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정의식 기자) 한국과의 ‘경제전쟁’을 선포한 일본이 두번째 카드로 ‘조선업 견제’를 꺼낼 분위기다. 최근 일본 조선업 관련 경제단체 수장이 잇따라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합병에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 앞서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의 조선업 지원이 보조금 협정 위반이라며 WTO에 제소할 뜻을 밝힌 바 있어 ‘일본 변수’가 두 회사 합병의 최대 난관으로 떠올랐다.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반대’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지만, 조선업계에서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7월 19일 일본조선공업회(IHI) 사이토 유지 신임 회장은 도쿄에서 열린 취임 기자회견에서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기업결합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는 “각국의 공정당국이 (이들의 기업결합을) 그냥 지켜볼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같은달 22일 현지언론 일간공업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민간이나 기업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국가 차원에서 일본의 조선업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사실 일본 조선업계가 우리 정부의 조선업 지원에 불만을 가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때 세계 최강의 위상을 자랑했던 일본 조선업이 2003년 이후로는 한국과 중국의 대두에 밀려 점유율이 급감, 현재는 10% 내외의 점유율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이 단체의 전임 회장 카토 야스히코가 “글로벌 조선업계에 공급과잉이 초래된 것은 한국, 중국 정부 등의 공적지원 때문”이라며 “한국 정부의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공적 지원과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 움직임은 시장질서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일본 정부는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열린 5개국 조선 정상 회의(JECKU-TEM·일본·EU·중국·한국·미국)의 의장 성명에서 “세계 조선업체들의 공정경쟁을 위해 세계 모든 조선업체들의 준수를 의무화하는 새로운 규율 제정이 불가피하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이어 11월에는 KDB산업은행의 대우조선해양 공적자금 지원이 ‘정부의 민간 구제’에 해당한다며 WTO 제소를 강행했다.
일본의 2번째 제재 카드는 조선업?
문제는 타이밍이다.
사이토 신임 회장의 발언은 7월 1일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 핵심 소재 3종의 수출을 규제하고,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지정 해제를 예고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사실상 경제전쟁 국면을 맞은 가운데 불거졌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사이토 회장의 발언을 반도체 소재에 이어 2번째 일본의 제재 대상이 ‘조선업’이 될 것이라는 일본 정부의 사전 경고로 분석하는 시각이 많았다.
구체적 제재 방법으로는 일본의 공정거래당국이 현대중공업그룹의 중간지주회사인 한국조선해양(KSOE)과 대우조선해양의 기업결합 신고를 승인하지 않는 방안이 제시됐다. 지난 6월 3일 ‘통합 한국조선해양’이 출범했지만 아직 국내 공정거래위원회는 물론 EU, 일본, 중국 등 통합 법인이 사업을 영위하는 모든 국가에서 기업결합 심사를 받아야 합병이 최종 마무리되기 때문.
일단 현대중공업은 한국, 중국, EU, 일본, 카자흐스탄 등 5개국으로부터 기업결합 심사를 받을 계획이다. 지난달 1일 국내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업결합 심사를 신청했으며, 22일에는 중국 심사당국에 심사를 신청했다. EU는 신고서를 제출하기 전 단계인 사전협의를 진행 중이며, 일본과 카자흐스탄은 그보다 앞서 신고서 제출을 준비하는 단계다.
EU와 일본에 앞서 중국 당국에 기업결합 심사를 신청한 건 중국 조선업이 한국 조선업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슷한 입장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조선업 1위 현대중공업과 2위 대우조선해양의 합병을 추진하는 것처럼, 중국 역시 1위 중국선박공업집단(CSSC)와 2위 국영중국선박중공업집단(CSIC)의 합병을 추진 중이다. 중국이 한국조선해양의 기업결합에 반대표를 던질 경우, 한국 측 역시 비슷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일본은 상황이 다르다. 일본 역시 조선기업의 인수합병(M&A)를 통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지만, 당장 대형 M&A를 진행하고 있는 건 아니다. 안그래도 이전부터 한국 조선업의 위축시키려고 WTO 제소 등 물밑 작업을 진행해온 상황이어서, 이 사안 역시 ‘한국 길들이기’용 카드로 악용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금융위 “일본 정부 공식 입장 아니다”
우리 정부는 일단 신중을 기하는 분위기다. 7월 30일 금융위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의 기업결합 심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확인된 바 없다”며 “일본 경쟁당국이 법령과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심사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금융위는 “일본측 인사의 개인적 의견이 일본 정부의 확인된 공식 입장인 것처럼 보도하는 것은 지양해 달라”며 문제의 발언이 일본조선공업회 사이토 회장의 사견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업계에서도 아직 이 문제가 합병의 실질적 난관으로 부상한 건 아니라는 분위기다. 일단 한국조선해양이 아직 일본에 합병 승인 신청을 내지도 않은 단계이기 때문이다.
양형모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현대중공업이 5개국에 기업결합 승인을 신청할 예정인데, 굳이 일본에 합병 승인 신청을 서두를 이유는 없다”고 분석했다. 중국과 EU 등의 반응을 충분히 살핀 후 일본에 신청서를 내도 늦지 않다는 것.
업계 관계자는 “최악의 경우 일본에서는 영업을 하지 않는 방안도 연구 중인 것으로 안다”며 “일본 기업의 국내 조선사 발주량 자체가 크지 않아, 통합법인이 일본 영업을 포기한다 해도 심각한 타격을 입는 건 아닐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