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3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0.04.14 10:01:42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때이다. 보통 특별하지 않은 순간들이 반복되는 것이 일상이라 여겨지지만, 김허앵의 회화가 보여주듯 우리의 매일은 같은 듯 다르다. 지나온 하루하루를 떠올려보자. 반복 속에서 새로움이 끝없이 발생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 우리의 삶이 된다. 여태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니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상상하지 못했던 큰 변화를 불러온 사건도 있었다. 기쁜 일이 많았던 만큼 슬프고 힘은 일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묵묵히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좋은 세상 만들 희망 느껴지는 그림 그려”
김허앵 작가와의 대화
- 김허앵의 작업은 작가 개인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일상의 순간들은 매우 평범한 동시에 매우 특별하다. 그런데 작품 속 이미지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유쾌한 듯 우울하고, 밝은 듯 어둡고,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느낌까지 든다. 얼핏 보면 삶의 부정적인 요소에 주목하는 것 같지만, 모순적이게도 이상을 향하고자 하는 욕망이 느껴지기도 한다. 삶에 대한 애착이 느껴진다. 작가가 살면서 받아들이는 일상의 느낌이나 인상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한때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나 ‘1984(1949)’처럼 디스토피아적 소설을 참 좋아하기도 했고, 원래 내가 비관적이기도 하다. 나는 까뮈(Albert Camus)의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 방식이 우울한 결말을 알면서도 돌을 계속 굴리고 굴려야 하는 상황과 유사하게 작동한다는 데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일상을 끝없이 이고, 지고, 분투하는 삶으로 인식하고 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 나는 열심히 사는 사람, 주어진 환경에 불만이 많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나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생물들도 시지프와 같은 상황에서 버티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들로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을 작품에 담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세상의 좋은 점을 찾게 되었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세계가 조금 더 좋았으면, 앞으로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최근 작업에는 이런 변화가 많이 반영되었다.
- 한 명의 작가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것에 익숙해진 시대이다. 자신이 원한다면 어떤 매체든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들도 많아졌다. 이런 시대에 회화에 집중하고 있다. 작가가 반드시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장르에 집중하는 데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회화라는 매체를 지금의 내가 정말 좋아한다.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것도 좋아해서 최근 몇 년 동안은 거의 유화, 아크릴, 드로잉 같은 회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나는 보관의 측면에서도 회화가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감상도 마찬가지다. 설치 작업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관객만이 경험할 수 있다. 현장까지 찾아가야 한다. 평범한 일상에서는 감상하기 어렵다. 그에 비하면 회화는 접근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입체적인 세계를 납작하고 작은 화면에 구현하는 것 역시 매력적이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회화 작업에 집중할 것 같다.
- 편하게 손이 가는 대로 그린 것 같지만, 조금만 신경 써서 들여다보면 데생이나 화면 구성 등을 세심하게 계획한 작업이다.
사실 그림에 들어가는 요소에 관한 실물 자료조사 등을 많이 하고, 에스키스나 스케치도 꼼꼼하게 한다. 화면의 구성과 그림에 사용될 색채까지 어느 정도 정하고 그리기 시작한다. 나의 경우 만족할만한 작품은 비계획적인 방식으로 나오지 않는다. 준비를 철저히 했을 때 내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온다. 우연성에 기대기에는 실패의 위험이 크고 불필요한 재료와 시간의 소비도 크다. 물론 표현의 방식에서 붓 터치 등이 과감하게 들어가는 편이다 보니 즉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현도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다. 작업에 계산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려진 형상에 대해서는 일러스트 같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한 관심은 적은 편이고 그 경계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도 모호하다. 아마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했고 많이 봤기 때문에 표현적인 부분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 모든 작품이 다 그렇겠지만 완성의 순간을 결정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다. 결정의 기준이 있는가?
