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9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2.03.15 09:57:44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더 갤러리 이번 회는 개인전 ‘Ink on Paper Ⅲ(잉크 온 페이퍼 Ⅲ)’에서 먹과 한지의 속성에 집중한 작품들을 선보인 손동현과의 인터뷰를 싣는다.
- 작품 제목의 표기 방식이 바뀌었다. 제목으로 의미 혹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했던 이전 작업들과 달리 숫자와 알파벳이 섞여 있다.
‘Ink on Paper Ⅲ’라 제목의 제일 처음에 숫자 3을 적었고, 각각의 형식에 근거해 약자를 더했다. 화판 위의 회화는 P(painting), 화첩은 A(album), 족자는 HS(hanging scroll), 부채는 FF(folding fan)이다. 작품별로 제목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짓는 것이 이번 작업의 진행 방식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재현하고자 하는 어떤 대상을 염두에 두긴 했지만, 그것을 명확히 제안하려 하지도 않았고 작품별로 추구하는 방향이 있었던 게 아니어서 통일시켰다.
- 두 개의 전시 공간 중 하나는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산수화 같다. 들어서자마자 공간을 감싸는 산 같은 회화 두 점과 화첩들, 산속의 폭포인 족자, 구름 부채, 중심부의 섬 같은 화첩 군체, 그곳을 노니는 용의 모습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의도한 것인가? 또한 선반 위에 놓인 화첩 중에 세로로 긴 면이 반복되는 ‘3A07’(2022)과 낙관이 반복적으로 찍힌 ‘3A08’(2022)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그런 방향성을 갖고 설치했다. 전시장 한가운데의 화첩들은 산인데 섬처럼 보이게 되었다. ‘3A07’의 경우 병풍 화첩 위에 그린 건데 일반적이지 않은 특이한 형태여서 선택했다. 그동안 내 작업에 등장했던 표구형식 중 이번 전시에 포함 안 된 것이 병풍인데, 만약 전시되었다면 어떤 작품이었을지를 미니어처처럼 만들어 제시해봤다. 화첩이 확대되어 공간에 놓이면 병풍과 같아지는데 벽에 그림을 거는 방식이 아니라 공간에 세워서 모양을 잡아가는 방식으로도 전시가 가능하다. 화첩의 분할된 면들은 서로 연결 혹은 분절되도록 구성했다. ‘3A08’은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에 찍힌 도장만으로 작은 작품을 만든 것이다. 보통 낙관은 방점을 찍는 역할이라 동세를 전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는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완성된 작품은 벽 전체에 낙관을 찍는다는 기분으로 놓일 위치를 정했다.
- 두 개의 낙관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번에도 그 형태가 독특하다.
나는 나의 이니셜인 D와 관련된 도장을 만들어 사용해왔다. 이번에는 그래피티에서 사용하는 D자의 폰트에 기반한 낙관을 찍었다. 또 다른 낙관은 만화와 영화 ‘트렌스포머(Transformers)’에 등장하는 세력 중 하나인 디셉티콘(Decepticon)의 엠블럼이다. ‘Ink on Paper Ⅲ’에 전시된 작품들은 작업 과정에서 화면에 담긴 형상 혹은 지지체인 종이의 상태가 계속 변형(transform)되었고, 디셉티콘이 D로 시작하는 이름이라 선택하게 되었다. 모든 작업에서 분무기를 사용해 먹물을 뿌려가며 표현했기 때문에 D자 낙관이 전부 들어갔고, 트랜스폼된 작품들에는 디셉티콘 낙관까지 찍었다.
- 이전에도 수묵에 집중한 작품을 발표했었다. 그런데 주제적인 면이 부각되어 무엇을 그렸는가,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가 꽤 중요하게 다뤄졌다. 이번에는 산수가 등장하지만, 재료 자체에 오롯이 집중하게 한다. 어찌 보면 ‘Ink on Paper’라는 제목에 제일 부합하는 것 같다.
‘Ink on Paper’(2015) 이전에는 수묵으로만 그린 작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먹을 사용했다는 그 자체가 중요했다. 그리고 ‘Ink on Paper Ⅱ’(2020)는 먹과 잉크를 함께 사용했다. 이번에는 재료와 지지체 그 자체에 집중했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수묵화 작업을 꽤 했고, 그동안 내 작품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인물화의 형식을 거둬내서 더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Ink on Paper’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들은 작업의 방향을 전환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3P’나 ‘3A’ 시리즈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종이에 집중하는 동시에 입체적인 요소까지 담겨 있는 작업이다. 화가가 만드는 조각, 설치가 아니라 입체이긴 하지만 회화를 벗어나지 않는 어딘가이다. ‘3P’는 한지를 구겨서 산세를 만든 다음 분무기를 이용해 산세를 강조하는 선을 그리고, 구름도 넣은 뒤 펼쳐서 팔랑거리는 종이 아래에 레고 듀플로(Lego Duplo) 판을 깔고 탁본을 떴다. 종이 아래에 듀플로 판을 놓고 문지르다 보면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느낌을 전달받게 된다. 전시되는 형식은 평면적으로 보이는 회화이지만 그 안에 과정이 담기기 때문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 화첩의 경우 분명 회화이지만 스스로 지탱해 서 있기 때문에 입체물로 다가와 작업의 범위가 확장되는 인상이다. 이후에 3차원적인 입체를 보여주는 작업이 제작될 가능성이 있는가?
항상 모든 방향을 열어두고 작업한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Ink on Paper’가 뜻하는 ‘지본수묵(紙本水墨)’의 문제가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작업으로 놀아보고 싶다.
