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2호 윤지원⁄ 2022.04.25 18:20:54
“살면서 어찌하다 화상을 만나 응급실에 온 순간부터 그분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여정 중에, 눈을 감는 날까지, 그 전체 과정에 함께하는 재단이다.”
사회복지법인 한림화상재단 홈페이지에 소개된 사업 항목을 보면 5개 카테고리, 14개 사업 및 프로젝트로 분류되어 있으며, 각각의 사업과 항목은 더 세부적인 캠페인, 교육과정 등으로 쪼개진다. 한림화상재단이 하는 일은 정말 많았다. 황세희 재단 사무과장의 저 말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용어부터 정리한다. 황 사무과장의 설명에 따르면 한림화상재단이 지원하는 대상은 화상 ‘환자’만이 아니라 화상 ‘경험자’ 전체다. 상당수 화상 환자는 치료가 끝나도 화상을 입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매우 어렵고, 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황 사무과장은 "미국은 ‘번 서바이버’(burn-survivor)라고 한다. 미국도 초기 저널에선 ‘번 빅팀’(burn-victim) 즉 희생자라고 썼지만, 미국의 문화인지 언젠가부터 빅팀이 아닌 서바이버,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남아 준 생존자로 봐 준다. 그래서 한림화상재단도 오랜 고민을 통해 발굴한 용어가 ‘화상 경험자’"라고 설명했다.
이어 "화상 환자는 경험자다. 나처럼 병원에서 매일 환자들과 함께 하는 의료사회복지사도 경험자다. 17년 동안 그분들의 경험을 계속 같이 고민하고 있으니까. 그분들을 돌보는 가족도 경험자다. 그 모든 분들이 한림화상재단의 지원 대상이다"라고 강조했다.
화상 경험자는 ‘희생자’ 아닌 ‘생존자’
황 사무과장은 화상 경험자를 지원하는 국내 유일 사회복지법인 비영리 기관인 한림화상재단의 모든 살림을 이끌어 간다. 그는 또 한림대학교한강성심병원의 사회사업팀 팀장이기도 하다. 사회복지사 생활을 한 지 24년, 그중 이곳에서 화상 경험자들을 도우며 지낸 것이 17년째라고 하니 2008년 설립된 사회복지법인 한림화상재단의 모든 역사를 함께 한 산 증인이기도 하다.
"한강성심병원은 현재 화상 치료 병상(157병상)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병원이다. 예전부터 지방에서도, 또 아시아 저소득국가에서도 치료가 어려운 화상 환자들이 ‘도와달라’ 요청하고, 다른 쪽에서는 ‘우리가 도와주겠다’ 손 내미는 기업이나 기관들이 많았다. 그런데 한림화상재단이 생기기 전에는 우리가 병원이다보니 기부금 영수증 발급이 안 됐고, 그래서 기업들이 도와주고 싶어도 쉽게 돕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있었다. 한강성심병원에는 2003년부터 직원들이 월급 일부를 기부하는 ‘한림후원회’라는 화상 환자 후원회가 조직됐었다. 이 기금이 커져 7000만 원 정도 됐을 때 우리는 '독립된 사회복지법인을 만들면 지원 범위를 한강성심병원 환자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지구촌 화상 경험자로 확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2008년에 재단을 설립하게 됐다."
한림화상재단은 2007년부터 우리나라의 화상 관련 사회복지사업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대만,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교류해오고 있다. 한림화상재단의 사업은 화상 관련 사회복지사업이 일찌감치 시작된 이들 나라의 사업 모델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2003년 이전 국내엔 아예 화상 환자를 돕는 자원이 없었는데, 2008년 재단 설립을 통해 기부자를 많이 만나면서 적어도 국내에는 치료비가 없어서 화상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 체계를 만들었다.
전 생애에 걸친 세심한 지원
2009년 무렵은 우리나라가 외국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그해 재단은 “우리도 지구촌에서 사회적으로 받은 도움을 그대로 돌려줘 보자”라며 아시아 저소득국가 화상 무료 진료 사업, 또 어려운 아이들, 현지에서 치료가 곤란한 아이들을 초청하는 수술 지원 사업 등을 시작했다.
2012년에는 미국의 대표 화상재단인 ‘피닉스 소사이어티’와 인연을 맺었고, 그때부터 재단도 세세한 지원 프로그램들을 도입하게 됐다.
현재는 환자가 화상 사고로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 입원하는 순간부터 수술을 받고 입원과 퇴원의 반복된 치료를 받고, 재활 치료를 하고, 외래로 통원 치료를 받게 되는 대략 2~3년의 시기, 이후 그들이 아예 통원조차 하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가정으로, 직장으로 복귀하는 적응 시기. 거기서 더 나아가 그들이 자립하고, 사회에 재통합되기까지 전 과정을 지원하고 있다.
