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석 달을 넘어가고 있다. 예전의 불매운동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 언론의 전망은 틀렸다. 국내에 들어온 일본계 제품 대다수가 전년 대비 큰 폭의 실적 하락을 기록하면서, 자동차 등 일부 대형 브랜드의 철수설까지 나오고 있다.
반면, 불매운동의 여파에도 끄떡없는 분야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디지털카메라다. 캐논, 니콘, 소니, 후지, 파나소닉 등 글로벌 카메라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계 디지털카메라 업체들의 국내 실적은 불매운동 이전과 이후에 눈에 띄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매운동에도 실적 변화 없어
가격비교 사이트 다나와에 따르면 불매운동 첫 달인 7월 디지털카메라 판매량은 불매운동 이전인 5월에 비해 오히려 15%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이트의 디지털카메라 카테고리에서 취급하는 카메라의 90% 이상이 일본 브랜드 제품이므로 일제 디지털카메라 판매량 증가분이 대부분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업체별 구체적인 월간 판매량은 집계되지 않고 있지만 한 일본계 카메라 브랜드 관계자에 따르면 불매운동이 시작되기 전 예상한 월간 실적 추이 전망과 실제 지난 7~8월 판매량이 대체로 일치한다. 이 관계자는 “불매운동이 실적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이는 캐논, 니콘, 소니 등 상위 브랜드가 모두 마찬가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시적인 판매량 상승이 나타난 것은 본래 해마다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업계에서는 예년의 이러한 판매 추이가 불매운동 시작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반복되는 것은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는 이들 일본 브랜드 제품을 대체할 국산 및 타 국가 제품이 전무(全無)하다시피 한 상황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경제전문매체 니혼게이자이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기준 카메라 브랜드별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캐논(40.5%), 니콘(19.1%), 소니(17.7%), 후지필름(5.1%), 올림푸스(2.8%) 순이었다. 상위 5개 브랜드가 모두 일본 기업이며 이들의 시장 점유율은 85%가 넘는다.
콤팩트 디지털카메라부터 DSLR, 미러리스, 풀프레임 미러리스 등등 입문용, 전문가용 카메라까지 디지털카메라 전체 카테고리를 통틀어 마찬가지다. 카메라 바디 뿐 아니라 이미지 센서, 수많은 렌즈까지 일본 제품들이 시장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카메라를 직업적으로 사용하는 사진기자, 사진작가는 물론 취미로 사진 촬영을 하는 일반인들도 대부분 이들 일본 브랜드의 제품 및 생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지난 8월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9차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한국 취재진이 사용하는 캐논과 니콘 카메라를 언급하며 비웃는 듯한 발언을 한 것도 카메라 시장에서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대체 불가”
게다가 일제 디지털카메라를 배제할 경우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제품이 없다.
일각에서는 독일의 라이카와 스웨덴의 핫셀브라드 등을 대체할 수 있는 브랜드로 제안한다. 하지만 정작 실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한 사진작가는 “봉고차로 장사하는 사람에게 벤츠나 볼보의 화물차를 권하는 격”이라는 비유로 일본 카메라와 라이카, 핫셀브라드의 차이를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라이카의 제품은 같은 옵션에서 일본제품보다 2배 정도 비싼 가격이지만 가격 대비 성능에서 일본제품을 따라가지 못하고, 디지털카메라는 일본 브랜드와 긴밀히 제휴하고 있다. 핫셀브라드는 35mm 필름 사이즈의 풀프레임 DSLR 제품군이 아닌 전문 고해상도 사진용 중형카메라 제품군을 주로 취급하며, 가격은 최소 1천만 원대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삼성전자가 카메라를 판매하고 있긴 하지만 2016년 이후 신제품이 없어 사실상 카메라 사업에서는 철수한 것과 다름없다. 해마다 괄목할만한 기술적 개선을 달성한 제품들이 경쟁적으로 나오는 디지털카메라 시장에서 3~4년 전 모델의 경쟁력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
일제 불매운동과 관련해 일본 기업과 관련된 브랜드와 그 대체품을 추천해주는 사이트인 ‘노노재팬’에도 캐논, 니콘 등의 카메라 전문 브랜드에 대해서는 ‘대체 어려움’이라고 분류되어 있다.
