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4호 윤지원⁄ 2022.05.19 15:40:30
탄소중립은 인류 생존을 위해 미룰 수 없는 글로벌 과제다.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탄소중립을 위해 매일같이 각종 선언을 뿌려댄다. ESG경영의 기치를 걸고, 탄소 중립을 선언하고, RE100에 가입하고… 그러나 이 선언들이 왠지 공허한 구호에 그치는 것 아닌가 불안하다. 기업들의 세부 실천 목표와 그 성과가 잘 보이지 않는 데다 목표와는 반대되는 수치가 나오곤 해서다. 이에 우리 기업들의 탄소중립 현주소를 짚어본다.
글로벌 투자자, 국내 기업에 ‘탄소 감축 방안’ 묻다
기업들이 장차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탄소중립을 비롯해 대기오염물질 배출의 글로벌 기준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쉽게 말하면 지금 글로벌 시장에서는 환경 문제가 심각해져 그 자체로 높은 무역장벽이 되고 말았다. ESG경영, RE100(Renewable Energy 100, 재생에너지로의 100% 전환), 넷제로(NET ZERO, 6대 온실가스 순배출 0) 같은 핵심 실천 과제를 실현해내지 못하는 기업은, 수많은 기업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글로벌 경제의 흐름 속에서 혼자 살아나갈 수 없다.
2015년 파리기후협약은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미만으로 억제하고, 1.5℃를 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목표로 채택했다. 2021년이 그 시행 원년이었다.
기후협약을 이행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탄소국경조정세와 같은 각종 규제를 빠르게 도입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를 포함해 세계 각국의 정부 및 지방정부, 각종 기관, 단체, 기업들이 앞다투어 2050년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발표하고 이행해 나가고 있다.
탄소중립 목표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무시할 경우 탄소배출 규제 기준이 강화되는 데 따르는 비용 및 손실이 커지는 것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국제 교역 무대에서도 도태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
약 850조 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글로벌 연기금 운용사 APG(All Pension Group)이 지분을 소유한 기업들의 탄소 감축 방안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APG는 유럽 최대 연기금인 네덜란드 공적연금을 운용하는 글로벌 투자업계의 큰손이다. 그런 APG가 올해 초 정기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기업 10곳의 경영진에게 서한을 보내 각 사의 구체적인 탄소 감축 전략의 적절성을 검토하고 그 내용을 주주들에게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APG가 꼽은 10개 기업(FOCUS 10)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SK, 현대제철, LG화학, 포스코케미칼, 롯데케미칼, SK텔레콤, LG유플러스, LG디스플레이 등이다.
서한에서 APG는 “회사가 보다 전향적이고 혁신적인 탄소배출 감축에 대한 선언과 실행방안을 준비하고 있다면, 이번 정기주주총회를 전후하여 발표하실 것을 건의드린다”라며 질의 및 제안 5가지를 언급했다. 지난 5년간 탄소배출 감축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보는지, 이 이슈에 대해 장기투자자들과 충분히 소통하며 조언을 듣고 있다고 보는지 등이다.
큰손 투자자인 APG가 기업들에 이러한 요구를 한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투자자로서 자산가치의 하락을 우려하기 때문이며, 탄소 중립은 연금 수탁자들, 즉 고객이 원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APG가 국내 10개 기업을 꼽은 이유는, 이들 기업들의 기후 대응 노력이 비슷한 글로벌 위상을 가진 다른 기업은 물론이며 일본, 인도 등 다른 아시아 국가의 기업들보다 부족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국내 대기업의 탄소 배출 현주소
삼성전자는 IT 제조업체로서 경쟁하고 있는 애플과 비교해 온실가스 배출량이 엄청나게 많다. 2020년 매출액 대비 탄소배출량은 삼성이 8.7%, 애플이 0.3%으로 거의 30배 가까이 높다.
SK그룹의 경우 여러 자회사가 지난해 RE100에 가입했다. 하지만 탄소중립의 정확한 시기나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ESG 경영 관련 정보의 공개 수준도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연간 매출 기준 국내 100대 기업 가운데 기업 보고서를 통해 탄소 배출량을 공개하는 기업은 54개 기업이다. 조선일보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 기업의 지난해 탄소 배출량은 총 1억 3605만 톤. 전년의 1억 3064만 톤보다 4.1%, 절대량으로는 541만 톤 더 많아졌다.
2년에 걸쳐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와 보복 소비 등에 의한 경기 회복의 사이클을 거치면서 지난해 국내 주요 기업들의 공장 가동률이 큰 폭으로 상승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0년 8월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산라인인 평택2라인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지난해 탄소 배출량이 전년 대비 11% 증가했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탄소 배출량이 전년보다 4.6% 늘어난 518만 톤에 달했다.
롯데케미칼, 여천NCC, 효성티앤씨 같은 석유화학업계는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각각 48%, 64%, 66% 급증하면서 탄소 배출량 증가의 큰 몫을 차지했다.
적극적인 주주행동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한 APG 입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탄소 중립 목표를 이행 못할 경우 발생하는 손해를 염두에 둘 것이며, 이런 부정적인 데이터를 결코 좌시할 리 없다.
APG 관계자에 따르면 유럽의 연금 가입자들은 기후위기로 글로벌 재난이 닥쳐온다면 가입한 연금을 받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에 환경 이슈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따라서 이들의 연금을 운용해 수익을 내야 하는 APG가 고객의 관심사를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업이 기후 문제에 소홀하면 투자자는 그에 따른 손해를 고려할 뿐 아니라 연금 가입자의 이탈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영국의 연금 펀드인 대학교원연금(USS)의 가입자들은 이 펀드 경영진이 계속해서 석탄에 투자를 하고 기후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난해 10월 이들을 고소했다.
APG는 한국전력이 국내외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에 투자하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지적해도 개선이 없자 지난해 1월 모든 보유지분을 매각했다.
APG는 또 전 세계의 여러 투자 기관들이 소속된 ‘기후행동 100+’(Climate Action 100+)에도 가입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2050탄소중립위원회에 석탄발전소 퇴출을 요구했으며 윤석열 정부에도 이와 관련한 서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내년부터 EU 탄소국경세가 시행된다. 유럽 시장에 소홀해도 상관없는 기업이 아니라면 구체적인 탄소배출 감축 방안이 이미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지난해에 증가한 국내 주요 기업들의 탄소 배출량이 과연 내년까지 드라마틱하게 줄어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 문화경제 윤지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