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그림을 따라 임진강, 한탄강, 화강을 다니다 보니 어느덧 가을 문턱에 섰다. 비 잠시 멈추고 바람 높은 날 정자연(亭子淵)을 찾아 나선다. 정자연 그림은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과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에 실려 있다. 겸재 그림을 해설한 분들 책에 정자연에 대한 위치가 기록되어 있어 위치 찾기는 어렵지 않은데, 옛 지도와 기록에 의하면 평강현(平康縣) 읍치에서 남으로 40리 되는 곳, 즉 정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계류(溪流)의 연못(淵)이다.
남북이 분단된 지금은 수복된 땅에 속해 철원군 정연리가 되었다. 이곳 물길을 옛 지도에는 말흘천(末訖川)이라 했고 정자연 주변 긴 주상절리 절벽 지대를 칠리탄(七里灘), 오리탄(五里灘) 또는 마연(馬淵)이라 했다. 마연은 말매미, 말잠자리에서 보듯 큰(말) 연(淵)이라는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 뛰어난 풍광(風光)에 옛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찾았는데 한국전쟁 이후 잊힌 명승이 되었다.
돼지열병과 코로나를 뚫고
이곳은 남방한계선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전에는 민간인이 갈 수 없는 곳이었으나 이 지역에 민간인 마을이 회복되고 평화 무드가 무르익으면서 안보에 대한 자신감도 생김에 따라 마을 친지 방문자나 이 지역에서 행하는 생태 안보 관광에 참여하는 이들은 가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부분적이나마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코로나와 돼지열병이 돌면서 다시 이곳의 생태 안보 관광길은 막혔다. 겸재 그림 길을 연재해 나가면서 몇 번 찾아가기를 시도했으나 그곳에 갈 수 없는 날이 두 해째 접어들었다. 포기할 즈음 마침 인연이 닿아 정자연에 다녀올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기록을 정리한다.
먼저 1738년 관동명승첩에 실린 정자연을 보자. 물길은 비스듬히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내린다. 우측은 평강, 좌측은 철원이다. 그림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물길은 굽어 흘러 화강과 만나 화적연으로 간다. 그림 전면은 주상절리이다. 사진에서 보듯 지금도 변함없이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위로 우거진 숲, 절벽 곳곳에 덩굴식물과 키 작은 나무들이 오늘날 모습과 완전 일치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절벽 위 숲길은 물길 아래 집 주인과 방문객들이 소요하며 정자를 오갔던 길인데 이제는 지뢰지대(地雷地帶)가 되어 철조망 안에 갇혔다.
정자연이란 이름이 있게 한 정자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정자가 이미 사라진 뒤였거나, 그림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정자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 그림에는 없지만 그 위치는 주상절리 우측 끝 언덕에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그림에 대략 붉은 점 하나 찍어 놓았다. 강에는 집 앞 나무 그늘 아래 작은 배 한 척이 매여 있다. 사공도 없고 선객도 없다. 하물며 집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아 그림은 고요의 공간으로 남았다. 배에는 노(櫓)가 날렵하게 걸쳐져 있다. 이 그림은 누구에게 보내려 그린 그림이었을까? 그림 우측에 화제(畵題)가 남아 있다.
亭子淵 戊午秋爲寓庵崔永叔寫(정자연 무오추위우암최영숙사)
정자연 무오년(1738년, 영조 14년) 가을 우암 최영숙을 위해 그리다.
최영숙은 누구였을까? 최명길의 증손 최창억(崔昌億: 1679~1748)이라 하는데 그의 호는 우암, 자는 영숙이었다 한다.