황 사무과장은 "국내에서 화상으로 입원하는 환자가 연간 2천 명에 달한다"라며 "화상으로 입원하게 된 환자가 갑자기 눈을 뜨고 자기 상황을 보면 말 그대로 ‘외상 후 트라우마’ 상황에 ‘멘붕’ 상황이다. 몸은 아프지, 가렵지, 피부는 울긋불긋하지, 통증은 심하지, 매일 무서운 치료를 받아야 하지, 피부는 매번 뗐다 붙였다 해야 하지, 또 치료비는 어마어마하게 비싸지,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나?"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공간(한림화상재단)은, 그런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만나는 곳이다. 그들의 통증을 어떤 시기에 어떻게 해서 줄여줄 수 있나, 이 시기에 가족들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등 대부분의 서비스가 그들이 필요로 한 경험에 근거한 것들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황 사무과장이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 하나는 각계각층의 여러 기부자를 만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기부자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화상 경험자들의 목소리를 잘 청취해야 한다. 이에 재단은 다섯 명의 화상 경험자들을 포커스 그룹으로 선정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서 화상 경험자들로부터 ‘화상 후 벽을 뚫고 나오는 시간’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화상을 겪기 이전의 사람이 화상을 겪은 뒤 고통의 시간과 치료, 재활의 시간을 거치고, 화상을 겪기 이전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비슷하게라도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각각의 화상 경험자에게 그 시간은 다 달랐기에, 이들은 다섯 사람의 평균 시간을 계산해봤다.
"7년. 무려 7년이 나왔다. 너무 놀랐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 재단의 목표는 이들이 ‘벽을 뚫고 나오는 시간’ 7년을 3년으로 줄여주는 것이 됐다. 그게 우리 재단의 1단계 미션이다. 7년 걸릴 것을 3년으로 단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황 사무과장의 말이다.
나의 아픈 경험이 다른 이의 힘이 되도록
한림화상재단은 화상 환자 가족에 대해서도 지원한다. 또한, 화상을 겪은 어린이는 소아 그룹, 근로 현장에서 다친 환자들은 해당 그룹, 유가족이 생기면 유가족 그룹 등 각각의 그룹별 서비스도 체계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화상경험전문가’라는 자립 지원 모델을 만드는 사업을 시도하고 있다. 화상 경험자가 이 특별한 경험을 통해 사회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도록 소정의 교육과 파견 활동을 통해 소득을 창출하는 체계를 만들어 23명의 화상 경험 전문가를 배출했다.
화상 경험 전문가들 중 9명은 ‘화상 경험 코디네이터’로 양성했다. 이들은 화상 전문 의료, 간호, 사회복지 등 총 96시간의 교육을 수료한 국내 최초의 화상 돌봄 전문가로, 지난해부터 지역사회로 파견되어 수도권 환자의 케어는 한강성심병원과 한림화상재단이, 지역사회 환자는 이들 화상 경험 코디네이터가 각각 커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황 사무과장은 화상과 트라우마 치료 과정에서 경험자들과의 공감대가 매우 의미가 크고, 동반자로서 함께 성장하는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화상 경험자 중에 입원 치료를 하는 동안 캘리그래피를 열심히 연습하시고, 치료를 마친 뒤 캘리그래피로 본격적인 작업 활동을 하는 분이 계시다. 올해(2022년) 몸짱 소방관 달력 패키지에 적힌 캘리그래피 문구가 그분 작품이다."
이어 그는 "최근 일터에서 전기화상을 입은 젊은 남자 환자가 있었다. 오른쪽 팔 부위가 크게 절단됐고, 환자가 매우 절망했다. 이 환자분이 오른손잡이였는데, 이젠 어쩔 수 없이 왼손잡이가 되야 했고, 일단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하고싶어 했다. 그래서 담당 의료사회복지사가 캘리그래피를 하시는 화상 경험자를 떠올려 이 환자분께 소개시켜줬고, 이후 이 환자는 왼손으로 글씨 쓰는 법과 함께 캘리그래피도 배우고 있다. 이처럼 화상 경험자가 화상 환자를 서로서로 돕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고, 의료 전문가들이 하는 역할을 넘어 이들이 동반자로 함께 갈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갖춰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황 사무과장에 따르면 화상을 극복한 과정에 도움을 받았던 화상 경험자들 중에는 변화와 극복에 대한 동기가 크고, 자신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림화상재단은 이런 동기를 가진 일부 화상 경험자들을 선발해 미국에서 열리는 화상 경험자들의 자 글로벌 학회 행사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는 "이분들이 학회에 갈 때 화상 흉터를 가리려고 마스크와 머플러를 칭칭 감고, 팔에 토시를 차고, 모자를 쓰신다. 그런데 막상 거기에 가서, 이 넓은 세상에 자신보다 더 심한 화상 경험자들이 학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고는 변하셔서 귀국하는 길엔 다 벗어버리고 그냥 들어온다"라고 일화를 소개했다.
