 변동 폭이 크지 않아 주가흐름이 안정적인 ‘가치주’로 분류된다. 주주들은 단기 차익을 노리는 단타매매보다 장기투자를 선호한다.
특히 배당금이 은행이자보다 훨씬 높다는 점에서 해마다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다. 올해 3월 주요 금융지주사들이 정기주주총회에서 결정한 시가배당률(주가 대비 배당금 비율)을 보면 하나금융 5.0%, KB금융 4.0%, 우리금융 4.0%, 신한금융 3.9% 등으로, 같은 달 예금 수신 평균금리(1.95%)보다 훨씬 높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절세효과도 볼 수 있다. 자사주 매입은 세법상 분리과세로 20%의 단일세율이 적용되며, 4대 보험료가 부과되지 않는다.
정세현 인하대 겸임교수(경영학)는 CNB에 “오너일가가 지배하는 총수집단도 선뜻 사재(私財)로 회사주식을 매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전문경영인인 금융사 CEO들이 수억원대 자사주를 매입하는 행위를 책임경영만으로 해석하긴 힘들다”며 “도의적 의미에 더해 안정성과 배당수익, 세금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