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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43) 유나얼 개인전 ‘Pessimistic Optimists’] 일관성 속 변화, 과거 속 미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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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74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0.04.29 09:24:31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artist run space)인 스페이스엑스엑스(space xx)에서 유나얼의 개인전 ‘Pessimistic Optimists’가 열렸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유나얼의 상징과 같은 콜라주와 드로잉이 반가운 익숙함을 전한다. 정확히 자신의 위치에 놓인 오브제들은 예민하게 느껴질 정도로 시각적 조화를 중요시하는 작가의 취향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전시장 한편에 자리를 잡은 ‘Music Box’(2004) 앞에서 플레이리스트를 살펴보는 동안 시간은 과거로, 과거로 향한다. 그러나 전시장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설치 작품들은 이내 지금이 그의 열한 번째 개인전이 열리는 2020년임을 상기시킨다. 전시장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The Roll’(2020) 덕분에 관객은 움직일 때마다 매번 새로운 전경을 경험한다. 성경 말씀이 가득한 공간이다. 커튼을 열고 들어선 작은 방에는 “Where Art Thou?”, “Whom Seek Ye?”라 적힌 네온사인과 그에 대한 작가의 답인 ‘Two Questions & Two Trees’(2020)가 우리를 기다린다. 시각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무게감이 남다른 작품이다.

2004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으니 유나얼이 작가로 활동한 지 16년이 되었다. 짧다고 할 수 없는 이 시간 동안 그는 일관성을 유지해왔다. 그의 작업에는 항상 흑인의 삶과 문화, 작가가 지금보다 아름다웠다고 여기는 과거의 시절, 그리고 성경 말씀이 담긴다. 이미지들의 만남과 오브제들의 결합, 드로잉은 유나얼이 지금까지 즐겨 선택해온 표현 방법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계속 변해왔다. 일관성 속의 변화이다. 이미지들의 조합은 이전보다 촘촘해졌다. 작품 속 상징들은 한층 더 입체적인 의미를 생성하고, 더욱 공고해진 믿음을 담아내게 되었다.

 

유나얼, ‘Rapture 2’, Digital Collage & Print, 135 x 88.4cm, 2019.

유나얼의 작업을 만날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양가성이다. 그러고 보니 일관성 속의 변화도 반대항의 조화이다. 그의 작품에는 모순처럼 느껴질 정도로 반대되는 무언가가 늘 함께한다. 작가는 현재에 머무른 채 과거를 불러들이고, 미래를 생각하며 과거를 바라본다. 즉흥적이지만 계획적이고 천진함을 담아내기 위해 치밀함을 고수한다. 무엇보다 낮은 곳에서 찾아낸 존재들을 통해 가장 높은 곳을 향하는 이야기를 전하기에 양가적이다. 따뜻하지만 단호함이 느껴지는, 한없이 쉬울 수도 한없이 어려울 수도 있는 작품들이다. 물론 어느 쪽을 향하든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작품에 담긴 작가의 진심이다.
 

유나얼, ‘Blue Boy’, Ballpen, Acrylic, Film & Mixed Media on Parcel Box, 34 x 34cm, 2020.

유나얼 작가와의 대화

- 스페이스엑스엑스는 대중적이기보다 실험적인 전시를 많이 하는 곳이다. 미술인들에게는 익숙한 장소이지만 대중들에게는 조금 낯선 공간이기도 하다. 작가에게는 전시장의 물리적인 환경도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다. 작품을 설치하면서 특별히 중점을 뒀던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전시 공간의 가공되지 않은, 조금은 거친 듯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나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시각적인 재미를 주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특히 전시장 중앙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을 어떻게 풀어낼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또한 내 작품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감성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잘 이어질 수 있도록 작품의 위치와 동선에 신경 썼다.

- 유나얼의 드로잉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어린아이의 것과도 같은 선이다. 작가 본인도 인위적이지 않은 자유로운 선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술 교육을 받은 작가가 그런 표현을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치밀한 계산이나 기교가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정제됨, 세련미가 느껴진다. 감각적이다. 설치 작업에서도 이와 비슷한 인상을 받게 된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한 화면에 서로 대비되는 특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나는 정제된 선과 정제되지 않은 선의 조화를 추구한다. 또한 나의 선들은 학습을 통해 얻은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선들의 느낌을 보면서 나는 나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피를 갖고 있음을 확인한다. 거기에는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나에게는 성인인 내가 표현하기 힘든 어린아이들의 선을 갖고 싶은 욕구가 있다. 아마도 순수와 자유를 향한 욕구인 것 같다. 어릴 때는 누구나 그렇게 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모두 순수와 자유를 잃어버린다. 물론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철저한 계산을 통해서라도 비슷한 것들을 만들고 싶다.
 

