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태 편집국장) 성인이 된 작은아들이 최근 이런 얘기를 해 필자 부부는 깜짝 놀랐다. “지금에야 얘기하지만 처음 미국에 갔을 때 흑인들로부터 조리돌림을 당해 스쿨버스 타는 게 고통스러웠다”는 얘기였다. 나름 성격도 활달하고 흑인 친구들과도 잘 놀아 “성격 하나는 정말 인터내셔널이군”이라며 안심했던 아들인지라 더욱 놀라웠다.
대중교통 수단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미국에서 초-중-고 학생들은 스쿨버스 또는 부모의 승용차를 타고 통학을 한다. 부모 중 한 명이 시간 여유가 있으면 등하교를 자가용으로 시켜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스쿨버스에 의존한다. 우리도 맞벌이를 하는 통에 초등 4, 6학년 때 미국으로 간 두 아들은 스쿨버스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데 그 처음 탄 스쿨버스에서, 더구나 흑인이 적지 않은 동네인지라 스쿨버스 이용 학생의 다수가 흑인인 그 버스에 두 한국인 형제가 탄 날, 흑인 아이들이 모자를 벗겨서 조리돌림을 하는 통에 완전히 얼음이 됐었다는 토로였다.
엄마가 “왜 그때 엄마한테 얘기 안 했니?”라고 물었지만 아들은 “몰라. 왠지 말해선 안 될 것 같았어”라고만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학교의 멕시칸 아이들이 두 한국 출신 형제에게 “코가 왜 이리 낮냐?”고 집단적으로 놀려댄다는 사실을 필자가 듣고는 학교 측에 강력한 항의 편지를 써서 학교가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던지라, 왜 흑인에게 당한 1차 인종차별은 함구했고, 멕시칸에게 당한 2차 인종차별은 부모에게 알렸는지도 헷갈린다. 경험이 쌓여서 그랬을까? 이렇게 미국은 인종차별이 계속되는 나라다.
미국은 인종차별, 한국은 집 차별
요즘 한국에 부동산 열풍이 또 불면서 초등학생들이 ‘빌거지(빌라 사는 거지)’ ‘엘사(LH 임대아파트 사는 사람)’ 등으로 친구들을 놀려댄다는 기사가 나왔다. 미국에서의 삶을 돌이켜보면 꽤 긴 기간을 임대아파트에서 살았지만,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성격이 활달한 편인 아들은, 같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인도계 결손가정(엄마와 함께 사는) 친구와도 잘 사귀었고, 방학 때는 수영장 딸린 대저택에 사는 백인 친구 집에 가서 며칠씩 머물다 오기도 했다. 인종차별은 겪었어도 사는 집 때문에 차별은 받아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미국은 인종차별의 나라, 한국은 부동산 차별의 나라인가 보다.
다른 피부색에 대한 인종차별은 ‘본능적’이다. 원시 인류에게 외모가 다른 ‘종족 밖 인간’의 등장은 곧 전쟁을 의미했기에 이런 성향이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졌다. 그래서 현대인이라도 다른 외모-피부색을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는 심리학 실험결과가 여럿 발표돼 있다.
반면 부동산 차별은 본능적이지 않다. 미국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만난 다양한 피부색 어린이들이 사는 집에 상관없이 잘 섞여 노는 걸 보면, 교사가 특별히 “너희 집은 빌라, 아파트, 단독주택 중 뭐고, 자가니 전세니 월세니?” 따위를 따져 묻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모들이 “저기 빌라나 임대아파트 사는 아이들과 놀면 절대 안 돼”라고 훈육하지 않는다면 집의 크기나 종류에는 보통 무관심한 게 어린이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에 돈을 이유로 한, 주거형태를 이유로 한 차별이 어른들 사이엔 분명히 존재한다. 돈이 최고 권력인 자본주의에서 돈을 근거로 한 차별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단지 필자가 말하고 싶은 건, 필자가 직접 겪은 미국의 초-중-고 현장에선 돈-집을 바탕에 깐 차별이 한국에서처럼 어른들에 의해 공공연하게 조장되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고교생이 되면 여유가 있는 집은 자녀에게 통학용 차를 사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필자의 아들들이 “차 있는 아이들이 거지라고 놀려댄다”라든가, “왜 우리집은 차도 못 사줘?”라며 절망적인 표정 비슷한 걸 지어본 적은 없다.