또 다른 정자연 그림, 이야기를 더하다
또 하나의 정자연은 해악전신첩에 있는 그림이다. 화첩은 1747년(영조 23년)에 엮은 그림첩이다. 1712년에 엮었던 해악전신첩을 되살려 그린 그림첩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보이는 정자연은 구도나 그림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다른 점이 몇 개 있는데 주상절리 절벽 끝에 절벽 위로 오르는 층계가 그려져 있다. 강물 건너로는 작은 배 한 척이 매어 있으니 그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층계를 오르고, 절벽 위 길을 걸어 정자로 오갔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배에는 노가 없다. 그 대신 수양버들 뒤쪽으로 한 사람이 보이는데 긴 삿대를 어깨에 메고 있다. 사공이리라. 관동명승첩에서는 노(櫓)로 강을 건넜는데 이번에는 노를 젓지 않고 삿대로 배를 밀어 강을 건너나 보다. 나무도 수양버들 한 그루 배치하여 강가 풍경을 어우러지게 했고 초가에서 기와로 바꾼 집에서는 노(老)선비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담소하고 있다. 신선이 따로 있으랴.
그렇다면 저렇게 산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숙종조 때 지봉 이수광의 증손 이현석(李玄錫: 1647~1703)이 있었다. 그는 금강산 유람도 다녀왔고 송시열과 예론으로 부딪쳐 철원으로 유배된 일도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쪽 지방도 잘 알고 이곳 사람들과 교분도 깊었다. 그의 문집 유재집(游齋集)에도 이곳 정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협선정기(挾仙亭記)
나는 일로 철원을 갔다가 이른바 정자연(亭子淵)을 다녀왔다. 세상에서 소금강(小金剛)이라 칭한다. 산수(山水)가 매우 깨끗하여 바라보니 눈이 단번에 밝아지고 10리에 걸쳐 푸른 소나무가 에워싸고 있어 처음에는 깊은 골이 있는 줄 모른다. 개울을 따라 점차 들어가니 나무 그늘을 뚫고 갈 뿐인데 시원하고 깊고도 넓은 하늘이다. 양쪽 언덕의 기이한 암벽은 천 척이나 우뚝 서서 좌우로 이어졌다. 곧 소나무 숲이 이어지고 푸른 물은 그 아래를 맴돈다. 소용돌이 물은 맑은 못을 만들고 서덜(물가 돌)은 격한 여울을 만든다. 청량한 물이 맑아 정신을 상쾌하고 서늘하게 한다. 작은 배를 불러 물 가운데로 가서 올려다보니 몇 칸 초가집이 아득한 노을 산 기운 사이에 은은히 비친다. 아득하여 아마도 신선의 거처인 것 같아 물어보니 협선정(挾仙亭)이라 한다. 올라가 보니 긴 숲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읍하는 것 같고 늘어선 바위는 병풍 같다. 여기에 산수간 경치는 의자와 상 같고, 언덕과 산은 괴어 놓은 음식 같다. 구름과 안개의 변화는 진실로 응대할 겨를이 없구나. 산수의 뛰어난 색은 어찌 돌아보는 중에 챙겨 모을 수 있겠나.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고 차가운 바람이 겨드랑이 간지럽히니 표표히 날개를 달고 구름을 넘을 듯하다. 