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갑이 아니다” 예전에 한 이동통신 업체를 취재 할 때 들었던 일이다. 대기업에서 이 같은 말이 나올 만큼 기업 내부에서의 혁신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열린 혁명’(오픈 이노베이션) 시대가 열리면서 생긴 변화다.
‘닫힌 시대’에서 ‘열린’ 시대로 가고 있다. 이 같은 징조는 오래전부터 나타났다. 미국통신사인 AT&T의 벨 연구소는 당시 최고의 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유망한 스타트업에 투자한 시스코에 우위를 빼앗겼다. IBM 역시 승승장구하다 개인용 컴퓨터(PC) 시대에 들어서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자 기술을 공개하고 서비스 위주로 개편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했다. 가장 최근의 예로 구글이 안드로이드 운영체계를 열린 방식으로 운영해 닫힌 체계로 운영하던 애플의 아이폰을 따라잡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닫힌 시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었다. ‘갑질’의 시대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회사들 중 상당수는 중요한 기술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를 경쟁력으로 내세웠고, ‘기술탈취’와 관련된 어두운 그림자를 갖고 있다.
실제로 2016년에만 해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특허무효심판에서 중소기업 패소율은 작년 71.9%에 달했다. 기술탈취가 선진국이라고 해서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기업이 성장해야 국가 경쟁력이 생긴다는 ‘낙수효과’를 신봉하던 우리나라에서는 유난히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같은 현상은 최근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현재 진행 중인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기술 탈취’를 막기 위한 기관인 기술분쟁 조정·중재위원회에 접수된 건들이 이를 증명한다. 2015년 설치된 이 위원회에 접수된 86건의 기술분쟁 조정건 중 78건 중 조정안이 제시된 42건 중 28건은 불성립 됐으며, 36건은 자료부족 등으로 조정안이 제시되지 못했다. 실제 분쟁 해결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현 정부가 유난히 중소기업 보호를 부르짖고 있기도 하지만, 더 이상 자체 기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승승장구 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동통신업계는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는 최근 수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협업을 강조하고 있다. KT 같은 경우 아예 올해부터 기술탈취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시스템까지 도입했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최근 들어 더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4차 산업혁명’과 관련이 있다. 독일이 ‘인더스트리 4.0’을 제창하면서 ‘제조업과 정보통신의 융합’이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됐고, 갈수록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는 어떤 대기업도 모든 것을 점유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다양한 아이디어와 기술이 등장했고, 이들이 융합을 이루면서 새로운 4차 산업 체계로 연결되기 때문에 단순히 최고의 기술을 보유했다고 해서 최고의 기업이 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닫힌 시대’의 가치가 완전히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기술을 갈고 닦아 ‘닫힌 체계’를 유지해 최고의 기업이 된 사례도 아직 많기 때문이다. 여전히 안드로이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애플의 아이폰이 그렇고, 제조 비법을 외부에 공유하지 않는 코카콜라 등의 회사들 역시 자신들의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어느 한 강력한 회사가 최고의 기술만으로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기보다는 구세대의 가치와 신세대의 가치가 충돌하면서 탄생하는 신사업이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시대는 더 이상 강력한 대기업 혼자 힘으로 이끌어 가는 산업 구조를 부정하고 있다.
대신 ‘신뢰’나 ‘존중’ 같은 인간적인 가치가 빛을 보고 있다. 실제로 기자가 만났던 대기업 관계자들은 협력업체들에 대해 단순한 납품업자 취급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업체들이 다른 업체들과 손을 잡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보다 효율적이거나 과거에는 없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하면 현재 높은 효율을 내는 방식의 산업은 뒤쳐지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의 결실만을 바라보기보다는 그 결실이 제대로 맺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새 시대가 작동하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새 시대는 ‘혼자 잘난’ 독불장군이 아닌 ‘같이 잘난’, 협력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