필자의 ‘국민학교’ 시절 담임선생님들은 자주 집에 TV가 있는지, 아버지는 뭐하시는지 등을 공개적으로 물으셨고, 수업료를 제때 못 낸 아이들을 교실 앞으로 불러내는 행사를 통해 ‘집안사정이 어려운 친구를 널리 알리는 데’ 열심이셨다. 없어진 줄 알았던 이런 행태들이 최근 기사를 읽어보면 다시 “너희 집은 어떤 종류냐”를 묻는 방식으로 부활하신 듯하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차별을 좋아하는 한국인’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1월 28일자 경향신문은 [나만의 상처를 모두의 과제로 풀어갈 ‘차별금지법’]이란 기사를 실었다. 작은 제목들은 이렇다.
- “나중에” “검토” 미룬 14년 … 모두의 인권 보호도 미뤄졌다
- 남녀고용평등법 등 진전 있었지만 개별적 대상의 ‘차별 금지’만 해당
- 일상적인 차별·혐오는 보호 못해 … 모든 이 지키는 ‘차별금지법’ 필요
차별금지법 법안이 이미 14년 전에 국회에 제출됐지만 그간 의원님들은 “다음에”를 반복하면서 미뤄왔고, 그래서 차별 금지는 극히 일부 분야에서만 이뤄졌고 일상에서의 차별(빌거지나 엘사를 놀리는)은 제동장치 없이 계속되리란 얘기다.
앞에서 멕시칸 학생들의 한국 출신 학생에 대한 코 높이 놀림에 대한 항의 편지로 학교가 뒤집힌 적이 있다고 썼지만, 미국엔 차별금지법이 있기에 이랬을 것이다. 한국처럼 차별금지법이 없다면 한갓 아이들 장난에 불과한 코 높이 놀림에 교사들이 놀라면서 “공개 사과를 안 하면 퇴학을 시키겠다”고 멕시칸 학생들을 처벌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위적으로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는 돈을 잘 못 번다. 구글코리아는 2018년 ‘성소수자 친화적 직장을 만드는 다양성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여성과 남성, 성소수자, 다른 인종,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같이 있을 때 훨씬 좋은 아이디어가 나와 회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 있을 때 아이디어가 잘 나오고, 모임의 성격도 건강하다는 실험 결과들 역시 다양하다. 하버드 출신들만 모여 있으면 최고로 잘난 결정을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정반대일 수 있다는 사실은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 케네디 백악관(온통 하버드 출신 천재들로 채워진)의 대화록에서 여실히 드러난단다.
차별 즐기는 국민의 끝은?
인위적으로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는 망하기 쉽다. 양반들은 한자를 쓰고, 나머지 백성은 일자무식이었던 조선 왕국은, 공부를 엄청 많이 한 사대부들이 나라를 통치했지만, 결국 두 손 들어 나라를 일본에 바치는 형식으로 망해버렸다. 그 길을 또 가고 싶을까?
서울대생들이 최고로 많이 빌리는 책이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란다. 이 책의 결론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많이 섞이는 지역이 이긴다’는 것이다. 3개 대륙(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이 만나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인류 첫 문명이 생긴 게 바로 섞였기 때문이란다. 섞였기에 인종도, 작물 종류도, 가축 종류도 가장 많았단다. 섞이는 건 혼란스럽지만 섞임의 결과는 강하다.
인류 최초로 대제국(진시황제)을 만든 중국은 강력했지만, 다양한 소국들이 왕권(세속)과 교황권(기독교)으로 나뉘어, 또 시민(자유주의)과 신민(절대주의)으로 나눠 끝없이 싸우면서 섞여온 유럽 나라들에 패배했다. ‘총-균-쇠’가 인기인 나라에서, 차별과 순혈주의가 기승을 부린다니 책은 도대체 왜 읽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