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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97) 계상정거도 도산서원도] 물러난 겸재가 물러난 퇴계를 그린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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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20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2.03.30 13:06:04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오늘은 안동(安東)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아간다. 겸재가 이곳 도산서원을 그린 그림은 현재 두 점이 남아 있다. 도산서원 전신인 도산서당(陶山書堂)에 앉아 있는 퇴계의 모습을 그린 ‘계상정거(溪上靜居)’ 도(圖)와 도산서원을 그린 부채 그림 ‘도산서원(陶山書院)’ 도(圖)가 그것이다. 두 그림을 연계해서 그린 것은 아니고 각각 그려졌다. 오늘 길을 찾아가고자 하는 목표는 계상정거도인데 같은 곳을 그린 그림이라서 두 그림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 그림에 접하기 위해서는 퇴계의 동정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다. 도산서원 안내문을 요약하면,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1501년(연산군 7년)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에서 좌찬성 이식의 7남 1년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숙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우고 1527년(중종 22년) 향시에서 진사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4년(중종 29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무원부정자가 되면서 벼슬길에 올라 이후 예문관 검열관, 춘추관 서기관, 선교랑, 승훈랑 등 요직을 거쳤다 한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이유로 관직에서 사퇴하고 1546년(명종 1년)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돌아가 독서에 전념하고 1561년(명종 16년) 도산서당과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짓고 호(號)를 도옹(陶翁)이라 했으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제자들을 기르고 독서와 저술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한국 성리학에 큰 거목이 되었다. 서당에 자리 잡을 무렵 퇴계는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퇴계(退溪)라는 제목을 단 시인데,

 

몸이 물러나오니 내 마음이야 편안하나
학문 후퇴할까 늘그막이 걱정일세
시내 가에 비로소 살 곳을 정했는데
물가에 나가 날마다 돌아보네
(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溪上始定居 臨流日有省)

 

현재의 도산서당.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서당 암서헌에서 바라본 외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계상정거도는 바로 이 시기 도산서당에 정좌한 퇴계를 그린 것이다. 물론 170년 이상 앞선 시대의 인물을 직접 만날 수는 없었으며 퇴계가 서당에 앉아 있는 전 시대의 그림도 없었으니 순전히 상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다만 겸재 시대에는 도산서당을 기반으로 크게 확대 증축된 도산서원이 번창하던 시기이었기에 도산서원을 바탕으로 해서 도산서당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어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에 살펴보겠지만 도산서원에 대해 퇴계 자신이 기록한 도산서원 병서(陶山書院 竝書)나 성호사설 속에 도산사(陶山祀), 고봉 기대승의 관련 글들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자료는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안 옛 지도. 

물러앉은 네 집을 그린 ‘퇴우이선생진적첩’

그런데 겸재는 왜 도산서당에 앉아 있는 퇴계를 그리고 계상정거(溪上靜居)라는 제목을 단 것일까? 그것은 이미 은퇴하여 도산서당 개울가에서 조용히 후학을 키우며 지내는 퇴계의 모습을 그렸기에 붙인 화제(畵題)일 것이다. 이 그림은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에 붙어 있는 그림(附畵)인데 연구자들에 의하면 71세에 그린 그림이라 한다. 겸재도 전년 양천현감을 끝으로 은퇴하고 인왕곡(仁王谷)으로 돌아왔으니 정서가 잘 맞았을 것이다.

 

겸재 작 ‘계상정거도’. 

겸재의 외할아버지 박자진(朴自振, 1625~1694)은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퇴계의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를 가지고 있었는데 소중한 것이라서 화성 무봉산에 칩거하고 있던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 발문을 받아 함께 보관하고 있었다.

이렇게 모여진 퇴계, 우암 두 선생님의 친필 글씨를 겸재의 아들 정만수(鄭萬遂)가 가져와 아버지 겸재에게 그림을 부탁하고 사천에게 글도 받고 해서 만든 화첩이 우리 시대에 보물 585호로 지정된 퇴우이선생진적첩이다. 여기에는 겸재의 그림 4점이 엮여 있다. 도산서당에서 주자서절요서를 짓고 있는 퇴계를 그린 계상정거, 무봉산에 칩거 중인 우암을 그린 무봉산중(舞峰山中), 외할아버지 자택을 그린 풍계유택(楓溪遺宅), 이제는 돌아와 안정에 든 겸재 자신의 집 인곡정사(仁谷精舍)가 그것이다.