소동파가 말한 하늘 나는 신선을 끼고 즐겁게 노는 것이 허탄한 말이 아님을 비로소 깨닫는다. 여기에 들어와 사는 이가 누구냐 물으니 예전의 관찰사 월탄(月灘) 황공(黃公)으로, 만년에 살던 곳이다. 정자 또한 월탄공(月灘公)이 지은 것인데 가장 높고 상쾌한 지기를 점했다. 공이 죽고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정자가 폐허가 된 것이 50년이 되었고, 지금 새로 지은 것은 공의 증손인 양성 사군이라고 한다. 사군의 요청으로 잠시 쉬자니 물고기를 그물질하여 안주를 내어 한참 담소를 하고, 거리낌없이 즐기다 돌아왔다. 이로부터 나의 꿈은 정자연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 (이하는 정자와 무관한 기술이기에 생략함)
挾仙亭記
日. 余以事道鐵原. 過所謂亭子淵者. 亭子淵. 卽世所稱小金剛也. 山水淸絶甚. 望之眼力頓明. 而十里長松蒼翠環擁. 始亦不知有洞壑也. 沿溪漸入. 穿歷樹陰而已. 颯爾沈寥天矣. 兩岸奇巖. 壁立千尺. 峛迤左右. 竟松林爲首尾. 而碧流轉其下. 匯者爲澄潭. 磯者爲激湍. 鏘鳴泂澈. 使人神爽而洌如也. 呼小艇以涉中流而仰視之. 則茅齋數椽. 隱映於縹渺霞嵐間. 杳然疑仙居者. 詢之. 乃挾仙亭云. 旣登而臨之. 長林如拱揖然. 列巖如屛障然。泉石焉几案也。岡巒焉飣餖也。雲煙之變態. 固應接不暇乎. 而溪山秀色. 可攬結於顧眄中矣. 灝氣透骨. 泠風駕腋. 飄飄若羽化而凌雲. 蘇仙所云挾飛仙以遨遊者. 始覺其非誕語也. 問卜居者誰歟. 則蓋故觀察使月灘黃公晚節棲息之所. 亭亦月灘公所置而占其最爽塏者. 公歿而且兵燹矣. 亭之廢垂五十年. 今而新之者. 乃公嗣曾孫陽城使君云. 使君要我少憩. 網溪鮮以佐酒. 相與半▦話. 寄傲軒窓而歸. 自是而余之夢魂. 未嘗不在亭子淵矣.
(嗟哉. 余於是有所感矣. 彼世之倦於宦遊者. 孰不欲專一美丘壑以爲休退計. 而終老營營. 卒無得者夥矣. 顧非天作地藏. 物各有主. 不可以力致者歟. 至如門閉松筠. 帳怨猿鶴. 則雖能得之而不能有者. 亦古今滔滔也. 苟其能得之而能有之. 而又能傳之子若孫. 閱數代無廢棄者. 豈不尤甚難哉. 夫月灘公始基之矣. 終且老於是. 几杖琴瑟. 風流浩蕩. 久作仙境之佳主人. 而堂搆之責. 又得使君任之. 有壞而葺之. 有毀而修之. 使風景長新. 舊觀不改. 山若增高. 水若增肥. 而堂不待飾而奐焉. 則余之所美於斯亭者. 奚亶登望之樂已哉. 他日使君徵余以亭記. 遂以斯說應之也.)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 처음 정자를 지은이는 월담(月潭) 황근중(黃謹中: 1560~1633)이었다. 그는 강원감사를 지낸 인물인데 인조반정 이후 이곳에 창랑정(滄浪亭)을 짓고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남인으로 서인들과 척을 진 일이 없었기에 화를 입지 않았다. 창랑정은 병자호란 때 유림 장군과도 싸운 바 있는 청군들에 의해 불탔다가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었다 한다. 이현석이 1692년에 들렀을 때 정자의 이름은 협선정이었기에 협선정기로 기록되었으니 정자를 중수하면서 이름이 바뀐 것이리라. 이후 조선 후기의 문신 오재순(吳載純: 1727~1792)이 1758년에 정연기(亭淵記)를 지을 때 정자의 이름은 선유정(仙游亭)으로 바뀌어 있었다. 평강현감(平康縣監)을 지낸 오재순의 순암집(醇庵集)에서 또 다른 정자연의 기록을 보자.