- ‘3P’ 시리즈의 경우 산수를 연상시키지만 추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화첩, 족자 작업은 대부분 산수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화첩의 일부를 잘라내 산의 형상이 더 잘 전달되는 것 같다.
제일 먼저 프로토타입(prototype)의 산수화가 있었고, 첫 번째 화첩 작업인 용을 그린 뒤 용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산수를 그렸다. 화첩의 일부를 잘라 산세를 보여주는 작업은 자연을 강조했다기보다 일부를 잘라내도 특별한 조치 없이 접고 균형을 맞춰 세워놓을 수 있는 종이만의 특성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병풍처럼 서 있기도 하지만 완전히 접으면 다시 화첩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종이라 가능한 일이다. 또한 여백을 남겨두는 게 아니라 잘라낸 것이기도 하다. 회화만 걸려 있는 전시 공간과 연결되기도 하고 반대되는 면도 있는 작업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 화면의 여백을 잘랐다는 것은 공간을 잘라낸 것과 같은 의미이다. 전시 공간과의 연결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조금은 그렇다. 그런데 그림에 칼질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어서 잘라낼 때 조심스러웠다. 전시장 중앙에 세워진 화첩의 경우 살짝 허리를 숙여 자세히 보면 잘린 실루엣이 뒤따르며 겹쳐지는 실루엣과 부딪히면서도 균형을 이뤄서 마음에 들었다.
- ‘이른 봄’(2021)의 경우는 곽희(郭熙)의 ‘조춘도(早春圖)’(1072)가 시작점이었다. 이번에도 특정하게 염두에 둔 작품이나 이미지가 있었는가?
없었다. 이번에는 순전히 표현 자체에 집중했다. 산과 폭포, 구름을 구실로 새로운 방향의 표현과 형식을 만들 생각만 했다.
- 산수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고, 수묵을 재료로 하다 보니 문인산수화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작가 역시 과거 문인화가들이 산수화를 그리며 정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미적이고 표현적인 즐거움을 느끼며 놀았을 것이라 말했다. 손동현의 작업에서 동아시아 전통 회화의 역사와 형식 등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산수화가 언급되면서 누군가는 작가가 시도한 형식적인 실험들을 전통의 재해석이나 변용으로 한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 작업이 전통 산수화의 재해석은 아니다. 유교에 바탕을 둔 선비들의 입장에서 산수에 접근하고 있지도 않다. 다만 문인화가들이 산수화라는 장르 안에서 이런저런 표현을 하고 자신만의 표현 기법을 찾아가는 데에서 재미를 느꼈던 것이 나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한지를 접고 구겨가며 산을 만든 뒤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작업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도 선비들이 자연을 노닌 것과 연결점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와 같은 생각을 주되게 한 것은 아니다.
산수의 이야기가 나왔던 것은 첫 작품이 한지를 구겨서 산을 만드는 데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을 만든 뒤 입체적인 산의 모양/흔적을 남기기 위해 분무기로 먹물을 뿌리며 작업한 뒤 펼쳐서 산세(입체와 공간)를 담고 있는 회화를 완성했다.
- 전시 ‘Ink on Paper Ⅱ’나 ‘재스민 드래곤 피닉스 펄(Jasmine Dragon Phoenix Pearl)’에서 발표한 작품들처럼 ‘3P’ 시리즈에서도 위아래에 비단을 덧댄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비단 여백’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인데 2017년 작품에서 처음 사용했다. 하나하나 독립된 작품들을 시각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3P05’(2021~2022), ‘3P06’(2021~2022)처럼 여러 폭을 붙여서 전시한 작품들의 경우에만 사용했다. 여러 작품을 하나로 이어붙여서 전시할 때에 효과적이라 판단했다.
- 벽에 걸린 부채의 수와 위치는 -특정한 부채들은 함께 붙어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처음부터 지정했는가? 그동안 작품의 수나 위치, 맥락 등을 정해놓고 작업한 경우가 있었다.
총 55개인데 특별한 의미는 없다. 부채의 개수나 위치는 오직 시각적인 부분만을 염두에 두었다. 부채를 완전히 펼치지 않은 채로 한 층을 입히고, 다시 그 위에 또 한 층을 입히면서 작업한 것도 있고, 스텐실(Stencil) 기법을 사용해 음각과 양각을 서로 부딪히게 하면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것도 있는데, 동일한 기법이 담긴 작품들끼리 나란히 걸지 않으면서 시각적으로 재미있는 리듬을 만들고 싶었다. 족자들과 화첩들의 위치만 확정 지은 상태에서 하나씩 맞춰가며 설치했다.
- 개인적으로 화첩 작업 중에 ‘3A09’(2022)에 눈길이 갔다. 붓을 쓰지 않고 분무기로만 표현했음에도 그 번짐의 효과나 먹의 표현이 매우 자유롭고 정제되어 보인다. 한편 ‘3P’ 시리즈의 경우 붓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관객도 있을 것 같다.
‘3A09’는 제일 마지막에 한 화첩 작업이다. 산 모양을 한번 잡아보자는 생각만 했다. 마지막 작품을 그릴 때쯤에는 분무기가 손에 많이 익어 스냅만으로도 원하는 표현을 할 수 있었다. 농묵(濃墨)을 먼저 뿌린 뒤 완전히 말린 상태에서 담묵(淡墨)을 뿌릴지, 조금 덜 말린 상태에서 뿌릴지를 조절해가며 변화를 주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탁본 외에는 모두 분무기로 뿌려가며 작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