이제 계상정거도를 살펴보자. 지금의 도산서원 정문 앞 우측에는 열정(洌井)이라는 오래된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도산서당 시절 중요한 식수원이었을 것이다. 이 우물이 소중하였기에 퇴계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림에는 천연대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서당 남쪽 우물 달고 차구나
천고의 기운 서렸으니 이제부터 덮지 마오.
(​書堂之南 石井甘洌 千古烟沈 從今勿幕)

 

겸재 작 ‘도산서원도’.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 앞쪽 건물이 도산서당 공간이다. 현재의 모습과 계상정거도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두 채의 건물이 보이는데 앞쪽 건물에는 퇴계로 보이는 선비가 가지런히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아마도 주자서절요서를 짓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건물 우측으로는 작은 실개천이 흐른다. 강세황의 도산서원도에는 몽천(蒙泉)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개울물은 흘러 앞 큰 물로 들어간다. 예전에는 개울이었으나 이제는 안동댐을 막아 댐의 상류 강이 되었다. 개울에는 작은 나루 다리가 놓이고 일엽편주가 매여 있다. 은자(隱者)의 한가로움이 느껴진다. 서당은 우뚝한 두 바위 안쪽에 숨은 듯이 자리 잡았다. 앞에서 보아 좌측은 운영대(雲影臺), 우측은 천연대(天淵臺)라 한다.

 

서당 왼쪽의 운영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서당 오른쪽의 천연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1000원 지폐의 뒷면 도안. 

그런데 이 그림을 곰곰 살펴보면 처음 대하는 이도 낯선 그림이 아니다. 어디에서 본 그림일까? 답은 천원 권 지폐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천원 권 지폐 도안은 앞면이 퇴계와 매화, 뒷면이 바로 이 계상정거도로 채워져 있다. 퇴계는 매화를 유난히 사랑한 선비라서 퇴계매화첩(退溪梅花帖)을 별도로 엮어야 할 만큼 매화 시를 많이 지었다.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陶山月夜. 詠梅. 六首) 6수 중 두 편만 읽고 가련다.

산창에 홀로 기대니 밤빛 차가운데
獨倚山窓夜色寒
매화 가지 끝 둥근달 떠오르네
梅梢月上正團團
이제 새삼 실바람을 불러올 것 없나니
不須更喚微風至
맑은 향기 절로 서당에 가득하네
自有淸香滿院間

뜨락을 거니니 달은 나를 따라오는데
步屧中庭月趁人
매화 곁을 돌고 돌아 몇 바퀴나 돌았던고 梅邊行遶幾回巡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날 일 잊었는데 夜深坐久渾忘起
향기는 옷에 가득 그림자는 몸에 가득
香滿衣巾影滿身

그런데 한때 계상정거도를 비롯해 이 화첩에 대한 위작 시비도 있었다. 2008년 서화 전문 감정 학자 이ㅇ천 박사가 그의 저서 ‘진상 - 미술품 진위 감정의 비밀’을 통해 계상정거도가 위작이라고 주장을 펴기도 했다. 문화재위원회가 진품으로 결론을 냈는데 이런 주장과 논거를 제시했던 당사자는 의문이 풀렸는지 모르겠다.

한편 다른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종대왕, 충무공과 퇴계, 율곡, 신사임당.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성리학(性理學)의 나라인가? 새로운 화폐 디자인을 할 때에는 널리 국민의 의견을 물으면 좋을 것 같다.

 

강세황 작 ‘도산서원도’(부분). 

이제 겸재의 또 다른 그림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를 살펴보자. 간송 소장본의 부채 그림으로 선비가 소매에 넣고 다니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그림인 것 같다.

후세에 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선 것이겠지만 본래 공간인 도산서당과 강학공간인 도산서원, 제향 공간인 상덕사(尙德祀)가 단아하게 그려져 있다. 앞 너른 개울가에는 지금과는 달리 개울갓길이 이어지고 서원은 개울길에서 오르도록 비스듬히 길이 이어져 있다. 요즈음 우리가 다니는 산허리를 자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 서원으로 이르는 개울가 양옆으로 우뚝한 바위 운영대(雲影臺)와 천연대(天淵臺)는 그림의 격을 높여 준다.

 

서원 오르는 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도산서원 평면도.

앞에서 보았듯이 퇴계는 1557년(명종 12년) 도산 남녘 기슭에 도산서당을 짓고 강학 장소로 삼았다. 1570년 70세로 세상을 떠나자 4년 뒤인 1574년(선조 7년) 제자들이 서원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1575년 서원을 짓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아 명실상부 이 지역의 대표 사원이 되었다.