몸짱 소방관 달력, 페이스 이퀄리티
그리고 메타버스
한림화상재단의 여러 활동 중 대중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업으로 ‘몸짱 소방관 달력’ 사업이 있다. 한림화상재단,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GS리테일, 에셈컴퍼니, 투핸즈, 오중석 사진작가 등 여러 기업, 기관 및 개인이 협업하여 진행하는 이 사업은 2014년에 시작되어 올해 달력까지 8년 동안 진행 중이다. 달력 판매 수익금과 기부금으로 8년간 총 8억 8000여만 원이 한림화상재단에 기부되어 209명의 화상 환자에게 지원됐으며, 이 프로젝트에 연대하는 개인 및 단체는 지난해 연말 제1회 대한민국착한기부자상을 다 함께 수상하기도 했다.
몸짱 소방관 달력 사업은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이하 서울소방본부)가 매년 개최하는 ‘몸짱 소방관 선발대회’ 입상자들이 화보 사진을 찍고, 이를 달력으로 제작해 그 판매수익을 기부하고자 했던 것이 그 시작이다. 2014년 서울소방본부는 1500부의 달력을 들고 한림화상재단을 찾아왔다. 황 사무과장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소방관분들이 이러한 달력을 만들었으니 팔아서 기부하겠다고 찾아오셨길래 일단 얘기를 들어 보다가 ‘두 번째 인연’이라는 말을 하게 됐다. 화재 현장에서 화상 환자들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사람이 소방관이다. 그것이 첫 번째 인연인데, 그때는 워낙 급박한 상황이니까 인사도 나누지 못한다. 그런데 또 이렇게 기금을 모아 화상 환자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니 이것이 두 번째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업을 함께 하게 됐다."
첫해에는 서울소방본부가 직접 홍보를 했지만 판매 채널이 마땅치 않아 소방재난본부와 한림화상재단에서 일일이 전화로 대응해서 1500부를 모두 판매했다. 다음 해부터는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국내 여러 유통 기업 사회공헌팀에 메일을 보냈고, GS의 사회공헌 담당 부서와 인연이 닿아 2016년도 달력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GS샵(현재는 GS리테일)은 유통에 기여하면서 사전 제작비도 연 4000만 원씩 기부하며, GS홈쇼핑 방송에도 수수료 없이 노출한다.
한림화상재단은 또 화상 안면 손상 등에서 야기되는 편견과 차별을 없애고자 하는 페이스 이퀄리티 캠페인(Face Equility Campaign)에 협력하는 전 세계 NGO 연합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는 등 사회의 인식 개선을 위한 활동도 폭넓게 전개하고 있다.
아울러 사회 구조적으로 화상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도록 화상 안전에 관한 수많은 콘텐츠를 만들고 관련 캠페인을 진행한다. 서울시가 매년 개최하는 ‘안전 한마당’에 10년 가까이 참여하며 화상 안전 캠페인을 진행하고, 화상 경험자의 자립 모델 중 하나로 화상 안전 강사도 양성하여 전문 강사로 도움이 필요한 곳에 파견하고 있다.
최근에는 비대면 소통 채널로 메타버스 환경을 구축하기도 했다. 한림화상재단은 최근 메타버스 서비스 플랫폼인 ‘게더타운’에 어린이화상병원을 열고, 진료 관련 업무 및 간단한 진료 상담, 어린이화상병원의 온라인 수업, 화상 경험자들의 지지그룹 활동 등을 비대면으로 할 수 있게 했다.
메타버스 사업에 관해 황 사무과장은 "코로나19로 다른 기관은 올 스톱이 됐을 때 한림화상재단의 비대면 채널은 더 활성화됐다. 화상 환자는 원래 밖에 잘 안 나오고 병원까지 와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게 어려워서다. 오히려 코로나19로 줌(Zoom) 같은 비대면 채널이 활성화되니 화상 경험자들은 더 환영하는 분위기였고, 전국에서 환자들이 참여하고자 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모일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의 필요성이 더 커졌다. 또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을 잃은 분들이 아바타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기는 것도 장점으로 여겨져서 메타버스 플랫폼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메타버스 어린이화상병원에 현재까지 펼쳐놓은 콘텐츠도 있지만, 우리 재단이 하고있는 모든 서비스를 원 소스 멀티 유즈로 활용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일단은 새로운 디지털 서비스를 확대하기보다 기존에 우리가 쌓아온 콘텐츠들을 메타버스 공간에도 쌓는 노력에 집중하면서 다양한 시도들을 해보고 있다"라고 밝혔다.
< 문화경제 윤지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