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태 편집국장)유럽인들의 ‘아시아인 비하’가 도를 넘고 있다. 아시아인을 거리에서 “너는 바이러스”라며 질병 취급하는가 하면, 유럽의 이른바 ‘좌파 성향 정론지’들도 중국 또는 아시안 때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게 독일의 유명한 주간지이며, 진보적인 시각을 반영하던 ‘슈피겔’지의 2월 첫째 주 표지다. 이 잡지는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의 색깔과 동일한 붉은 비옷을 입은 아시아 청년의 모습으로 표지를 가득 채우면서, ‘중국산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제목을 뽑았다. 부제는 ‘세계화가 치명적 위험이 될 때’라며 세계화를 걱정하는 듯 했지만, 오성홍기의 색으로 가득 찬 표지는 아직도 유럽인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황화론(황인종 아시아인이 유럽을 정복하려 쳐들어오는 화가 될 것이니 예방 차원에서 처단-정복해야 한다는 논리)을 되살리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잡지가 출간되자 중국 정부는 “경멸한다”는 표현까지 써 가며 강력 반발했다. 이러한 중국 측의 반발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20세기 말 세계적 재앙이었던 에이즈(AIDS)를 회상해 보자. 에이즈의 원산지는 미국이었고, 그것도 남성 동성애자 사이에서였다. 남성의 동성애는 유럽 역사에서 사형에까지 처해졌던 극혐오 중범죄였다. 에이즈로 세계가 공포에 떨었을 때 아시아 매체들은 잡지 표지를 미국 국기 색깔로 치장하면서 ‘미국산 에이즈’라는 제목을 뽑았었는가? 필자의 기억으론 그렇지 않았다. 공포에 떨었지만 그렇다고 거리의 백인에게 “넌 바이러스”라며 배척하진 않았다.
최근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원장이 “모든 동양 학생은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지시했다지만 그런 식의 차별 조치도 당시 없었다. 이성적인 대응책이라면, ‘최근 중국을 다녀온 사람은 안전이 확인된 다음이라야 강의에 출석할 수 있다’라는 것이어야 했지만 이 음악원은, 중국 방문 여부에는 상관없이, 즉 방학 때 중국을 다녀온 이탈리아인은 안전하다고 본 반면, 이탈리아에 계속 머물고 있었어도 한-중-일 학생은 등교가 안 된다는 식이었다. 병이 아니라 인종에 초점을 맞춘 결정이었다.
슈피겔은 그래도 중립적인 부제목이라도 뽑았지만, 유럽의 우익지들은 더 험하다. 덴마크의 보수 일간지 ‘율란츠-포스텐’은 오성홍기의 별 5개를 신종 코로나 입자로 바꿔놓은 ‘국기 모독’까지 시도했다. 미국에서 에이즈가 시작됐다고 성조기를 바이러스로 변형시킨 조롱이 있었던가?
2016년 출간된 ‘황인종의 탄생’이라는 흥미로운 책이 있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왜 황인종의 ‘탄생’인가? 황인종이란 게 백인종, 흑인종과 함께 지구에 ‘원래’ 존재했던 것 아닌가?라는 상식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제목이다.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1700년 이전, 즉 청나라가 세계 최강이고, 중국을 방문한 유럽인들이 ‘황금이 넘치는 나라’에 놀랐던 시대만 해도 ‘황인종’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니 말이다. 저자 마이클 키벅(미국인. 현재 타이완국립대 교수)은 각종 문헌을 제시하며 이렇게 전한다. 잘사는 중국-일본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이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하얀 백인”이라고 얘기했단다. 한 예로 1684년 동아시아를 방문한 프랑스의 의사 겸 여행가 프랑수아 베르니에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백인(véritablement blanc)”이라고 썼단다(책 21쪽).
이랬던 유럽인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을 앞둔 1700년대 이후였다고 키벅은 논증한다. 저명한 분류학자인 칼 린네(스웨덴)는 1735년 ‘자연의 체계’라는 획기적 저서를 내놓으면서 인류를 4가지 피부색으로 분류한다. 백색 유럽인, 홍색 아메리칸 인디언, 갈색 아시안, 흑색 아프리카인으로. 린네 이전에는 이처럼 색깔로 인종을 나누는 체계는 없었다고 한다. ‘자연의 체계’ 초판에서 아시안을 ‘갈색’이라고 했던 린네는 판갈이를 거듭하면서 동양인을 점점 더 노란 색 쪽으로 몰고 간다. 그가 동원한 라틴어는 ‘luridus’였다. 노란 색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lurid는 더러움, 핼쑥함을 함의하는 노란 색 의미다. 즉 린네는 흑과 백의 ‘중간’을 의미하는 색이 아니라 특히 허약함과 질병을 암시하는 색을 말하고 싶어했기 때문(95-96쪽)이었다는 것이다. 흑(흑인)과 백(백인)의 중간이 느닷없이(아무 근거 없이) ‘더러운 노란 색’을 동양인에게 린네가 뒤집어씌웠다는 것이다.
‘황인종’을 탄생시킨 백인 제국주의 학자들
제국주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1800년대(1840년 아편전쟁 일어남)를 앞두고 독일의 인종학자 블루멘바흐는 아예 동양인을 ‘몽골인종’으로 분류한다. 몽골인종이란 실체가 없다. 몽골이라는 나라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진화에 가장 뒤쳐진 원시적 아시아인’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블루멘바흐가 동원한 용어일 뿐이다. 블루멘바흐는 몽골인종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랜 기원을 갖는 인종이지만, 진화가 멈춰버려 이른바 ‘몽고인의 눈’(“찢어진 눈”으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표현하는)을 아직도 갖고 있고, 진화를 계속해 최고 단계에 이른 백인은 유아 단계 또는 몽골리즘(다운 증후군) 환자에서나 원시적 ‘몽고인의 눈’이 남아 있다는 논증을 폈다.
침략을 앞두고 유럽 학자들이 동양인을 ‘더러운 노란 색’ → ‘진화가 멈춘 몽골인종’으로 밀어붙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번역자 이효석은 후기에서 “우리는 왜 그들이 칭하는 것처럼 스스로 몽고인종이라 부르고, 비정상적 눈, 비정상적 반점, 비정상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몽고눈, 몽고점, 몽고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가?”(334쪽)라고 썼다. 유럽인이 동양인을 죽이려(정복하려) 창작한 황인종-몽골인종이란 비하 개념을 동양인 스스로가 잘도 물려받아 아직도 쓰고 있음을 아파한 내용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맞아 백인의 황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고, 그 한국판(“중국인을 모두 몰아내야 한다”는) 역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중국인들이 가리지 않고 온갖 날음식을 먹는 태도 등은 규탄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인 전체가 미개인’이라며 미워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이런 태도는 한국인 일반이 싫어하는 일본 아베 총리의 ‘한국 죽여 일본 살자’ 정책과 비슷하다. 약육강식 시대엔 ‘너 죽여 나 잘살자’가 진리였지만, 초연결 시대인 21세기엔 ‘너 죽이려 들다간 나도 죽는다’가 됨을 아베의 실패에서 보면서도 제국주의적 논리에 매몰된다면 정신적으로 20세기에 머물고 있는 구시대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