도산서원이 이 지역의 중심지이면서 조선 성리학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다녀가는 이들도 많고 이들이 남긴 글이나 그림도 여럿 전해진다. 퇴계와 문답을 주고받은 고봉 기대승도 이곳을 다녀갔는가 보다.

고봉속집 제1권 존재만록(存齋謾錄) 속에 있는 도산서당(陶山書堂)

작은 집 이루어지자 편안하기 쉬움을 알겠으며 容膝堂成審易安
질그릇 바가지 상차림이 얼굴빛 기쁘게 하네 陶匏登案足恰顔
소요하며 해 마치니 무엇을 일삼는고 優遊卒歲知何事
형상은 방원에 있고 물은 쟁반에 있도다 象在方圓水在槃

(기존 번역 전재)

그림으로는 겸재, 강세황, 김창석과 작가를 알 수 없는 도산서원도가 전해지고 있어 도산서원의 정확한 옛 모습을 아는 데 어려움은 없다. 글로는 퇴계 자신이 쓴 도산잡영과 성호사설 해동잡록, 그 밖에 여러 문집에 기록들이 남아 있다.

겸재의 도산서원도를 이해하기 위해 한두 편의 글은 살펴보자.

우선 도산잡영 병서를 보자. 퇴계가 서당을 연 지 4년 되는 해에 쓴 글이니 계상정거도와 도산서원도 사이 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글이다.

영지산(靈芝山) 한 줄기가 동쪽으로 나와 도산(陶山)이 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산이 두 번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산이라 이름하였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옛날 이 산중에 질그릇을 굽던 곳이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따라 도산이라 한다” 하였다. 이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으며 그 골짜기가 넓고 형세가 뛰어나며 치우침이 없이 높이 솟아, 사방의 산봉우리와 계곡들이 모두 손잡고 절하면서 이 산을 빙 둘러싼 것 같다. 왼쪽에 있는 산을 동취병(東翠屛)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것을 서취병(西翠屛)이라 한다. 동취병은 청량산(淸凉山)에서 나와 이 산 동쪽에 이르러서 벌려 선 품이 아련히 트였고, 서취병은 영지산에서 나와 이 산 서쪽에 이르러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았다.

동취병과 서취병이 마주 바라보면서 남쪽으로 구불구불 휘감아 8, 9리쯤 내려가다가, 동쪽에서 온 것은 서쪽으로 들고 서쪽에서 온 것은 동쪽으로 들어 남쪽의 넓고 넓은 들판 아득한 밖에서 합세하였다. 산 뒤에 있는 물을 퇴계라 하고, 산 남쪽에 있는 것을 낙천(洛川)이라 한다. 퇴계는 산 북쪽을 돌아 산 동쪽에서 낙천으로 들고, 낙천은 동취병에서 나와 서쪽으로 산기슭 아래에 이르러 넓어지고 깊어진다. 여기서 몇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물이 깊어 배가 다닐 만한데, 금 같은 모래와 옥 같은 조약돌이 맑게 빛나며 검푸르고 차디차다. 여기가 이른바 탁영담(濯纓潭)이다. 서쪽으로 서취병의 벼랑을 지나서 그 아래의 물까지 합하고, 남쪽으로 큰 들을 지나 부용봉(芙蓉峰) 밑으로 들어가는데, 그 봉이 바로 서취병이 동취병으로 와서 합세한 곳이다.

처음에 내가 퇴계 위에 자리를 잡고 시내를 굽어 두어 칸 집을 얽어서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하였는데, 벌써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옮겼으나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가슴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산 남쪽에 땅을 얻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골이 있는데, 앞으로는 강과 들이 내려다보이고 깊숙하고 아늑하면서도 멀리 트였으며, 산기슭과 바위들은 선명하며 돌 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서 참으로 수양할 곳으로 적당하였다.

어떤 농부가 그 안에 밭을 일구고 사는 것을 내가 값을 치르고 샀다. 거기에 집 짓는 일을 법련(法蓮)이란 중이 맡았다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죽었으므로, 정일(淨一)이란 중이 그 일을 계승하였다.

정사년(1557, 명종12)에서 신유년(1561, 명종16)까지 5년 만에 당(堂)과 사(舍) 두 채가 그런대로 이루어져 거처할 만하였다.

