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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그림 길 (41) 양화진] 절두산 옛 이름은 ‘들머리’의 이두식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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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53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19.10.14 09:24:30

(CNB저널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그림을 담은 책들을 보면 양화진(楊花津: 양화나루)을 담은 두 점의 그림을 만난다. 하나는 양화진이며, 하나는 양화환도(楊花喚渡)라는 그림이다. 양화진은 양천팔경첩에 있고 양화환도는 경교명승첩에 포함돼 있다 한다. 이 두 그림은 겸재가 양천현령 시절 양화나루를 그린 것인데 그림을 곰곰 들여다보면 배 떠나는 나루가 주인공이 아니고 그 옆에 보이는 봉우리가 주인공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 봉우리는 천주교 성지 절두산(切頭山)임을 알게 한다. 양화환도에는 지금은 없어진 선유도공원에 있던 봉우리 선유봉(仙遊峰)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제 양화진 이야기를 시작하자. 우선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은 고려 때에도 열려 있던 나루였는데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자 한양의 서쪽을 맡는 중요한 나루터가 되었다. 한양의 서쪽에 자리 잡은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는 중요한 한양의 관문이자 전쟁 등 위급 상황 때 나라의 안위를 보장할 수 있는 보장지지(保障之地)였다. 따라서 이곳 강화와 한양을 연결할 도로망이 있어야 했는데 이 길이 바로 강화대로(江華大路)였다. 일례로 병자호란 때에 왕실의 피난 경로는 강화대로를 거쳐 강화도로 피신하는 것이었다.

이 강화대로는 돈의문(서대문)을 나와 아현(阿峴)과 병현(餠峴, 지금의 大峴, 이대 앞 고개)을 넘어 창천을 건너고 양화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면 바로 양천 선유도의 또 다른 양화나루에 닿게 된다. 이제 양천(陽川) 지나 김포(金浦), 그 다음 통진(通津) 지나 갑곶나루 건너 강화도호부에 닿는다. 이윽고 다시 배를 타고 빤히 보이는 바닷길 하나 건너면 바로 교동(喬洞)이다. 이 강화대로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뱃길인 양화진(楊花津)과 강화의 갑곶진(甲串津)이었다.
 

강화대로의 양천현 옛 지도. 

옛 한강의 중요한 3진은 양화-한강-송파

이렇게 중요한 위치이다 보니 나루(津)에 군대가 주둔하는 진영(鎭營)을 설치하여 양화진(楊花鎭)이 되었다. 어영청 소속으로 두었는데 별장(別將) 지휘 아래 군사들을 배치하였다. 양천의 다른 나루터 공암진(孔岩津), 철곶포진(鐵串浦津)은 양화진 별장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또한 한강 방어와 관리를 위해 동쪽과 중앙 나루에도 진영(鎭營)을 설치했는데 동쪽에 송파진(松坡鎭), 중앙에 한강진(漢江鎭)을 두었다. 따라서 양화진, 한강진, 송파진은 한강의 가장 중요한 삼진(三津, 鎭)이었다.

 

사진 1. 양화진이 그려진 옛 지도. 

이제 옛 지도(사진 1)를 따라 한양도성에서 양화진으로 가 보자. 서대문(돈의문, 지도의 1 지점)을 나와 서대문 네거리를 지나 종근당 제약 부근 고개 아현(애오개, 지도의 2)을 넘어 능안천 위 굴레방다리를 건넌다. 이어서 이대 입구로 넘어가는 대현(큰고개, 餠峴)을 넘으면 신촌 네거리를 지나던 창천(倉川, 3)을 건너게 되고, 와우산(4) 줄기인 동교동 고개를 넘는다. 창천이 흘러내리는 하류에는 한강의 세미선(稅米船)들과 가깝도록 창고인 광흥창(5)을 세웠는데 지금은 전철역 이름으로만 남았다.

동교동 지나 합정동쯤 되는 곳에서 좌회전 하면 이윽고 양화진(6)에 닿는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바로 양천 선유봉 앞에 있던 또 다른 양화진에 닿는다. 그런데 이 지도에서 보면 양화진 동쪽으로 바위(7)과 바위(8)이 보인다. 번호 7은 지금의 절두산을 그린 것이며 번호 8은 지금은 모두 없어진 밤섬의 작은 바위산의 모습이다.

