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최영태 편집국장) 지금은 분명 ‘책을 안 읽어도 되는’ 시대다. 지난 20세기까지가 ‘글이 권력인 세상’이었다면 현재는 ‘말과 비디오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한 저자의 저서 대여섯 권을 최소한 훑어는 봐야 그 저자의 생각-주장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게 지난 세기였다. 그러나 현재의 ‘유튜브 세상’에서는 그 저자가 자신의 생각-주장을 정리한 유튜브 동영상이 있다면 불과 몇 십분 간 그걸 시청하는 것만으로 정확히 핵심을 짚을 수 있다. 말이 글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글로는 이리저리 비비 꼬며 자신의 주장을 복잡하게 정리하던 저자도 말로는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의 핵심 생각-주장을 말로는 훨씬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야 한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에게도 글보다는 말이 훨씬 편하다. 글이 사색적이라면 말은 직관적이고, 인간은 직관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책은 ‘완전히’ 끝난 것일까? 책 읽는 사람과, 유튜브 동영상 시청자가 같은 수준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책(전자책 포함)을 고집하는 건 바보짓이다.
책 없는 세상에 책벌레가 존재한다면?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본다. 유튜브 같은 동영상이 더욱 힘을 발휘하면서 구텐베르크 이후 세상을 풍미하던 책이 마침내 거의 완전히 사라져버린 세상이다. 책을 저장하던 거대한 공공 도서관 건물들도 하나둘씩 그 용도를 바꾸고, 사람들은 필요한 정보를 스마트폰에 말로 지시해 끄집어내 순식간에 알아내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런 미래에도 소수지만 아주 별난 인간들이 있어서, 곰팡내 나는 물리적 종이책을 ‘추가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정말 글자 그대로 ‘책벌레’들이다. 99.9%의 인간이 책을 버린 세상에서 책의 곰팡내를 지키는 이 0.01%가 아주 무서운 존재들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필자는 해본다.
이런 상상의 근거는, 책을 통해 얻는 정보가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유튜브를 통해 얻는 정보보다 훨씬 더 ‘다면적’이란 사실 때문이다.
이런 예를 하나 들어보자. 친정부 경제학자로 유명한 최배근 교수가 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경제 선생님”으로 통하며 일자리-성장률 등 분야에서 줄곧 문재인 정부를 옹호해 온 인물이다. 조국 전 장관 사태 때는 ‘조국 옹호’ 시위장에서는 목이 쉬면서 연설을 했고, 최근 4.15 총선에서는 더불어시민당을 만들어 여당을 도왔다. 최근 유튜브 채널 ‘최배근TV’를 개설했고 역시 줄기차게 친정부 발언을 잇고 있다.
최 교수의 경제학적 논리를 유튜브로 공부한다면 그의 주장을 불과 ‘몇 시간만에’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방법 1). 반면 최 교수의 주장을 그의 책으로 공부한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최소 ‘일주일 이상’을 책과 씨름해야 한다(방법 2). 최종적으로 습득하는 정보가 동일하다면, 방법 2는 바보짓이다. 경쾌하게 동영상 시청만 하면 될 것을, 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무거운 책을 들고 읽어야 하냐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최 교수의 책 내용과 동영상 내용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데서 발생한다. TV-라디오-유튜브에서 그는 줄기차게 문재인정부를 옹호하지만, 책에서는 문 정부를 비판하기도 한다. 한 예를 보자.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 정책은 왜 이렇게 빈틈이 많았을까? (중략) 소득주도 성장(몸통)의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공정경제(왼발)와 혁신성장(산업구조조정, 오른발)의 보완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양자를 파편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 결과 혁신성장의 추진은 관료들에게 넘어갔고, 2018년 내내 청와대 내에선 소득주도 성장 추진자들과 관료들 간에 갈등이 반복되었다. 여기서 관료들의 혁신성장 방안은 철저하게 박근혜 정부 때 만들어진 것의 재탕이었다.(최배근 저 ‘이것이 경제다’ 106~107쪽)
가난한 자들의 소득을 높여준다고(소득주도성장 정책) 성장이 저절리 이뤄질 리 없고 혁신을 해야 성장이 이뤄지는데 이걸 제대로 이해 못 한 문재인정권은 박근혜정권 때의 정책을 재탕해냈다는 신랄한 비판이다.