당은 모두 세 칸인데, 중간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으니, 그것은 주 선생(朱先生)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동쪽 한 칸은 암서헌(巖棲軒)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운곡(雲谷)의 시에,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했으니 바위에 깃들여 작은 효험 바라노라”라는 말을 따온 것이다. 그리고 합해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사는 모두 여덟 칸이니,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 관란헌(觀瀾軒)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합해서 농운정사(隴雲精舍)라고 현판을 달았다.

 

정우당 연못 비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서당 동쪽 구석에 조그만 못을 파고 거기에 연(蓮)을 심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하고, 또 그 동쪽에 몽천(蒙泉)이란 샘을 만들고, 샘 위의 산기슭을 파서 암서헌과 마주 보도록 평평하게 단을 쌓고는, 그 위에 매화, 대(竹), 소나무, 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


당 앞 출입하는 곳을 막아서 사립문을 만들고 이름을 유정문(幽貞門)이라 하였는데, 문밖의 오솔길은 시내를 따라 내려가 동구에 이르면 양쪽 산기슭이 마주하고 있다. 그 동쪽 기슭 옆에 바위를 부수고 터를 닦으니 조그만 정자를 지을 만한데, 힘이 모자라서 만들지 못하고 다만 그 자리만 남겨 두었다. 마치 산문(山門)과 같아 이름을 곡구암(谷口巖)이라 하였다.

여기서 동으로 몇 걸음 나가면 산기슭이 끊어지고 바로 탁영담에 이르는데,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가 마치 깎아 세운 듯 서서 여러 층으로 포개진 것이 10여 길은 될 것이다. 그 위를 쌓아 대(臺)를 만들었더니, 우거진 소나무는 해를 가리며, 위에는 하늘 아래에는 물이어서 새는 날고 고기는 뛰며 물에 비친 좌우 취병산의 그림자가 흔들거려 강산의 훌륭한 경치를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이름을 천연대(天淵臺)라 하였다.

그 서쪽 기슭 역시 이것을 본떠서 대를 쌓고 이름을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 하였으니, 그 훌륭한 경치는 천연대에 못지않다.

(중략)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16) 동지에 노병기인(老病畸人)은 적는다.


(*글의 양이 많아 원문은 생략합니다. 원문이 필요하신 분은 退溪先生文集卷陶山雜詠 幷記 검색 바랍니다. 기존 번역을 전재합니다)

다음은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도산사(陶山祠)를 방문한 기록을 보자. 겸재보다 50년 정도 앞선 인물이니 겸재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가 전날에 도산사(陶山祠)를 방문할 때 온계(溫溪)를 지나는데 온계사(溫溪祠)가 있었으니, 이는 퇴계 선생의 선고(先考) 진사(進士)와 종부(從父) 승지(承旨)와 형 대사헌(大司憲)을 제향하는 곳으로, 그 의의는 나라의 계성묘(啓聖廟)와 같은 것이다. 다시 작은 산기슭을 거쳐 먼저 애일당(愛日堂)을 지나게 되었는데, 곧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살던 곳으로 분강사(湓江祠)가 있으며, 여기서 말머리를 돌려 왼쪽으로 달려간 바 비로소 도산(陶山)에 이르렀으니, 시내 위와의 거리는 5리쯤 된다. 시내 위란 곧 선생의 본댁인데, 이를 퇴계(退溪)라 이르는 것이다. 동쪽 상류(上流)는 하나의 산이 가로막혀 마주 바라볼 수는 없으나, 산과 물이 서리고 돌았으며 시냇물을 임하여 마을이 되었는데, 산은 영지산(靈芝山)의 한 가닥이고, 물은 황지(黃池)에서 발원(發源)한 것이다.

또한 산은 청량산(淸凉山)에서부터 뻗어 내려 물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다가 영지산 줄기와 더불어 하류에서 합쳤으니, 이른바, ‘동-서의 두 취병(翠屛)이라’는 것이며, 선생이 손수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일으켰는데, 후인들이 잇달아 서당 뒤에다 서원(書院)을 세운 것이다.