 

사진 2. 양화진 나루 표석. 겸재의 그림 등과 비교해보면 아무래도 위치가 잘못 선정돼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그런데 절두산 아래 강가로 내려가면 오른쪽에 양화진 나루 표석을 세워 놓았다(사진 2). 지도에서나 겸재의 그림에서나 양화나루는 절두산의 서쪽에 자리했으니 이 표석은 위치가 잘못 놓여 있다. 바로 옮겨 놓았으면 좋겠다.

겸재 그림의 한가함과 달랐을 양화진

겸재의 양화진 그림(사진 4)에는 물가에 우뚝 선 절두산을 그리고 그 앞쪽(서쪽)에 몇 척의 배를 그려 넣었다. 이 배들이 있는 곳이 바로 양화진이다. 절두산 좌측(강의 뒤쪽)에는 잘 갖추어진 기와집이 자리했다. 솟을대문을 그려 넣은 것을 보면 지체 높은 이의 집 같다. 간송의 최완수 선생은 이 땅이 태종의 일곱째 아들 온녕군 정(溫寧君 程)의 소유였는데 손자 무풍정 이총 때 와서 별장을 짓고 서호주인(西湖主人), 구로주인(歐鷺主人)이라 했고 동국여지비고에도 무풍정의 별서가 양화나루에 있다 했으니 겸재 그림 속 건물로 비정하고 있다.

 

사진 4. 겸재 작 ‘양화진’. 

무풍정 이총이라는 이는 옛 기록 여기저기에서 보이는데 풍류나 여인네에도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보인다.

또한 기와집 앞쪽으로는 버드나무가 축축 늘어졌으니 양화(楊花)라는 이름과 잘 어울린다. 한편 이곳 양화진과 맞닿아 있는 선유봉의 양화진도 양천의 양화리(楊花里)였다 하니 그곳에도 버드나무가 많았으리라.

절두산 뒤쪽으로는 위용 있는 높이의 산이 중근(中近) 거리에 그려져 있다. 실물로 이런 산은 없다. 방향으로 볼 때 와우산(臥牛山)을 그린 것은 아닐까.

나루에는 배 몇 척이 정박해 있고 절두산 아래에는 한 노인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앞에 저 기와집이 서호주인 이총의 별서(別墅)가 맞다면 아마도 그일 것이다. 풍류객으로 그림과 어울린다. 이처럼 그림 속 양화진은 선경(仙境)처럼 고요하고 한갓지다. 그러나 실제의 양화진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언제나 도강객(渡江客)이 넘쳐나던 곳이었다.

 

양화대교 너머 선유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또 한 폭 양화진을 그린 양화환도(楊花喚渡, 사진 5)에는 그 느낌을 조금 느낄 수 있고, 사천 이병연의 시에는 나루터의 활기가 느껴진다. 그림 양화환도에 표시한 1은 절두산이고, 2는 나루터다. 나룻가에는 버들이 칭칭 늘어졌다. 3은 지금은 없어진 선유봉이며, 4는 관악산이다. 앞의 그림 양화진이 정적이라면 양화환도는 고요함 속에서도 동적이다. 선유도 쪽에는 한 양반이 말을 타고 있고 노복 둘이 앞뒤로 서서 강 건너 뱃사공을 부르고 있다. 앞 노복을 보면 팔을 들어올리고 사공을 부르는 모습인데 팔까지 흔드는 모습이니 무언가 소리치고 있을 것이다. 뱃사공은 날랜 자세로 삿대로 강바닥을 밀면서 선유도 방향으로 선객을 실으러 간다. 왜 노(棹)는 안 보일까? 조선시대 한강은 하상에 토사가 쌓여 그 깊이가 낮았다고 한다. 아마 이곳도 강바닥에 모래가 쌓여 삿대로 밀어 강을 건넜을 것이다. 행주대교 아래 수중보가 생기기 전까지는 한강이 대개 그러했다. 이제 이 그림에 붙어 있는 사천(槎川) 이병연의 시를 읽고 가자. 겸재와 사천 사이, 시와 그림을 바꾸어 보자 했던 시화상간(詩畵相看)의 시다.

 

사진 5. 겸재 작 ‘양화환도’. 

