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정의식 기자) 일본이 한국에 대해 ‘백색국가(화이트국) 배제’ 조치를 취하면서 한일 갈등이 경제전쟁으로 확전된 가운데 일본 제재의 주요 타깃인 국내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전열을 정비하고 대응책 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사장단 회의 등을 주재하며 일본의 횡포를 정면돌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글로벌 반도체 전문가들은 이번 일본의 제재조치가 결과적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국산화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분석하는 분위기다.
7일 일본 경제산업성이 한국을 수출관리 상의 일반포괄허가 대상인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공포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마찰이 본격적인 경제전쟁 국면을 맞았다.
이미 이 개정안은 지난 2일 일본 정부 각의(국무회의)를 통과한 상태여서, 7일 관보 게재를 기준으로 21일 후인 8월 28일부터 적용된다. 이날부터는 일본 기업 등이 군사전용이 가능한 규제 품목을 한국에 수출할 경우 3년간 유효한 일반포괄허가를 받을 수 없게 되고, 비규제(일반) 품목의 경우에도 무기개발 등에 전용될 우려가 있다고 일본 정부가 판단하는 경우엔 별도의 수출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수출 절차가 한층 까다로와진다.
일본 정부가 규정한 전략물자는 총 1194종. 이 중 고순도 불화수소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3종은 지난 7월 4일 한국 수출 시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하는 품목으로 지정됐고, 현재까지 전혀 개별 허가가 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앞서의 3종 외의 어떤 품목이 추가로 ‘개별 허가’ 품목으로 지정될 지에 대해 국내외의 관심이 쏠렸으나 일본 정부는 7일 관보에서는 추가 규제 품목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앞서의 3종과 마찬가지로 국내 반도체 산업을 정조준해 추가 규제 품목으로 지정될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다.
이재용 “긴장하되 두려워말자”…최태원 “위기극복 DNA 있다”
일본 정부의 백색국가 제외가 가시화되면서 규제의 주요 타깃이 된 국내 반도체 ‘2강’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대응태세를 한층 굳히는 모양새다. 특히 두 회사의 수장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전면에 나서서 상황을 진두지휘하며 이번 위기를 일본의 국내 반도체산업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는 계기로 삼으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전자계열사 사장단을 긴급 소집해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 부회장은 “긴장은 하되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자”면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 한단계 더 도약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이 부회장은 6일 충남 온양사업장과 천안사업장을 잇따라 방문해 반도체 부문 최고경영진과 함께 규제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현장 임직원들을 격려했다. 삼성전자 온양·천안 사업장은 반도체 패키징 기술 개발과 검사 등 주로 ‘후공정’을 담당하는 곳이다. 앞으로도 이 부회장은 평택 메모리 반도체 생산라인과 기흥 시스템LSI 및 파운드리 생산라인, 삼성디스플레이 탕정사업장 등을 잇따라 둘러볼 예정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5일 서울 SK T타워에서 16개 주요 관계사 CEO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룹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비상회의를 주재하고 ‘위기 돌파’를 독려했다. 수펙스추구협의회 회의는 통상 전문경영인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회의여서 최 회장의 회의 주재는 물론 참석도 매우 이례적이다.
최 회장은 이날 회의에서 “그동안 위기 때마다 하나가 돼 기회로 바꿔온 DNA가 있으므로 이번에도 극복할 수 있다”며 “흔들림없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하자”고 당부했다.
두 리더의 발언은 최근의 일본발 위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고, 오히려 이를 반전의 계기로 삼겠다는 각오로 읽힌다. 과연 두 리더의 생각처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을까?
전문가들 “탈일본 본격 추진…조기 국산화 가능”
지난 6일 한 국내 매체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생산 공정에 투입되는 약 220여가지 일본산 소재와 화학약품을 한국과 미국, 유럽 등 다른 나라 제품으로 대체하기로 하고, 이 작업을 추진하기 위한 별도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커지자, 생산 공정에서 일본산 소재를 원칙적으로 배제하는 ‘탈일본 생산 원칙’을 확립했다는 것.
이에 대해 블룸버그 재팬은 삼성전자 측이 “부품 공급 업체의 분산화에 착수했지만, 일본산 반도체 재료를 모두 바꾸려는 목표는 아니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고 보도했다. 모든 반도체 재료의 ‘탈일본’은 아니라는 것인데, 이는 다시 해석하면 “대부분의 재료는 탈일본하겠다”는 설명이어서 사실상 삼성전자의 ‘탈일본’ 전략은 기정사실로 읽힌다.
SK하이닉스 역시 그간 SK머티리얼즈를 통한 불화수소 국산화 추진 등 탈일본 전략을 본격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 역시 “일본의 배터리 분리막 제조업체들이 한국 수출 제한에 나설 경우 LG화학 등 국내 배터리 업체에 분리막을 공급하겠다”며 국내 제조업의 탈일본 전략에 동참할 뜻을 피력했다.
국내외 반도체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탈일본’ 계획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대표적으로 박재근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내년 2월쯤이면 일본 소재를 안써도 된다”며 “일본 반도체 업계는 일본 정부 때문에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를 상실해 조만간 ‘아베 파산’이 발생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일본의 반도체 전문가인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 소장도 국내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체 수입원을 찾는 데 약 1년 정도 걸릴 것”이라며 “향후 5년 뒤에는 소재와 장치 등 일본 반도체 산업 자체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증권 분석가들도 일본의 규제가 국내 반도체 산업에 결정타가 되지는 못하며, 장기적으로는 소재와 장비의 국산화를 추동할 것으로 전망하는 분위기다.
김양재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최악의 경우 일본이 한국향 소재 수출을 전면 중단하더라도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시장 점유율은 65% 이상으로 대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국내 메모리 생산이 차질을 빚게 되면 오히려 메모리 가격은 급등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도 반등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또, “국내 기업들은 이번 일본 정부의 대응을 통해 일본산 품목 수입이 정치적 이유로 언제든지 중단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했다”면서 “이에 따라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본격적인 소재·장비 국산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