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0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19.12.09 09:09:32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다발 킴은 ‘레드스타킹’ 시리즈에서 빨간색 스타킹을 신고 승리의 V자를 만들어 세상을 향해 용감한 말하기를 시도한다. 예로부터 빨강은 생명과 열정,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한 빨강은 위험을 뜻하는 색인 동시에 벽사의 색이기도 하다. 다발 킴의 ‘레드스타킹’ 역시 이런 상징과 연결된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만들어나가는 주체가 되기 위해, 현실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낯선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레드스타킹’ 작업이 시작되었다.
‘레드스타킹’ 시리즈뿐 아니라 다발킴의 드로잉과 설치 작업은 모두 환상의 순간을 포착한 것 같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환상적 요소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이 낯선 상상의 세계는 결코 현실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 현실을 벗어나지만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중적인 시공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정형화된 이상향이 아니다. 그것은 척박한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현실 위에 존재하는 이상향을 향한다.
우리는 일상에 지쳤을 때,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느낄 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잠시 현실을 벗어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다발 킴은 자신을 찾기 위해, 나아가 삶에 지쳐 자신의 본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가 사라진 사람들을 대신하여 여행한다. 그리고 자유와 승리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에게도 용기를 내라 말한다. 사막지대, 산, 유적지를 배경으로 행위하는, 강한 생명력을 발산하는 몸은 작가가 그동안 자신을 억눌러왔던 고정관념과 관습,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보여준다.
다발 킴은 ‘레드스타킹’을 비롯한 자신의 작업이 현대인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길 원한다. 자신을 찾아 나가는 일은 작가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레드스타킹’은 작가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를 살아가는 주체인 우리 모두와 이어지는 이야기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꿈을 꿀 수 있는 사막을 향해 지속적인 탐험을 하던 작가는 즉흥적으로 레드스타킹을 신고 거꾸로 된 다리 포즈를 취한다. (중략) 이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생명력 있게 존재하려는 삶을 의미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러한 포즈를 통하여 언어와 표정이 없어도 단순하고 강렬한 모습으로 자신을 이미지 속에 당당하게 투영하게 된다. 퍼포먼스 사진 작업인 ‘유카의 꿈’(2018)은 그 시작점이 된다. 사막의 바람에 맞서 작은 열매라도 맺기를 바라는 유카는 척박한 땅에서 꿈을 찾아 나선 작가와 닮아있다. 그녀에게 궁극적으로 헤테로토피아가 된 사막뿐만 아니라 모로코의 멸망한 도시 속에서, 안달루시아의 비밀 정원에서, 폐탄광 수직갱에서 레드스타킹의 자아 찾기는 지속된다.(김보라 성북구립미술관장, 전시 서문 ‘천개의 횡단, 그 생명의 시원을 찾아서’)”
다발 킴 작가, 강재현 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과의 대화
Q. 전시 제목인 ‘천 개의 횡단’의 의미가 궁금하다. 실제로 천 번이라는 숫자를 말하는 것인가? 또한 현재까지 방문한 곳은 어디인가? 사막 지역으로의 여행도 쉽지 않을 텐데 그곳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그것을 촬영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힘들었던 순간이 있는가?
A. 다발 킴: 천 번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여정 속에서 일어나는 천 번 이상의 호흡을 뜻한다. 실제로 사막이나 높은 지대에 올라 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일상에서보다 나의 호흡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또한 수없이 호흡하고 나를 되돌아봤던 시간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내가 작업하면서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맞이할 시간 모두를 함축하는 단어다. 천 번을 그만큼 많은 여정을 떠날 것이라는 의미로 읽어도 좋다. 나아가 앞으로도 나의 작업 세계가 지속될 것임을 예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6년부터 3년에 한 번씩 사막에 갔다. 미국 유타 사막(2006), 몽골 고비 사막(2009), 인도 타르 사막(2012), 호주 레지던시 프로그램(2015, 호주 노마딕 아트 레지던시 in 버클리아트센터), 미국 산타 페, 화이트 사막(2018), 치와와 사막(2018), 모로코 사하라 사막(2019) 등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모든 지역에서의 여정이 다 어려웠다. 지금 떠오르는 것은 모로코의 로마 유적지에서의 촬영이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사막지대라 하지만 나의 퍼포먼스에 대한 정보가 없는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서 다리로 V자를 만들어 포즈를 취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작업을 진행하니 금기를 깨뜨리는 희열, 억압의 해소, 해방감 등이 느껴졌다. ‘모로코 여성과 레드스타킹’(2019)도 쉽지 않았던 작업이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달리 자유롭게 살길 원하는 모로코 여성이 나와 작업하면서 환하게 웃었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레드스타킹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특별한 삶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Q. 작가는 레드스타킹이 자아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도구라 말한다. 많은 색의 스타킹이 있을 텐데 굳이 빨간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전시를 설명하며 이야기해준 ‘18세기 문학을 좋아하는 여성이나 여성 문학가를 자처하는 지식인 여성들을 부르던 부정적 의미의 단어’인 블루스타킹과의 대비를 위해서인가? 전반적으로 작업을 준비할 때 철학이나 미학적인 이론에서 영감을 받는 편인가? 사전 조사와 준비는 어느 정도 진행하는가?