 

제향 공간인 상덕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내가 말에서 내려 단정하게 공수(拱手)하고 외문(外門)에 들어서니, 서쪽에는 동몽재(童蒙齋)가 있는데 어린 선비들이 학문을 익히는 곳이고, 다시 진덕문(進德門)을 들어서니, 좌우로 재실(齋室)이 있는데 동쪽이 박약재(博約齋), 서쪽이 홍의재(弘毅齋)였다. 서남쪽을 향하여 강당(講堂)을 지었는데, 편액(扁額)을 ‘전교(典敎)’라 하였고, 그 서쪽 마루는 ‘한존(閒存)’이라 하여, 재임(齋任)의 우두머리가 살던 곳이었다. 원노(院奴)를 불러 서원의 바깥 정문을 열어 보니, 사당에는 상덕사(尙德祠)라는 세 글자의 액호가 걸려 있었다. 배궤(拜跪)하는 절차를 다 물은 후에 조심스레 들어가니, 원노가 남쪽 창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뜰 아래서 경건히 배알하고 걸어서 서쪽 댓돌을 거쳐 몸을 굽히고 문턱 밖에 서서 사당의 제도를 차례로 살펴보니, 다만 왼쪽으로 조 월천(趙月川: 조목/趙穆의 호)을 배향하는 신위(神位)만 있었다.

다시 서쪽 담을 통하여 작은 문이 있고, 담 밖에는 두 채의 집이 있는데, 하나는 술 곳간이고, 하나는 제기(祭器)를 간직하는 곳이었다. 빨리 걸어 홍의재(弘毅齋)에 이르렀다. 홍의재 뒤에 방이 있는데 이것이 곧 유사방(有司房)이다.

이른바 서당이란, 선생이 스스로 마련한 것이므로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이라도 감히 옮기거나 바꾸지 않아, 짧은 담, 작은 사립문, 작은 도랑이며, 모난 연못들이 의연히 감상을 돋우어 주었다.

집은 다만 3간으로서 동쪽이 마루, 서쪽이 부엌이고 한가운데다 방을 들였는데, 방을 완역재(玩易齋), 마루를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여 이것을 통틀어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고 한다. 마루 동쪽에는 반 칸을 달아서 마루와 통하는 사다리를 놓아 청사(廳舍)를 만들었는데, 마치 지금의 와상(臥人牀) 모양과 같았으니, 이는 한강(寒岡)이 선생의 유의(遺意)를 받들어 만든 것이었다. 연못은 정우(淨友), 문은 유정(幽貞)이라 하여 싸리를 엮어 만들었고, 뜰 왼편에서부터 산밑에 이르기까지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숲을 이루어 모두 한 아름씩은 됨직한데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이라고 한다.

 

도산서원 앞 시사단 정경.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방안의 서쪽과 북쪽 벽에는 모두 벽장이 있고, 벽장은 각각 두 층으로 되어 있어 유물(遺物)들을 간직하였는데, 곧 선기옥형(璿璣玉衡)의 도구 한 벌과 책상, 등잔대, 투호(投壺)가 각각 하나, 화분대(花盆臺), 타구(唾具)가 각각 하나, 벼룻집이 하나였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벼루는 부랑배들에게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또 청려장(靑藜杖) 하나가 갑(匣) 속에 간직되어 있는데, 그 마디가 짧아서 마치 학(鶴)의 무릎과 같았다.

동쪽에는 한 개의 들창을 내어서 이것을 들면 마루와 통하였고, 남쪽에도 작은 창문을 내었는데, 창 안에는 시렁을 가로 매었고, 그 위에 베개와 자리 등 옛 물건을 두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 방이 누추하고 헐었지만 감히 고치지 못하는 것은 선생의 손때가 벽(壁)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한다.

뒤에 한 원장(院長)이 방백(方伯)에게 말하여 두꺼운 종이를 구해다가 모두 말끔하게 도배하였으므로 지금은 한 글자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림(士林)들이 회의를 열어 서원 문적에서 그 원장의 이름을 삭제하고는 지금까지도 그를 기롱하고 폄(貶)한다고 한다.

다시 걸어서 동쪽 기슭으로 올라 1백 보가량 가니, 천연대(天淵臺)가 있는데 서쪽 기슭의 천운대(天雲臺)와 같이 우뚝 마주 서 있었고, 물은 질펀하게 흘러내렸으며, 그 앞에는 탁영담(濯纓潭)고 있었지만, 본기(本記)에 나타난 것은 생략한다.(원문 생략. 기존 번역 전재합니다)


이제 도산서원을 뒤로하고 서원 입구 길로 돌아 나온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을 알리는 안내석이 서 있다. 공자님의 노(魯)나라, 맹자님의 추(鄒)나라 같이 유학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의 말이다. 이제는 퇴우(退尤)화첩 속 다른 그림을 찾아 나설 시간이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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