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3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0.09.14 11:20:58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이번 호에는 최근에 전시회를 가진 두 젊은 작가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사용하는 재료와 표현 방법, 담아내는 주제가 모두 달라 보이지만 고정관념과 편견을 거부하고 관객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작품 속으로 관객이 들어가 만질 수 있는 미술”
이정태 작가와의 대화
- 올해 7월 ‘여주시미술관 아트뮤지엄 려’에서 개인전 ‘오픈 더 윈도우(Open the Window)’를 진행했다. 전시 제목을 설명하면서 본인의 작업에서 창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창문을 열어 밖의 공기가 들어오면 눈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종합적인 감각의 전환이 일어나고 그것이 이상적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와 같은 생각이 이번에 전시된 작품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한다.
창문의 형상이나 개념이 특정한 작품에 구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작업의 전반적인 목표, 작업을 통한 소통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작품의 제목 혹은 전시 제목에 자연스레 등장한 상징이라 말하고 싶다. 작가와 작품, 작품과 관객, 나아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들과 우리는 소통이란 것을 하고 있다. 모든 관계 맺음은 소통으로 이어진다. 소통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기에 누구나 쉽고 편하게 생각한다. 소통은 시각적인 것이 아닌데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다 보니 설명과 의미 전달을 위한 매개체가 필요했다. 창문을 열든 닫든 밖의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창문을 열면 환기가 되면서 공기가 이동한다. 나는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닫힌 창문으로 풍경을 보는 것처럼 소통하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에도 창문이 있다면 그것을 활짝 열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작업을 하고 있다.
- 어떤 소통을 하고 싶은 것인가? 이번에 전시된 작품 대부분이 추상적인 이미지이다. 기본적인 형태들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막연하게 느낄 수도 있다. 또한 다양한 색채 표현이 두드러지는데 각각의 색채가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가?
내 작품에서 드러나는 사각형과 같은 형상을 추상이라고 해야 할지, 구상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벽에 걸린 작품을 예로 들면, 작품의 프레임이 평평한 네모 형태가 아니라 뒤틀려 있고 휘어져 있다. 관객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직사각형의 이미지가 명확히 보이는 특정한 위치에 다다르게 된다. 내 작업을 보며 직사각형을 마주하는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소통도 그와 비슷하다. 각자의 자리에서는 다른 위치에 놓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색채의 경우, 관객이 좋은 기억을 떠올리도록 밝은색을 사용했다. 그 외에 작업에 등장하는 모든 색채의 의미와 선택 기준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흰색이라 생각하는 범위가 다르듯 색에 대한 판단은 관점에 따라 바뀐다. 물론 내 작업에 등장하는 추상적 이미지나 색채가 이와 같은 내용만 담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내 미감의 최선을 담아 작업한다.
-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공간이라 생각한다. 원이 반복되는 입체 작업인 ‘CW-Universe’(2020) 외에 벽에 걸린 작품에서도 공간에 대한 탐구가 발견된다.
작품 제작이나 전시장 디스플레이를 함에 있어 공간성을 특별히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조소를 전공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조각에서 공간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관련해 나는 요즘 나의 작업이 평면인지, 입체인지 고민 중이다. 벽에 걸린 작품의 경우 2.5D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론을 말하면 나는 전체적으로 나의 작업을 조각이라 말하고 싶다. 개인적 생각으로 조각은 작품을 움직이며 둘러볼 수 있다는 점에서 평면 작업과 다르다. 한눈에 작품을 파악하기보다 움직이면서 위치에 따라 변하는 형태를 경험하는 것이 조각이다. 평면(회화)은 프레임 속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변형된 캔버스처럼 보이는 ‘CW’ 시리즈와 같은 작업도 조각을 닮지 않았나 싶다. 전통적인 개념의 회화와 조각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진 실제 공간과 조금 더 가까운 것이 조각인 것 같다.
- 예술이 일상에 스며들기 어렵지만 본인은 계속 노력할 것이라 했다. 그처럼 말한 이유를 듣고 싶다. 그리고 일상에 스며들기 위해서라면 관객의 참여가 더 적극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형식으로 실내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전시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을 부탁한다.