A. 다발 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주된 개념을 미리 정하거나 주입하지 않는다. 작업이 결말에 가까워질 때쯤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다. 나는 드로잉 작업을 할 때도 화면의 구성을 계획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전체적인 이미지가 그려지면 바로 그린다. 레드스타킹 작업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나는 그 어원이나 역사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미리 자료를 조사하고 그에 맞춰 작업을 진행한 것이 아니다. 모든 과정은 매우 즉흥적이고 직관적이었다. 화이트 사막에 갔을 때, 내가 제작한 의상을 입고 사진 촬영을 진행해야겠다는 정도의 계획만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진행해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트에 갔는데 레드스타킹이 보였다. 사막지대에서 빨간색을 보니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현장에서 레드스타킹을 구입하고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하이힐도 그곳의 중고 마트에서 구한 것이다. 당연히 퍼포먼스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사막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에는 사막에서 끝없이 이동하고, 야외에서 숙식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부차적인 노동이 너무 많다. 차분히 계획하고, 그대로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매우 즉흥적으로 진행된 작업인데도 그 결과물이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 나도 매우 놀랐다. 다만 다리로 만든 V자의 경우 나의 드로잉에 지속적으로 그와 유사한 형상이 등장하고 있어 내 기억 속에 잠재된 이미지가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Q. 드로잉 작업을 보면 동화적이기도 하지만 그로테스크한 괴물 같은 이미지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드로잉의 분위기가 설치 작업에도 담겨 있다.
A. 다발 킴: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 때 고서적을 파는 가게에서 발견한 신화 이야기를 그려놓은 드로잉북에서 괴기스러운 마스크를 쓴 인간상들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거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모든 드로잉 속 이미지의 근원은 나 자신이다. 실제 드로잉에 등장하는 여성도 나의 모습에 근거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드로잉 작업과 가면 등의 오브제를 통해 내 작업을 되돌아보면 신화 속에 나타나는 반인반수나 신화 속의 신적 존재나 전사와 같은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Q. 모든 작품이 다 의미 있겠지만 다발 킴 작가는 ‘유카의 꿈’을 이번 전시의 대표 이미지로 꼽았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로서 꼽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미지나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A. 강재현: 나 역시 시각적으로는 레드스타킹과 다리를 벌려 만든 승리의 V자가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사막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 생성과 소멸, 순환, 새로운 시작을 읽어낼 수 있는 지점이다. 작품으로는 ‘19세기 자화상을 들고 있는 레드스타킹’(2018)에 가장 다발 킴다운 당당함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유카의 꿈’이 ‘레드스타킹’ 시리즈를 대표한다면, 이 작품은 다발 킴 그 자체, 다발 킴의 작업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함축하는 작품 같다.
다발 킴: 당시 어떤 관객도 없는 황량한 사막지대에서, 그것도 해가 질 무렵에 ‘19세기 자화상’(2010)을 들고 촬영했다. 나의 작품을 봐주는 관객이 한 명도 없는 외로운 상황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픔, 그와 대비되는 자신감을 동시에 느꼈다.
Q. 전시 ‘천 개의 횡단: 다발 킴의 레드스타킹’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주된 이야기는 무엇인가? 관객이 주목해줬으면 좋겠다고 염두에 둔 부분이 있는가? 작가가 여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 이야기, 여성으로서의 자아탐구로 이어진다. 물론 여성이기 이전에 작가의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A. 강재현: 작가 다발 킴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공유할 수 있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연극적인 요소가 강한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이 포함되었다. 그동안 드로잉과 오브제, 텍스트로 제시되던 작품의 제작 과정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전시다. 빨간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은 여성 작가에 의해 진행되는 퍼포먼스이기에 여성의 이야기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접근도 가능하고 유의미하다. 여성인 작가가 삶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시도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발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다발 킴 작가가 세상을 경험하고 삶을 개척하는 과정을 담아내는 것이 우선인 작업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발 킴: 2006년부터 시작해 3년마다 진행했던 ‘사막 프로젝트’는 예술가들이 여행하면서 현장(사막)에서 발견한 자연의 오브제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고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이었다. 나는 ‘사막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미술가가 사막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와 같은 고민을 반복했고, 그 과정 중에 ‘레드스타킹’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찾게 되었다. 사실 예술가만 자아탐구를 시각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여행 중에 자신만의 상징적 기록물을 남길 수 있다. 실제로 노르웨이 트롤퉁가(Trolltunga)에서 자신이 들고 온 인형을 곳곳에 놓으며 사진을 찍는 여행자와 마주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인형을 통해, 나는 레드스타킹을 통해 자취를 남기고 자아 찾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작가이기 때문에 그 결과물을 시각화하고 전시장이라는 공적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이 나의 작업을 통해 내가 여행 속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공유하고, 잠시 현실을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찾는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