楊花喚渡
前人喚船去 앞사람이 배를 불러 가면,
後客喚舟旋 뒷 손님이 돌아오라 소리치네
可笑楊花渡 재미있네 양화나루
浮生來往還 뜬 구름 같은 인생 또 가고 오네

일찍이 부생공자망(浮生空自忙)이라 했다. ‘구름 같은 인생, 공연히 제 바쁘다’는 말이다. 사천은 오고 가고 부산히 움직이는 선객(船客)을 보면서 구름 같은 인생(浮生)을 읽었던 것이다. 허무가 아니라 비움의 눈이다.

잠두봉 = 가을두 = 들머리

그런데 이곳 절두산에서 배를 탄 이는 강을 건너는 선객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곳 이름도 절두산이 아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조를 보면, 이 바위 절벽을 잠두봉(蠶頭峰)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 ‘시속에서는 가을두(加乙頭)라 부르고, 또 용두봉(龍頭峯)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용산(龍山)이라 하였는데,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俗呼加乙頭 又名龍頭峰 大明一統志稱龍山 在楊花渡東岸)’라고 했다.

이 바위 절벽은 본래 이름이 잠두봉이다.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의미다. 서울에 또 하나 잠두봉이 있는데 남산 중턱 바위봉이다. 둘 다 유명한 잠두봉이다. 또 이곳 잠두봉은 민간에서 가을두(加乙頭)라 부른다는데 이는 순우리말을 한자음을 빌려 쓴 것이다. 한자에는 ㄹ 발음을 떼어내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말 ㄹ은 한자 乙로 표시해 썼다. 가령 둘이라 하면 斗乙로 썼고 볼이라 하면 甫乙로 썼다. 인천 앞바다의 섬 볼음도는 甫乙音島로 썼다. 또 갑돌이는 甲石乙처럼 소리와 의미를 섞어 쓰기도 했다.

손으로 필기를 할 때 乙은 앞 글자 아래 밭침으로 표현한다. 가을두(加乙頭)란 우리말로 加는 더하다의 ‘더’ 음을, 頭는 ‘머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가을두는 ‘더乙머리’ 즉 덜머리이니 들머리를 표현한 이두식 표현일 것이다. 잠두봉, 이곳은 민간이 부르기를 신촌 벌판의 끝 들머리였을 것이다. 또한 이곳을 용두봉(龍頭峰), 용산(龍山)으로도 불렀다 하니 유명하기는 했나 보다.

명나라 사신이 으레 뱃놀이 하던 곳

명나라 사신이 오면 으레 이곳에서 뱃놀이를 했고, 시인묵객들도 아주 많이 뱃놀이를 즐기면서 시문을 남겼다. 조선 선비들은 송나라 소동파(蘇東坡)가 얼마나 우리나라(高麗)를 씹었는지는 까맣게 잊고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흠모하여 이곳에서 뱃놀이 하며 적벽부와 후적벽부의 짝퉁 글을 짓기도 했다.

이곳에서 풍류를 즐긴 명나라 사신 관련 기록 한두 편을 보자. 세종 32년 (1450) 윤 1월 실록의 기사다.

사신이 가을두봉(加乙頭峰)에서 놀므로, 병조 판서 민신(閔伸)과 도승지 이사철(李思哲)에게 명하여 가서 위로하게 하였는데, 사신이 봉우리 위에 올라 바라보다가 “이 경치가 적벽(赤壁)과 다름없다. 참으로 볼 만한 경치로다” 하였다. 소연(小宴)을 베풀고 내려와 배에 올라 흐르는 대로 내려가면서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보고, 또 소연(小宴)을 베풀었다. 희우정(喜雨亭)에 와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예겸(倪謙)이 정인지(鄭麟趾)에게 이르기를,

“공(公)이 어제 외운 바 권근(權近)의 시(詩)를 어찌하여 이 정자에 걸지 않소?” 하고, 이어 일수요남(一水繞南) 삼산진북(三山鎭北)의 글귀를 외우면서 말하기를, “이 연귀는 마땅히 이 정자에 있어야 한다” 하였다. 해가 저물도록 한껏 즐기고 돌아왔다.