불매운동 전부터 오랜 침체기 이어져
불매운동 영향이 없다고 해도 일본 카메라 업체들이 느긋한 입장은 아니다. 7~8월 성수기에 반짝 상승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디지털카메라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든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GfK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국내 카메라시장의 판매량은 6만 8000대로 전년 동기(8만 6000대) 대비 20.9% 감소했다.
카메라 시장의 침체는 휴대전화의 카메라 기능이 발달하면서 시작됐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카메라에도 고화질, 고감도의 이미지 처리가 가능해진 데다 사진 및 영상이 소비되는 매체도 SNS 등 온라인 플랫폼의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카메라영상기기공업회(CIP)가 조사한 월별 디지털카메라 및 렌즈 생산 통계를 보면 하락세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2017년 7월 디지털카메라 생산량은 194만 대였으나 올해 7월에는 116만 대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스마트폰 카메라와 직접 경쟁한 콤팩트 디지털카메라 등 렌즈 일체형의 디지털카메라는 같은 기간 96만 8000대에서 54만 5700대로 줄었다.
반면 삼성전자의 하반기 전략 스마트폰인 갤럭시 노트10이 국내 사전 판매량만 130만 대 이상을 기록한 것과 크게 비교된다.
카메라 업계는 풀프레임 미러리스 제품을 내놓고 돌파구로 삼고 있다. 풀프레임 미러리스는 시장을 선점한 소니에 이어 캐논과 니콘도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전반적인 카메라 시장이 해마다 축소되는 가운데 유일하게 판매량 증가세를 보이면서 시장을 재편하고 있다.
하반기 신제품은 봇물…판촉은 자제
이처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빅3 브랜드는 올해 하반기에도 신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캐논이 DSLR 카메라 EOS 90D와 미러리스 카메라 EOS M6 마크II, 콤팩트 카메라 파워샷 G5 X 마크II, G7 X 마크III 등을 선보였고, 소니도 최신 콤팩트 카메라 사이버샷 RX100 VII와 4K UHD 동영상 촬영 기능을 갖춘 α6100, 6100만 화소의 풀프레임 미러리스 α7R IV 등을 내놨다. 그밖에도 니콘, 후지필름, 리코이미징, 올림푸스 등 대부분의 일본 카메라 브랜드가 신제품을 내놓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국내 시장에서는 눈에 띄는 프로모션을 펼칠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판매량에서는 ‘대체품이 없다’는 이유로 불매운동의 영향을 덜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 브랜드를 바라보는 국내 소비자들의 시선이 카메라에 대해서만 관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캐논코리아컨슈머이미징은 매년 한두 차례 진행하던 기자간담회를 올해는 아예 진행하지 않았다. 풀프레임 미러리스 시장에 후발주자로 뛰어든 니콘이미징코리아는 매년 여름 진행하는 니콘 썸머 페스티벌 행사를 올해도 진행했지만 불매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홍보가 끝난 행사였다.
일본계 카메라 브랜드 한 관계자는 “예정된 출시 일정에 맞춰 신제품을 내놓고는 있지만 광고 및 프로모션 행사 개최 등은 꼭 필요한 수준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일본 카메라 업체들이 눈치를 보느라 발이 묶인 사이 가장 큰 경쟁 상대인 스마트폰 업계는 카메라와 관련한 이슈를 싹쓸이하고 있다. 애플은 아이폰11 시리즈에 초광각 카메라와 인물 사진 조명 기능을 넣었고, 샤오미 미 맥스 알파는 삼성전자의 1억 800만 화소 이미지 센서를 장착하고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