매체적으로는 물감 층이 균일하게 어우러져 시각적으로, 테크닉적으로 부족하지 않다고 느낄 때 완성이라 결정한다. 상대적으로 러프(rough)하게 그려진 그림의 경우에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충실히 표현되고 러프한 면이 그림 속 다른 요소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 붓을 뗀다. 이 정도면 사람들이 나의 그림을 봤을 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감(感)적인 부분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테크닉적인 면을 많이 보는 편이다.
- 구체적인 형상이 있지만 판타지적인 분위기를 갖는 작업이다. 현실에 근간을 두고 있는데 꿈의 세계 같기도 하다. 삶 속의 힘듦을 극복하거나 현실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상의 영역을 작품에 담아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 다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자주 나만의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상상도 많이 한다. 그것을 그대로 옮길 때도 있다. 나의 추상적인 생각이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을 그림으로 보여주려 하기 때문에 구상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생각을 사실적인 이미지로 옮길 수는 없으니까. 아직 생각해본 적 없는 부분인데, 판타지가 저항으로 이어지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더 생각해봐야겠다. 지금 떠올랐는데 내가 옛날부터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의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 같은 것을 좋아했다. 개인적으로 현실인 것 같은데 현실적이지 않기도 한 그런 느낌을 선호하는 것 같다.
- 작품에 꽤 많은 형상이 등장한다. 하나하나의 형상에 의미를 다 부여하는가? 물론 작가의 의미 부여와 무관하게 관객이 자신만의 의미를 담아 해석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의미 부여를 뜻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 정한 것도 있고 그냥 마음에 들어서 그린 것도 있다. 작가가 정해놓은 정답 찾기를 요구하는 것은 재미없을 것 같다. 아마 맞출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게 모두 다르다. 원작자인 내가 부여한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다 알아야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객이 새로운 내러티브를 발견하면 그것대로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긴 하다.
- 최근의 전시 ‘mama do’(2020)는 작가가 직접 경험한 육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주제는 사회 구조와 규범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끝없이 확장될 수 있는 주제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면서 1~2년 정도 작업을 쉬었었다. 한 번은 아이를 데리고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는데 너무 고독했다. 미술적인 이야기들이 나에게 와닿지 않고 괴리감이 느껴졌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당시에는 그랬다. 그래서 이 주제로 개인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9년을 살아가는 엄마의 실제 생활과 감정 등을 이야기하고, 발표하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이야기의 장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직접 경험할 때까지 이것이 이렇게 크고 중요한, 충격적인 사건이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변화도 이렇게 클지 몰랐다. 그리고 당시에는 내 모든 삶이 아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기에 다른 주제를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어떤 상황이든 나의 삶을 살아야 하니 잘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 한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위기라 느껴지는 순간이 기회일 수 있다. 작가로서 또 다른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리고 그 외의 길은 없다. 그만두거나 극복하고 지속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전시 ‘mama do’를 준비하면서 내 작업의 정체성이 너무 한정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고 다른 주제에 눈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내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에 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주로 여성과 어린이가 등장한다. ‘mama do’에서 발표한 작업과 비슷한 맥락에서 출발했지만 조금은 더 열린 큰 주제를 담아내려 한다. 내 모든 작업의 주인공이 나인 것은 아니다. 설령 나를 상정하고 그린 그림이라 해도 전시장에 걸리면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 익명의 존재와 같다. 조금은 보편적인, 누구나 대입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 작업할 때 많이 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처음에는 관객들이 나의 그림에서 위트를 느꼈으면 좋겠다, 시각적인 재미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형식이 다양해졌지만 나는 미술은 여전히 시각적으로 와닿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작업에 어두운 부분이 있지만 그것을 상당히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웃기도 하고 공감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최근에는 조금 거창하긴 하지만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거기에 나의 작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삶은 여전히 힘들고 안 좋은 일들도 많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고, 새로운 세대가 있으니 다음 세대에게는 조금 더 좋은 세계가 이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