+와 -를 다 읽는 독서가 vs 한쪽만 보기 쉬운 시청자
책에서는 이렇게 비판하지만 최 교수는 방송(TV-라디오-유튜브를 모두 포함하는)에서는 이런 비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물어뜯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이른바 보수 언론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친정부 경제학자’인 그가 정부 경제정책을 아주 일부라도 비판하면 그 다음날 자 신문에 그의 발언 중 일부만을 대대적으로 인용하면서 ‘정부 공격용’으로 대서특필될 게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게 바로 책과 방송(유튜브)의 결정적 차이다. 책은 아무리 쉽게 써도 극소수가 읽기에 ‘전제로서의 비판’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반면 방송(유튜브 포함)은 누구나 보기에 그 영향력이 훨씬 크고, 그래서 똑 같은 내용이라도 책에 쓰면 아무 문제가 안 됐다가 이를 방송에서 발언하면 사단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논리는 군사독재정권 시절(일제강점기 포함)의 언론통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독재정권은 △방송은 100% 통제(정권에 불리한 내용은 절대로 방송에 못 나감) △신문은 아주 제한적으로 반대 목소리 허용(일제강점기 때의 조선-동아일보에서 그랬듯) △책 내용은 훨씬 폭넓게 허용이란 작전을 쓴다.
이렇게 책 등을 통해 비록 모기 숨구멍만큼일지언정 반정부 의견을 허용하는 작전을 통해 독재 정권은 이중의 도움을 받는다. 반정부 지식분자들이 그 작은 숨구멍 주변에 모여들어 활동하게 만듦으로써, 평시에는 대내외적으로 “이렇게 언론 자유를 허용하는데 왜 우리를 독재라고 하느냐”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필요할 때는 그 작은 숨통에 모여든(즉 정체를 드러낸) 반체제 분자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대에 때때로 일어났던 ‘필화 사건’들의 정체다. 슬그머니 작은 숨구멍을 열어놔 체제의 압력밥솥化를 막고(불만이 계속 축적되면 폭발하기 마련이므로), 여차직하면 책 속의 문구를 선택적으로 발췌해 대중에 대대적으로 알림으로써 불순분자들을 싹 제거할 수 있다는 비책이다.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가자면 최배근 교수의 경제학 논리를 고통스럽게 책으로 배운 사람은 그 수많은 가지가지를 다 알 수 있다. 반면 유튜브로 배운 사람은 ‘방송에서 가능한 내용만’ 습득한다. 전자가 +와 -를 모두 배운다면, 후자는 +만 배울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 차이는 클 수 있다.
책 읽는 사람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이유는, 책을 통해 얻는 내용에 더해 ‘그 집요함에 있다’는 분석도 있다. 몇 날, 몇 달, 몇 년이고 책에 파묻혀 그 졸립고 난해한 내용들을 독파해내는 집요함을 책 안 읽는 사람이 당해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대개의 인생 승부는 단판이 아니라 장기전이기에, 집요하고 끈질긴 사람의 승산이 높다.
이번 호 ‘문화경제’는 김금영 기자가 NC강서 백화점이 소비자 의견을 반영해 특별히 설치한 중고책방(14쪽)과 스타필드의 별마당 도서관의 진화(18쪽)를 기사화했고, 옥송이 기자는 자신의 학창시절 독서 추억과 롯데장학재단이 펼치는 북드림(Bookdream) 전자 도서관 얘기를 기자수첩(82쪽)으로 전했다.
앞에서 책과 반정부 얘기를 했듯, 이익 추구가 우선인 기업과 체제에 대한 반기를 서슴치 않는 책은 협력관계라기보다는 대항관계에 더 가깝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책은 읽어야 한다”며 돈벌이 공간의 큰 부분을 떼어내 독서 공간으로 제공하는 신세계프라퍼티(스타필드 운영)와 NC강서 백화점, 롯데장학재단 등의 전략에는 큰 박수를 보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