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최영태 이사) 이번 호 ‘문화경제’에는 기업들이 만드는 스토리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JB금융지주는 비록 한국에서는 ‘지방 은행’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지언정 캄보디아에서는 최고의 금융기업이라는 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16~17쪽). ‘1등이 되고 싶으면 판을 바꿔라’라는 말이 있듯 한국에서 힘든 1등 스토리를 해외 현지에서 쓰는 작업은 수익 차원에서는 물론, 직원들의 사기를 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안에서도 순위를 올리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올림픽이라는 단어를 꺼내면, “도쿄올림픽은 끝난는데…”랄 수도 있지만, 올해는 특이하게도 하계 올림픽 뒤 몇 개월만에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해입니다. 올해 도쿄 올림픽에서 우리는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금-은메달뿐 아니라 동메달, 아니 4위, 10위를 해도 웃는 선수와 국민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를 방송인 김어준 씨는 “선진국 국민이 됐기에, 과거에는 국제적으로 억눌린 심정을 스포츠에서의 승리로 정신승리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기에, 스포츠를 스포츠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요지로 해석했는데, 딱 맞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스포츠에 대한 시각이 바뀐 만큼, 기업들은 비인기 스포츠를 잘 골라 좋은 스토리 텔링을 한다면 과거 크게 김연아 효과를 본 KB금융(20~21쪽) 같은 스포츠 지원 명가가 될 수 있을 듯도 싶습니다.
‘광주형 일자리’가 만든 소형 SUV 캐스퍼가 공전의 히트를 치는(44~46쪽) 바탕에도 스토리가 있습니다. 캐스퍼 자체도 예쁘지만 이 차를 탄다는 것은 “사람을 구한다”는 의미가 덧붙여집니다. 그저 좋은 차를 타는 것과, 일자리까지 살리는 스토리를 입은 차를 타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겠지요. 과거 미국에서 친환경차를 표방한 토요타 프리우스가 처음 나왔을 때 돈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그 소형차를 몇 대씩 앞다퉈 산 현상도 바로 스토리 텔링의 힘에서 연유합니다.
이번 호에는 <스토리 만드는 기업>(10~13쪽)과 <게임 6국지>(48~57쪽)라는 특집에서 게임 회사들이 게임 등장인물을 활용해 게임과 현실을 잇는 스토리 만들기에 주력하는 모습을 다양하게 제시했습니다. 게임이라는 것이 대개 플레이어가 게임 속 등장인물과 함께 가상공간에서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여정인 만큼, 현재 세계에서 할리우드와 함께 세계인이 공감할 콘텐츠를 만들고 인기를 끌 수 있는 유일한 나라로 꼽히는 한국에서 이런 작업이 대규모로 이뤄지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 성과가 기대됩니다.
한때 세계의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공장’은 할리우드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적 또는 유럽적 스토리 텔링의 공식이 너무 드러나 있어, 할리우드 영화의 초반부를 보면 “이렇게 끝나겠군” 하고 종말부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민속학자 블라디미르 프로프는 민담 분석을 통해 △악한과의 투쟁 - 그에게 승리하는 것 △어려운 과제 - 그것의 해결 △투쟁과 과제를 수행했다면 그다음에는 검을 얻는다거나 결혼을 하는 보상 △혹은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게으름을 벌하는 처벌의 서사 패턴 등이 있더고 분석했고, 이런 서사 구조는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뼈대들이지요.
제품은 일류이고, 기업 스토리까지 멋진 한국을 향해
사실 승자로서의 경험만을 줄곧 해온 구미인이 새로운 서사 뼈대를 채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최근 우리가 일본 우익의 행태에서 신물나게 목격하듯, 피식민 경험이 없는 나라의 국민들은, 어려움에 처하면 이웃 나라를 괴롭혀, 즉 “너 죽고 나 살자”는 근린궁핍화(Beggar thy neighbour) 정책에 기댈 뿐 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듯 합니다.
반면 한국인은 지구에서 가장 가난했던 최후진국에서 불과 수십 년만에 세계 최상급 선진국으로 돌변하면서 배고픔과 배부름까지, 그것도 한 몸으로(개개인이) 경험했으니 스토리 텔링의 서사 구조가 폭넓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과 겹쳐지는 5천 년 역사까지 있으니 서양인들이 한국의 문화 콘텐츠에 “이건 또 뭐람!”이라며 놀라기 쉽지요.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이 최근 ‘파이낸셜 스토리’를 멋지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게 목적인 기업인만큼 그 어떤 스토리보다도 돈 잘 버는 기업의 얘기를 국제적으로 눈길을 끌만큼 멋지게 써내려가겠다는 의지지요.
21세기 판 기업 스토리 텔링의 효시인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쓰는 것은 단지 질 좋고 값이 싼 제품을 쓰는 게 아니라 인문학적 지성과 디자인적 감성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데 성공’(김동조 저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115쪽)했습니다.
과거 스토리 만들기는 개인이나 문화산업 종사자만이 무대였지만, 이제는 기업이 스토리 텔링에 나서는 시대입니다. 거의 전국민이 주식 투자를 하는 시대에, 그래서 단순히 기업의 실적(펀더멘털)만이 아니라 기업에 얽힌 이야기(미래에 대한 상상)가 주가와 오르내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세상(‘테슬라와 일론 머스크 현상’에서 잘 드러나듯)에서 기업발 스토리 텔링은 필수불가결 요소로까지 떠오르겠지요.
한국이 ‘물건 잘 만드는 나라’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업 스토리까지 멋진 나라’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면 정말 재미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