나는 미술이 미술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과 자연스럽게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쉽고 편하게 부담 없이 미술을 즐겼으면 하는 생각에 관객들이 직접 만질 수 있는 오브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CW-Universe’를 만들었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만 소유되고 소비되는 미술이 많다. 그런 상황들을 생각하면 미술은 미술대로, 일상은 일상대로 자기의 영역에 머무르며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는 가운데에서 그 둘을 잡아당기고 싶다. 그래서 전시 연계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진행한다거나 누구나 일상에서 부담 없이 미술을 만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조각 작업을 할 때에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건축처럼 그 안에 들어가고 만질 수 있는 ‘건축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마치 정글짐처럼 공간을 이용해 일상을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미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코로나19로 관객들이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전시를 공개하는 것도 힘든 상황이다.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내 작품 ‘좌대’는 나에 대한 회의감과 터닝포인트”
신호철 작가와의 대화
- 작품 운송 박스, 좌대, 계약서 등을 지점토로 제작한 작품들은 성공을 향한 작가의 욕망, 예술(가)의 가치를 평가하고 유통하는 사회적 제도와 권력 등의 유동성을 담아낸다. 특히 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결과물들은 그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절대적일 수 없음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한다. 많은 작가들이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기에 작가 신호철만의 차별화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듣고 싶다.
‘Fragile masterpieces’(2019~present)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공한다기보다 시스템의 명령 체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작업이다. 나는 2017년부터 개인을 통제하는 사회 시스템으로부터의 탈피를 이야기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인간은 모든 사회 구조의 규칙과 규범 등을 끝없이 의심해야 한다. 사회적 명령 체계의 공식에 부합하지 못할 때 개인의 괴로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Fragile masterpieces’에 등장하는 ‘fragile, handle with care’와 같은 문구들은 명작의 아우라와 권위가 얼마나 약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우리가 언어로 구조화된 세상 속에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거대한 시스템에 문제 제기를 하고 의심을 하는 나 역시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힘든 상황이 생기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명령 체계들을 끊임없이 의심해보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 정치, 사회, 경제적인 상황들이 영향을 끼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동시대 다수의 사람이 가치를 인정하는 작품이 존재한다. 또한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영향 아래에 놓인다. 신호철의 작업도 시스템의 영향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평가받는다.
어떤 작품이 운송 박스에 담겨 유수의 전시에 참가할 자격은 예술 제도와 같은 외부적 요인에 영향받는다. 따라서 다수가 인정한다고 해도 주변의 영향 관계들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적인 찬양보다는 의심해보고 늘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미술 작품의 평가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평가를 되돌아보는 긴장감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좌대’(2019)의 경우 작품은 사라지고 이론과 담론만이 넘쳐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좌대 위에 놓이는 좋은 작품의 기준에 대한 질문 같기도 하다.
사실 ‘좌대’는 조금 다른 생각으로 만들었다. 당시 좋은 작품의 기준은 순전히 작가인 나에게 맞춰져 있었다. 타인을 만족시키는 작품보다 작가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며 작업에 임했다. 이전까지 나는 시각적인 부분이나 완성도 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 기준에서 나의 창작물이 내용과 시각적 효과 모두에서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좌대만을 만들었다. 그때의 회의감이 담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후에 내가 새로운 이미지나 형상을 창작하지 않고 기존에 있는 이미지를 사용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 작가 노트에서 지점토를 가장 순수한 매체라 말했다. 그 이유로 작가가 언어를 통한 사회화에 들어서기 전 미술을 처음 접할 때 사용하였던 재료라는 점을 들었다. 그 밖에 지점토를 사용하는 다른 이유는 없는가?
두 가지 정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하나는 재료의 물성과 관련된 것이다. 지점토는 건조과정에서 균열(crack)이 많이 발생한다. 흙이 아닌 종이이기 때문에 표현이 무디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그럴듯해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툴두툴하고 서툴러 보인다. 이런 효과들은 우리가 만나는 미술계,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깨지기 쉬운 허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킨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뀐 것처럼 인간 사회의 시스템은 유동적이고 견고하지 못하다. 금이 가 있고 바로 부서져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오브제는 우리를 지배하는 가치, 규범과 질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불안정한 것임을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질문에도 담겼던 지점토의 순수성이라는 개념적인 부분이다. 다른 영역과 달리 미술은 순수함이란 기준으로 작가를 평가하고 비판할 때가 많다. 나는 그것이 위선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는 이래야 한다는 식으로 틀에 끼워 맞추고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는 것보다 사회적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절에 사용했던 재료인 지점토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더 순수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 현재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작업과 미술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실제 삶 사이에 괴리가 일어나면 안 된다. 작가와 작품 사이에 모순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나는 실제로 자신의 작업이 담아내는 이야기와 작가의 실제 삶이 불일치하는 상황들을 꽤 많이 목격해왔다. 그리고 미술계의 시스템과 규범이 작가들의 욕망을 숨기는 데에 일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직시할 줄 아는 작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 차원이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시도이다. 따라서 개인적 경험을 통해 얻은 진실성이 작품에 반드시 담겨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