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소비시장에서 ‘으레’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특히 나이에 있어 그렇다. 일반적으로 연령층에 따라 판매 상품이 구분됐지만, 최근 ‘특정 연령대가 으레 좋아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소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에이지리스(Ageless. 나이 경계가 없는)’다. 드론·헬리캠을 사는 60대, 한과·한복·전통차를 구매하는 10대 등 나이를 초월해 자신만의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백화점에서도 나이 구분 없는 편집숍을 선보이고 있다.
“나이보다 각자 취향 중요” 에이지리스 현상 가속화
지난해 7월, 방탄소년단의 일본 콘서트 출국길. 유명인사의 공항 패션이 주목받는 것은 낯설지 않지만, 멤버 정국의 의상은 큰 파급력을 불러일으켰다. 연예인 공항 패션에서 흔히 등장할 법한 명품 대신 생활한복에 어글리 슈즈를 매치한 것.
전통의상에 트렌디한 신발을 매치한 파격적인 패션은 SNS상에서 화제에 올랐다. 정국이 직접 구매한 것으로 알려진 해당 생활한복 브랜드의 온라인 사이트는 국내외 구매자가 몰려 한때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이를 눈여겨본 롯데백화점이 입점을 제안했고, 지난해 11월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7층의 편집샵 ‘취향존중’ 매장에 합류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이후 SNS 인증, 편안한 착장 후기 등이 이어지면서 한복은 ‘옛것, 혹은 어르신들이 입는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젊은 층의 패션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처럼 세대별 상품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은 비단 1030세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에이지리스’를 이끄는 건 오히려 40-60대의 중장년층이다. 경제적인 여유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쇼핑몰 G마켓의 분석에 따르면 에이지리스 소비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G마켓 측은 2019년을 기준으로, 2016년 대비 연령 별 선호 상품군을 선별하고 판매 증감률을 비교·분석했다. 10대부터 30대를 젊은 층, 40대부터 60대를 중장년층으로 구분했다.
그 결과, 중장년층은 취미 생활 변화에 따라 IT·디지털기기 수요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구매하는 중장년층은 두 배를 뛰어넘어 165% 급증했고, 헬리캠(카메라가 장착된 헬리콥터형 드론) 등의 드론을 구입한 경우는 155% 늘어났다. 노트북은 82%, 웨어러블 디바이스는 33% 증가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유튜브 등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영상 촬영용품 구매는 81%, 게임용품은 70% 늘어났다.
스포츠에도 연령 경계가 사라지면서 서핑보드를 찾는 중장년층이 3년 전 대비 41%, 전동 킥보드는 528%, MTB자전거는 153% 각각 증가했다. 패션 분야에서도 미니스커트를 구입한 사례가 126% 늘었다. 음식에서도 분식(204%), 즉석식품(172%) 선호도가 높아졌다. 최근 급부상하는 밀키트는 3년 새 무려 259배나 수요가 폭증했다.
젊은 층의 에이지리스 키워드는 ‘레트로(복고)’다. 복고 취미활동의 대명사 화폐·주화·우표 등의 수집용품 판매량은 3년 전 대비 50% 증가했다. 엘피(LP)판 열풍으로 젊은 층의 턴테이블 구입은 61% 늘었고, 오디오·라디오 수요도 25% 늘었다. 한복을 일상생활에서 즐겨 입는 젊은 층도 늘어나 패션·캐주얼한복 수요도 같은 기간 19% 늘었다. 먹거리에서도 한과·전통과자(50%), 차·전통음료(40%), 떡(13%) 등이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G마켓 이정엽 마케팅 총괄 본부장은 “갈수록 개인 취향과 개성을 중시하는 ‘나 중심’의 문화가 확산되면서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쇼핑에도 반영되고 있다”며 “경제적 여유가 있고 새로운 문화에 거리낌이 없는 기성세대와 과거 문화를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젊은 세대 크로스 문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고 말했다.
현대·롯데백화점, ‘모든 연령’ 공략 편집숍 선보여
백화점에서도 에이지리스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층마다 목표 고객의 성별이나 연령대를 명확해 구분해왔지만, ‘패션 편집숍’을 통해 그 경계를 허물고 있는 것. 영캐주얼에 관심을 가지는 중년층과 복고를 선호하는 젊은 층이 한데서 쇼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취지다.
현대백화점은 모든 연령대의 여성을 위한 에이지리스 편집숍 ‘코너스’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목동점을 시작으로, 판교점(11월), 미아점(올해 3월)에서 해당 매장을 열었다. 선보이는 제품들은 잡화·패션 등 라이프스타일에 맞췄다는 것이 사 측의 설명이다.
판교점과 목동점 코너스 매장의 영업면적은 각각 330㎡(100평)·83㎡(약 25평) 규모로, 특히 판교점 코너스의 경우 매장 절반을 체험형 매장으로 꾸몄다. 지갑 만들기·열쇠고리 제작 등 다양한 고객 클래스가 진행되는 가죽 공방 ‘토글’, 드라이 플라워로 장식물을 만드는 ‘플라워온실’ 등이 매장에 들어섰다. 현대 측은 4월 내 신촌점에서 4호점을 오픈한다고 밝혔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편안하면서도 재미있는 독특한 쇼핑 경험을 줄 수 있도록 매장에 은은하게 풍길 수 있는 ‘코너스’만의 향기도 개발했다”며 “모든 연령대의 여성 고객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이는 ‘참새 방앗간’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백화점은 자체 의류 편집숍 ‘엘리든’을 확대 중이다. 직수입 브랜드를 편집매장 형태로 선보이며, 연령·가격·성별에 따라 엘리든 플레이(영 컨템포러리), 엘리든 스튜디오(여성 컨템포러리), 엘리든 맨(남성) 등으로 스토어를 세분화했고, 자체 브랜드(PB) ‘엘리든 컬렉션’도 운영 중이다.
에이지리스 소비 현상에 대해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나이는 더이상 소비 경계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없다”며 “연령에 따른 인기 품목 경계가 이미 허물어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나이·성별 같은 기존의 잣대보다는 고객 ‘취향’이 곧 소비를 주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