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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갤러리 (73) 이진주 작가] “내가 보고 싶어 그렸는데 관객이 보아주니 더욱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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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05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1.08.13 09:45:43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 본인이 직접 소개하는 이진주는 어떤 작가인가?

굉장히 사실적이고 섬세하지만 뭔가 낯설고 이상한 삶의 풍경, 인물, 대상을 그리는 한국 동시대 미술 작가이다. 현상적으로 출현한 현실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본질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나의 작품에서 연상되고 파생되는 생각들을 함께 나누려는 것 같다. 관객들이 그림 속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자기만의 어떤 생각이나 풍경들을 떠올리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다.

- 형식적이고 재료적인 측면에서 관심 있게 봐주길 원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 작품은 빛이 있든 없든 대상이 갖는 온전한 형태와 색채에 주목하는, 동양화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근거해 그려진다. 그래서 하이라이트가 없고 그림자가 최소화되어 평면적이라 느껴질 수도 있다. 빛과 어둠에 의해 대상이 해석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두드러지는 주된 광선은 없지만 온화한 광선들이 대상의 주위를 감싸는 상황이라 이해하면 좋겠다. 또 나는 주로 동양화 재료를 사용한다. 물감이 덩어리져 캔버스를 덮고 있는 게 아니라 스며들며 자연스럽게 발색되는 표현들을 좋아한다. 동양화의 전통에 대해 우리가 갖는 고정적이고 강력한 특징들이 있는데 그것 말고도 굉장히 다양하고 다채로운 전통들이 존재했고 현재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나는 질료적인 특징이나 표현적인 측면에서 전통 채색화의 특수한 지점들이 현대미술에서 굉장히 독특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진주, ‘사각(死角, The Unperceived)’, 2020,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122 × 488cm, 122 × 488cm, 122 × 244cm ©이진주, 아라리오뮤지엄

-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들은 전통에 관심과 애정을 갖는 동시에 전통의 계승이나 재해석과 같은 부분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본인은 한국의 전통 동양화를 어느 정도 생각하며 작업하는가?

의도적으로 전통 동양화의 특정한 부분을 활용하거나 제시해야겠다고 계획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사후적으로 내가 왜 나도 모르게 끌려서 이런 재료들을 선택하고 이렇게 그리게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여백을 남겨두고 대상을 그리는 화면 운영 방식, 형(形)으로 신(神)을 전한다는 고개지(顧愷之)의 전신사조(傳神寫照)에 근거해 인물을 치밀하게 그리려는 경험 등이 없었다면 나의 그림이 어땠을까? 내 작업에는 분명 동양화를 전공하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법한 생각, 구조, 표현들이 있다. 나는 그림을 좋아하면 자연히 수채화를 그리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음악을 좋아하면 국악보다는 피아노를 치는 게 익숙한 서구 위주의 환경에서 성장했다. 내가 느끼는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때 유화를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와 체질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감상자인 것과 그 재료를 다루는 사람이 되는 것은 굉장히 달랐다. 기질적으로 조금 더 자연적이고 물을 바탕으로 하는 유연한 재료, 여백이 항상 허용되는 동양화가 나에게는 굉장히 편안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20대엔 전통에 대한 고정 관념 때문에 답답하거나 괴리감을 느끼며 고민했던 적도 있다. 최종적으로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무언가로 특별하고 새로운 것, 나만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다, 표현할 수 있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이진주, ‘볼 수 없는(Unseen Things)’, 2019,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15.5 × 213cm ©이진주
이진주, ‘피의 일(Obligation of Blood)’, 2018, powdered pigment, handmade JB black,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34.5 × 30.5cm ©이진주

- 작품 속 여백이나 ‘블랙페인팅’의 심연과도 같은 공간은 이진주의 작품을 극사실적인 동시에 추상적으로 만들어준다. 이후 작품이 더욱 추상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을까?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삶의 마지막 순간 스스로의 작품 세계를 돌이켜 볼 때 신체의 변화, 시대의 감각, 개인적 역사의 변화가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나의 작품 세계에 녹아 추상적이든 극사실적이든 전혀 생각하지 못한 여러 다양한 형식으로 드러나 있길 고대한다. 하지만 그 변화를 위해 작위적으로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쫓는 것은 경계한다. 개념적인 현대미술 안에서도 회화는 마치 모국어처럼 작가적 작품 세계의 형식과 방향성이 끈질기게 이어져 변모하는 편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더불어 손으로 표현되는 회화와 중요하게 연결되는 신체성을 생각해보면, 현재와 같은 극사실적인 섬세한 표현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무뎌질 것이고 그러한 제약 속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변화들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70세가 넘어서도 대표적인 섬세한 걸작을 남긴 채용신과 같이 나도 그 상황에 가봐야 알 것 같다.
 