유나얼, ‘Rapture 4’, Digital Collage & Print, 175 x 125cm, 2020.

- 이번에 전시되는 ‘Days of Innocence’(2019) 시리즈뿐 아니라 대부분의 작업에 현재보다 지나간 시절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담긴 것 같다. 작가의 의중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과거의 시절을 낭만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성경을 통해 이 세상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미래보다 과거를 동경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시대마다 음악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그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시대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감성을 만들고 그것이 당대의 사회를 만든다. 그런데 열역학 제2법칙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즉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것이다. 세상도 점점 더 타락하게 된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절대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다. 과거나 지금이나 모두 죄인들의 역사지만 지금보다는 인간미가 조금 더 살아있었던 그 시절의 사람과 음악이 그립다.

- 성경 드로잉이 회화와 설치 작업으로 함께 전시되었다. 작품에 담게 되는 성경 구절은 어떻게 선택하는가?

현재의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로 성경 말씀을 선택한다. ‘Song of Rapture’ 시리즈(2020)에 담은 아가서 2장 10절은 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큰 위로를 줄 수 있는 구절이라 생각했다. ‘The Roll’은 전시장의 두 기둥을 보고 작품을 구상한 뒤 결정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시편 12편 6~7절로 성경의 영감과 보존에 관한 말씀이다.
 

유나얼, ‘AA’, Acrylic, Conte, Collage & Mixed Media on Paper, 106 x 75cm, 2020.

- 성경 드로잉뿐 아니라 ‘Two Questions & Two Trees’와 같은 설치 작품도 성경의 내용을 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시각적인 감상을 위한 작품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성경 말씀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통해 특별히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위로와 평안을 주고 싶었고, 올바른 성경관에서 나오는 올바른 교리를 알려주고 싶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람은 창조물이고 그 창조물을 만든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한 사람이라도 이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 이번에도 작가가 수집한 오브제들을 결합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수집품들의 짝이 잘 맞는다. 각각 존재하던 오브제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 같다. 수집을 워낙 많이 해서, 경우의 수가 많아져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짝이 맞는 것을 잘 찾아내는 남다른 능력이 있는 것인가?

서로 떨어져 있을 때에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던 물건들이 함께 함으로써 조화를 이루고 유의미한 존재로 바뀌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즐거움이다. 주로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나 어떤 느낌이 오는 오브제를 발견하면 일단 가져온다. 그 후에 진행되는 믹스(mix)의 과정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그때그때마다 잘 맞아떨어진다. 평소에 많이 모아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유나얼, ‘Two Questions & Two Trees’, Neon, Book, Monitor & Mixed Media Installation, 140 x 180 x 140cm, 2020.

- 이전에 필자에게 기독교인은 구원을 받기 위해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진 것에 감사하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를 알면 아주 쉽게 풀리는 문제이다. 사람이 만든 신이 종교이고, 사람을 만든 신이 사람에게 주신 것이 복음이다. 아담과 이브는 죄를 짓고 난 뒤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앞치마를 만들어 입었다(창세기 3:7 KJV).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 방법을 고안해낸 거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짐승(어린양)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한 뒤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이브를 입히셨다(창세기 3:21 KJV).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어떤 존재가 피를 흘려 대신 죽어야 함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 방법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하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의(義)와 공로로, 자신들이 만든 방법대로 구원을 받으려고 시도하며 종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만 받을 수 있다. 종교는 사람의 행위를 필요로 하지만 복음은 사람의 행위가 전혀 필요하지 않고 오직 믿음만 필요하다. 구원의 확신은 오직 기독교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행위를 통해서는 절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구원받지 못했는지는 죽어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로서 구원의 확신을 갖고 감사함으로 선행을 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절대 인간이 규정하는 종교가 될 수 없다.

- 이번 전시와 관련해서, 혹은 본인의 작업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주기 바란다.

나는 창조주를 배제한 예술은 절대로 예술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물론 인간인 내가 하나님에 대해 다 알고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것들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작품들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온 세상이 힘든 시기이기 때문에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무거운 마음이었다. 이 전시를 통해 단 한 명이라도 창조주의 존재를 깨닫고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여 그 혼이 구원을 받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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