정연기(亭淵記)
정연은 현(縣) 남쪽 40리인 마연(馬淵)의 끄트머리에 있다. 마연의 물은 현의 북쪽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10여 리 흘러 화풍정(花楓亭)이 된다. 다시 수십 리를 흘러가서 선유담(仙遊潭)의 물과 합쳐져서 정연이 된다. 근원은 멀고 맑고 푸르며 깊고 넓다. 오른쪽은 언덕을 지고 있는데, 위는 평평하며, 황씨가 거주한 것이 5세대가 되었다. 높다란 낭떠러지가 왼쪽으로 나란히 우뚝 솟았다. 둥근 형세가 활과 같아서 물은 아래 물굽이를 따라서 나온다. 위에 큰 소나무가 열 지어 나란히 푸르고 첩첩이 푸르며 절벽과 처음과 끝을 함께 한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 절벽은 트이며 평평한 언덕이 되고, 오른쪽은 연달아 봉우리가 시작된다. 가운데 봉우리의 허리에 정자를 세우고 선유정이라 하였다. 험한 층계 수십 개를 밟고 올라가 못과 구비를 굽어보고 늘어선 산을 마주 볼 수 있다. 또한 황 씨가 설치한 것이다. 무인년 9월 17일에 적다
亭淵在縣南四十里. 馬淵之委也. 馬淵之水. 出自縣北. 南流十許里. 爲花楓亭. 又行數十里. 會仙游潭水爲亭淵. 其源旣遠. 澄碧深曠. 其右負崗而上平. 黃氏居之且五世焉. 蒼壁聯峙其左. 勢環如弓. 水循其下灣而出. 其上列以長松. 騈蒼疊翠. 與壁終始. 溯上則左壁豁爲平岸. 右又起連峯. 有亭搆其中峯之腰曰仙游. 躡危級數十而上. 俯壓潭曲. 對見列巒. 亦黃氏之所置也. 戊寅九月十七日記.
(기존 번역 전재)
흉측했을 박세직의 ‘세직정’
이 기록들을 보면 정자연의 정자 이름은 창랑정(滄浪亭) → 협선정(挾仙亭) → 선유정(仙游亭)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또 한 번 바뀐 일도 있었다. 박세직 사단장이 이곳 백골사단장 시절 창랑정 옛터에 시멘트로 정자를 세우고 세직정(世直亭)이라 명명한 일이 있었다 한다. 주민들 반대로 곧 철거하기는 했다지만 하마터면 이 양반, 세인의 입에 회자(膾炙)되는 가십거리로 남을 뻔했다.
위 정연기와 세직정 터를 찾으면 알 수 있듯이 창랑정은 주상절리 위 물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상절리 상류 쪽 끝, 지금은 정연교가 지나는 위쪽 산언덕 위에 있었던 것이다. 이번 답사길에 길 안내를 해 주신 부녀회장님은 이 지역 역사 지리에 조예가 깊은 분인데 창랑정 위치를 정확히 알려 주셨다. 연려실기술에도 정자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큰 시냇물이 세 방면의 분수령으로부터 마을 앞에 흘러 와서 깊이가 두 배를 수용할 만하다. 석벽이 병풍같이 둘러 있고, 언덕 위에는 정자와 누대가 있다. 여기는 황씨(黃氏)가 대를 물려가며 사는 곳이다.
가 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으나 주민도 갈 수 없는 출임금지 지역이라서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왔다. 그 주변 화강암 너른 바위에는 옛 분들이 신선처럼 즐기던 바둑판과 장기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제 정연교를 건너 정자연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간다. 정자연 앞 주상절리에는 강을 가로 지나는 무너진 옛 철교가 걸려 있다. 금강산 가던 철길이다.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117km였다는데 쌀 한 가마 값 요금에도 손님이 줄을 섰다 한다. 1921년 공사를 시작하여 31년에 전 구간을 개통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철도는 멈추고 철로는 무너져 갔다. 지금은 철원 김화 지역에 희미한 흔적만 남았다. 무너진 철교에 올라 정자연을 내려다본다. 참 아름다운 곳이다.
삼연 김창흡은 겸재의 그림에 제화시를 달았다.
亭子淵
丹靑善幻. 固能摸奇稱眞. 而亦或轉醜爲姸. 按圖而澄潭翠壁. 安知非烏石黃流乎. 且取遊目意足. 不須問某丘某亭也.
색의 조화가 환상으로 뛰어나네. 진실로 기이함을 본뜨고 진경을 드러냈으며 때로는 추함도 아름다움으로 바꾸었네. 그림을 살피면 못은 맑고 절벽은 푸르네. 어찌 검은 돌과 탁한 물이 없다고만 알겠는가. 또한 가서 즐기면 족하니 굳이 어느 고을 어느 정자인지 물을 필요는 없지.