이진주, ‘가짜우물(Deceptive Well)’, 2017,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60 × 528cm ©이진주, 아라리오뮤지엄

- ‘블랙페인팅’은 ‘JB블랙’을 사용해 채도와 순도가 정말 높은 검정을 보여준다. 의미뿐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상당히 실험적인 작업이다. 혹시 다른 색으로 그와 같은 실험을 진행했던 적이 있는가?

흰색과 남색으로 살짝 시도해보긴 했는데 ‘블랙페인팅’의 변주로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아서 더 진행하지 않았다. 어떤 사건들을 뒤바꿔버린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검정을 선택한 것처럼 의미와 표현에서 내가 만족할 정도의 결합이 이뤄져야 다른 변주들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 미술계 안팎으로 이진주 작가의 작업을 좋아하는 고정층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을 텐데 사람들이 본인의 작업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쑥스럽고,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신진 작가이던 2008년부터 이런 작업을 해왔는데, 처음에는 내가 끈질기게 다루는 심리적인 이야기들의 공감대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더라도 그 안에 보편성이 존재하고 서로 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각각 너무 다른 고유한 존재들이다. 각자의 생각과 세계는 모두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를 관통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마음을 다룬 학문인 심리학도 있는 거고. 신진 작가로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늘 ‘나는 무엇을 그리고 어떤 세계를 바라보며 가야 할까? 나만 좋아하고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와 같은 질문들을 많이 했었다. 내가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는 세상에 대해서 표현하자고 마음먹었을 때도 나만의 자기 독백에 취해 일기 같은 그림, 혼자 위안하는 작업이 되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첫 감상자인 나를 위해 그려야겠다’라며 작업을 이어나갔다. 개인적이고 예민한 시선의 방향이 자신의 내부만을 향하지 않도록 타인의 내면에 있는 보편들을 바라보려고 애썼던 것 같다. 이런 작품 세계를 관심 있게 봐주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용기를 내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진주, ‘저지대(The Lowland)’ 2017,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22 × 550cm ©이진주, 국립현대미술관

- 최근 출간한 작품집 ‘이진주 아트북’(2021)이 상당히 주목받았다.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한 ‘MMCA 미술책방 작담(작가와의 담담한 대화 작.담.)’에서 책의 제작 과정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로웠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이전부터 나의 작품집을 만들고 싶었다. 어렸을 때, 그리고 젊은 작가일 때 흠모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실린 두툼한 책을 보면서 느꼈던 경이로움 같은 게 있었다. 보통 작가들은 개인전을 열 때마다 도록을 만들지만, 전반적인 작품 세계를 긴 호흡으로 담아내는 책을 만들 기회는 많지 않다. 특히 내 작업은 섬세하고 복잡한 구성인 경우가 많아 판형도 커야 했다. 2008년부터 2020년까지의 대표작 93점이 실렸는데, 가로 혹은 세로로 긴 비율의 작품이 많아 접지를 넣기도 했고 강조하고 싶은 작품의 경우 세부를 확대한 도판도 추가했다. 아트북프레스의 조숙현 대표와 함께하면 책을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출간을 제의했다.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결과물이 잘 나왔다. 서울문화재단의 지원도 있어 가능했다.

-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분명한 현실인데 때로는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팬데믹이 본인의 작업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의 개인전, ‘사각(死角)’이란 제목,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상황 모두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각’은 내가 바라보는 세계뿐 아니라 세상의 재난들, 일상을 뒤흔드는 무언가에 대한 예술적 결과물로 구성되었다. 코로나19로 일상에서 많은 것들을 제한받으며 답답하고,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질 때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자연을 찾게 되는 것 같다. 골목길을 산책하면서 하늘을 보든, 작은 화분 하나를 가꾸든 거기에 존재하는 싱그러움과 약동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아직 완전히 발화되거나 원하는 이상향에 도달하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도달할 씨앗이나 나무의 새싹 같은 가능태의 생명과 에너지들을 계속 찾고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현실은 아주 고단하고 힘든 에너지가 약한 상태이지만 그런 느낌들을 붙잡으며 작업하고 있다.
 

이진주, ‘마음의 질료(The Material of Mind)’, 2010,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50 × 150cm ©이진주

- 이런 시대에 미술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미술만이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의 예술에서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맞는 어떤 형식으로 위안을 얻거나 위로를 받길 갈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저 모든 것이 다 충족되거나 현실적인 웰빙을 이루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눈앞의 세상에 틈이 생길 때, 삶이 무언가로 인해 확 트일 때 삶의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마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철학도, 예술도 필요한 거다.

-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작년에 ‘일간 이슬아’를 구독했는데 첫 번째로 받은 글에서 나를 기쁘게 했던 단어가 있었다. 바로 ‘터무니없고 즐거운 것’이었다. 일상적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혹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지만 나를 즐겁게 하는 무언가를 말하는 ‘터무니없다’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힘든 시기지만 많은 사람이 터무니없고 즐거운 일들을 상상하고 실천하는 시간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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