使臣遊加乙頭峯, 命兵曹判書閔伸、都承旨李思哲, 往慰之。 使臣登峯頭觀望此景, 無異赤壁, 眞奇觀也。 設小酌, 遂下登舟, 順流而下觀魚, 又設小酌, 至喜雨亭設宴。 倪謙謂鄭麟趾曰: “公昨日所誦權近詩, 何不掛此亭乎?” 仍誦一水繞南三山鎭北之句曰: “此聯當在此亭。” 日暮, 極歡而還。


여기에서 희우정(喜雨亭)이란 지금의 망원정인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서였다. 세종이 이곳에 행차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마침 가뭄에 비가 내리자 ‘희우정’(기쁜 비 정자)이라 하였다고 한다. 뒤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소유가 된 후 ‘망원정(望遠亭)’으로 바뀌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그 지역 동명도 망원동이 될 정도였으니.
또 하나 임진란 후인 1606년(선조 39년) 4월에 온 명나라 사신도 이곳 잠두봉에서 놀았다.

영접도감(迎接都監)이 아뢰기를, “잠두봉(蠶頭峰) 아래에서 뱃놀이할 때에 정사(正使)가 조금 매끈한 석벽(石壁)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잠두라는 옛 이름이 매우 좋으니 새 이름으로 고칠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 창옥암(蒼玉岩)이라는 세 글자와 일을 서술한 1절(絶)을 써서 보내겠다’ 하였습니다. 분부대로 새기게 하소서. 창옥암이라고 크게 쓴 글자 및 4운(韻)으로 된 1수(首)를 등서(謄書)하여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새기는 일은 나중에 처리하라” 하였다.

창옥봉이란 각자 새겼다 했거늘

창옥봉이 궁금하여 절두산 돌 표면을 찾아보아도 ‘蒼玉峰’이란 각자를 필자는 찾을 수 없었다. 명(明)이라면 하늘 같이 받들던 선조 시대에 새기지 않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다.

사신들은 그렇다 치고 이곳 잠두봉을 읊은 많고 많은 시문 중에 몇 편만 읽고 가자. 이행(李荇) 용재집(容齋集)에서 뽑아 보았다. 긴 시 중에 한 구절이다. 그는 남곤, 박은 등과 소동파를 흉내 내어 뱃놀이를 했다.

멋진 일 오직 우리들의 것 勝事惟吾輩
이 놀이가 어찌 우연이겠나 玆遊豈偶然
풍류라면 전해지기가 적벽이요 風流傳赤壁
인물은 소동파 신선이 떠오르네 人物憶蘇仙

다음은 윤기(尹愭)의 무명자집에서 한 편 읽는다.

누에나루수양버들/蠶渡垂柳
누에나루 수양버들 초록으로 줄을 지어 蠶渡垂楊綠作行
똬리 연기 감싸 물결 일으키네 縈煙褭娜拂滄浪
천 가닥 실로 힘껏 가는 배들 묶었는데 千絲剩繫行舟着 

오고감이 어이하여 날마다 분주한지 來去緣何日日忙

수양버들 죽 늘어선 양화나루의 분주한 모습을 읊었다.

그렇다고 잠두봉에서 풍류만 읊은 것은 아니다. 가뭄이 극심하면 제(祭)도 올렸다. 이해 못 할 일은 기우제를 지내면서 범(虎)의 머리를 수장시키는 일이다. 세종 17년(1435년) 7월의 일이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범의 머리를 한강(漢江)의 양화진(楊花津)에 가라앉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請沈虎頭于漢江 楊津” 從之).

범의 머리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흥미로운 사실이다.

양화진 빙고로 얼음 날랐던 고초

다른 일로는 양화진에 빙고(氷庫)가 설치된 일이다. 조선 시대 백성들은 자주 부역에 시달렸다. 강가에 사는 강민(江民)들은 겨울이면 얼음을 채취해야 했다.

동빙고와 서빙고에서 먼 곳의 백성들은 채취한 얼음을 빙고까지 운반하는 일도 해야 했다. 백성은 죽을 지경이었다. 이에 정조는 과감한 조처를 취하였다.

1789년(정조13년)에 강민의 얼음 채벌 일을 영구히 덜어주고, 빙고를 양화진에 설치하였다. 운반하는 데에 폐단이 있으므로 호조에서 아뢰어 양화진에 설치했던 것이다(永除江民伐氷之役。出置楊花津。運輸有弊。戶曹筵禀。出置).