조선조 문인 이영보(李英輔)도 금강산 유람 길에 들러 시 한 수 읊었다(1759년). 동계유고(東溪遺稿)에 전한다.
亭子淵
醞藉臨幽壑. 淸泠帶綠溪. 窻欄蔭松石. 雞犬傍鳧鷖. 飯訖仍忘起. 詩成欲疊題. 淮陽誠不薄. 軒盖意還低.
푸근히 깊은 골짝 들었더니 푸른 계곡에는 청량한 기운
창 같은 골짝 틀에는 송석 덮였고 인가 곁에는 물오리 물새
식사를 마치고도 일어나길 잊었는데 시 한 수 짓고도 또 시상 떠오르네
회양 땅이 그다지 가깝지도 않은데 수레는 돌아갈 생각이 없구나
동계는 정자연 풍광에 빠져 회양으로 떠날 여행길도 잊고 말았다.
겸재 정선과 같은 시대를 산 또 다른 겸재(謙齋) 조태역(1675~1728)은 정자연에 배 띄우고 시를 읊었다.
亭子淵泛舟
峽中江水如天碧. 上有千尋蒼翠壁. 靑楓葉赤摛錦繡. 粧點雲間積鐵色. 興來携酒登少艇. 鏡面如拭風無力. 不識蘓仙昔遊處. 何似君家此水石. 蘓仙一生止再遊. 君能朝夕對此几案側. 我亦有意重來訪. 下用臨分情惻惻.
정자연에 배 띄우고
협곡 사이 강물은 푸른 하늘 같고 위로는 천 길 푸른 절벽
붉고 푸른 단풍은 금수를 펼쳤는데 점점(點) 꾸민 구름 사이 짙은 하늘 색
흥겨워 한 잔 챙겨 작은 배에 오르는데 거울처럼 닦은 수면 바람도 잠잠하네
모르긴 해도 소동파 옛 놀던 곳 어찌 그대 집 이 수석 같겠는가
소동파는 일생 두 번 놀이에 그쳤지만 그대는 조석으로 의자 곁 여기를 대하지
나 역시 다시 올 뜻 있으니 베풀어 간절한 정 나누어 주시게나
물과 바람이 청정한 철원평야
이제는 저 아래 정자연에는 집도 없고 정자도 없다. 정자연에서 읊은 옛사람들의 마음인들 남북이 첨예한 이곳에 온전히 남았을까? 아쉬움을 남기고 멈춘 철교를 돌아 나온다. 전선휴게소라고 쓴 집에 문이 잠겨 있다. 정연리 최고의 명소였던 매운탕집 이름이다. 코로나로 손님이 올 수 없고 주인 아저씨 건강이 좋지 않아 폐업을 하였다. 며칠 전 전화를 드렸더니 안 사장님 말씀이 영영 문을 닫는다고 한다. 아쉬움이여.
그 옆 전선교회도 을씨년스럽다. 코로나로 문을 닫았는지 싸~한 바람만 분다.
정자연을 두고 돌아 나오는 철원평야는 오대쌀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물과 바람이 청정하니 평야도 청정해 보인다. 이길리와 정연리를 거쳐 들어갔던 검문소를 통과해 나온다. 근무병이 휴대폰 속 사진을 일일이 점검한다. 군사 기밀에 속하는 곳이 사진에 포함되었나 보는 것이다. 예의 바른 태도와 꼼꼼히 점검하는 모습에 신뢰가 생긴다. 병사들이 우리 때와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공연한 걱정이었구나.
철새도래지 토교(土橋)저수지로 간다. 너른 저수지에 겨울이면 철새가 가득 내려앉는다고 한다. 저수지 근처에 있다는 창원황씨 묘역에 창랑정을 지은 황근중 묘비가 있다기에 궁금해 둘러보았으나 이 지역도 군사보호지역이라서 이내 발길을 돌린다. 이제 홀가분한 마음과 맑은 공기 속에 귀가 길에 오른다.
이번 답사를 도와 주신 DMZ생태공원 최 선생님, 이길리 부녀회장님 감사합니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