그 흔적이 어디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합정역 7번 출구에서 내려 절두산을 찾아간다. 그곳에는 천주교의 절두산 순교성지와 개신교의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다. 절두산(切頭山)은 잠두봉을 달리 부르는 말로서 그 이름에서 느껴지듯 많은 이가 목숨을 잃은 장소가 되었다.

때는 1866년 병인년,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몇 달 동안에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중 9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남종삼, 정의배 등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한다.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중국 톈진에 있던 로즈 제독에게 학살 사실을 알렸다. 로즈 제독은 리델 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의 안내로 인천 앞바다에서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올라왔으나 세의 불리함을 느끼고 수로를 세밀히 측량하여 지도를 만들어 중국으로 퇴거하였다.

다음달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와서 10월 14일 한강수로 봉쇄를 선언하고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점령하였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병인양요다. 그뒤 천주교 신자 처형은 이곳 잠두봉에서 이루어졌다는데 이때부터 아름다운 이름 잠두봉은 목이 잘린 산, 절두산이 되었다.
 

순교자 관련 조형물.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척화비 앞에서 베델을 생각하다

천주교 측에서는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는 해 이곳에 순교자기념관을 짓고 성지화하였다. 절두산 성지에는 그날의 아픔을 생각하게 하는 전시품들도 있고, 아픔을 극복하려는 시도들도 보인다.

시대착오적 산물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도 서 있다. ‘洋夷侵犯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매국이다). 대원군의 절실한 심경이 읽혀진다. 조선을 집어먹으려는 외세 앞에서 힘없고 정세에 어두운 늙은 정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온 백성을 독려하여 싸우자고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요즈음 같은 난세(亂世)도 대원군의 시대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시대착오적 척화비 앞에서 우리의 오늘을 생각한다.

 

김대건 신부상.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김대건 신부상도 보인다. 큰 돌에 구멍을 뚫어 동아줄로 천주교인들 목을 걸어 교수형 시키던 형틀도 보인다. 이름도 없이 순교한 이들을 위한 기념탐도 보인다. 천주교도가 아닌 필자도 곳곳을 둘러보고 옷깃을 여민다. 가을두(加乙頭), 잠두봉, 용두봉이 끝내 절두산이 된 가슴 아픈 현장을 떠나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간다.

 

대한매일신보로 일제강점기에 빛을 밝혀준 베델(裴說)의 묘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초창기 이 나라를 위해 애쓰신 외국인들이 잠들어 있다. 헐버트, 아펜젤러…. 어느 분 하나 감사하지 않은 분이 없지만 필자는 딜큐사의 주인 알버트 테일러 묘역과, 대한매일신보로 빛을 밝혀준 베델(裴說) 묘역에 오래 서 있었다. 겸재의 그림 양화진 속 한옥 별서가 그려진 그곳이 이제는 천주교 성지와 서양 선교사 묘역이 되었다.
 

테일러가 묘역.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민초의 아픔 서린 양화대교에서

강 너머를 바라본다. 반대편 선유봉(선유도)에 있던 양화나루는 양화대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뱃놀이도 나룻배도 가지 않는 땅이다. 양화대교 건너 전철이나 택시로 가야 하는 격세의 감(感)이 든다. 문득 자이언티라는 가수가 읊조리듯 노래하던 ‘양화대교’가 생각난다. 요즈음 시대의 개인적 아픔을 읊조린 노래다. 이곳이 옛 시인묵객의 시 한 수처럼 가사라도 한 번 읽어 볼거나.

우리 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아침이면 머리맡에 놓인
별사탕에 라면땅에
새벽마다 퇴근하신 아버지
주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네
엄마 아빠 두 누나
나는 막둥이, 귀염둥이
그날의 나를 기억하네
기억하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내가 돈을 버네, 돈을 다 버네
“엄마 백 원만” 했었는데
우리 엄마 아빠, 또 강아지도
이젠 나를 바라보네
전화가 오네, 내 어머니네
뚜루루루 “아들 잘 지내니”
어디냐고 물어보는 말에
나 양화대교 “양화대교”(후략)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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