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0호 안용호⁄ 2022.08.17 18:07:11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 공동체 문제를 다뤄 예술계의 큰 관심을 모았던 기획초대전 ‘올 어바웃 러브’에 이어, 아르코미술관이 또 하나의 대형 전시를 선보인다.
8월 11일부터 10월 23일까지 개최되는 ‘땅속 그물 이야기’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과기술융합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국내외 아티스트, 큐레이터, 콜렉티브(예술 집단)가 함께하는 융복합 예술 페스티벌이다.
이번 전시는 디지털 기반 예술 창작 환경과 세계관을 웹3.0의 탈중앙화 네트워크와 땅속 그물망인 근균 시스템에 비유하여 온오프라인이 융합된 하이브리드 전시로 구현된다. 또한 이번 전시가 제시하는 ‘세계짓기’(worlding)를 통해 그동안 인간이 대상으로만 여겨왔던 비인간, 사물, 자연 등을 대상이 아닌 인간과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동일체로 인식하는 예술적 세계관을 투영한다.
지난 1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임근혜 아르코미술관 관장은 “지구상의 모든 나무와 나무를 연결해 주는 곰팡이는 지구, 생태계의 신경망이다. 곰팡이의 세계는 탈중앙화하고 있는 인간의 네트워크 체계, 뇌의 신경망과도 닮았다”며 “이번 전시는 오랜만에 해외 작가들도 국내에 들어와 함께 참여한 뜻깊은 전시로, 온라인 전시도 함께 병행되어 언제 어디서나 작품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는 케이켄(Keiken), 혼프(HONF) 등 해외 콜렉티브와 돈선필, 황선정, 업체eobchae 등 국내 작가들이 참석, 직접 자기 작품을 설명해 전시의 이해도를 높였다.
관람 동선의 시작인 제1전시실 초입에서는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란계 쿠르드인 작가 모레신 알라야리의 ‘미지의 것을 보는 그녀: 아이사 콴디샤’를 만난다. 이번 전시에서 미지의 것을 바라보는 첫 시점처럼 작용하는 이 작품은 이란의 신화에 나오는 정령과 관련된 작업이다.
아이샤 콴디샤는 이슬람권에서 가장 경외시하는 정령으로 신화에서 ‘여는 자’이자 ‘파괴자’로 등장한다. 아이샤는 남성을 정복할 때 자기 신체를 연다고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남성으로부터 정서적 학대를 겪은 여성과 여성성을 지닌 자들의 집단적 경험을 아이샤의 힘과 신들림이라는 의식을 통해 재구성한다. 특히 작가는 비서구 여성의 분노에 초점을 맞추어 가려지거나 배제된 이들의 눈물을 주목한다.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나타샤 톤테이의 ‘와아낙 위뚜 와뚜’는 인간과 암석의 상호작용 또는 관계를 다룬다. 작가는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미나하사반도에 사는 종족인 미나하사족과 지리적 존재로서 암석의 관계를 다루는 픽션, 신화, 우주론을 탐구하며 암석의 미래를 인간의 삶 안에서 숙고한다.
현실에서 탈주하여 사변적 세계를 이야기하고 근미래의 현실을 예견하는 ‘변이 세계(Mutant World)’는 제2전시실의 테마이다. 이 공간은 기술에 의해 증강된 의식과 그물망처럼 확장된 자아, 합성과 변형을 거쳐 생성된 변이종의 세계를 보여준다.
피규어 형태의 입체 조형물 ‘사족보행 스테이션’과 영상 ‘잠꼬대와 대화하면 안 된다’를 통해 만나는 돈선필 작가의 작품 세계는 ‘특촬’(특수촬영)이라는 독특한 영상 장르의 작동 구조를 통해 고해상도 리얼리티 풍경을 비평한다. 작가는 현실을 표현하는 첨단 기술 대신 오히려 현실의 제약을 수용하며 리얼리티를 보존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돈선필 작가는 “기본이 4K인 고해상도 시대에서 그래픽디자이너나 콘텐츠를 창작하는 이들은 내용을 채우기 위해 현실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며 첨단 기술에만 의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큰 비용과 노력이 발생하지만 감동과 놀라움은 오히려 줄고 있다”며 고해상도 과잉 시대의 강박적 리얼리티를 비판했다.
멕시코, 일본, 유럽, 유대계 등 다양한 디아스포라적 배경을 공유하는 콜렉티브 케이켄은 영화, 게임, 설치, 확장현실(XR), 블록체인, 퍼포먼스와 같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가능한 미래의 모습을 실험한다. 이번 전시에서 케이켄은 ‘Uxkme'과 ‘형태형성의 천사들과 버블 이론’이라는 작품을 선보인다.
VR, 라이트박스, 영상으로 구성된 케이켄의 작품은 미래 기술과 시뮬레이션이 우리의 의식을 형성시키는 방식을 보여준다. 영상에는 500년 후의 미래를 살아가는 인간 ‘천사’들이 등장해 시뮬레이션 테라피를 제공하는 자율주행 자동차 게임을 플레이하며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영상은 이를 통해 마음의 에너지가 어떻게 교차·확장·중첩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케이켄은 “이 작품은 우리 몸이 얼마나 먼 미래까지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긴 프로젝트의 첫 시작이다”라며 “앞으로 VR·영상 등을 통해 에피소드를 계속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변이 세계의 마지막 관문에는 김나희, 오천석, 황휘로 구성된 오디오-비주얼 프로덕션, 업체eobchae의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영상 ‘AMAEBCH’, 아크릴로 만든 조형물 ‘업체코인 브레드크럼’ 중 아크릴 조형물은 보이지 않는 데이터로만 존재했던 가상화폐를 실물로 구현해 눈길을 끈다.
아르코미술관 스페이스필룩스(1F)에 마련된 ‘지하의 정원’은 모두가 연결되어 서로 다른 종의 세계와 함께 형성해나가는 관계를 지향하는 이번 전시의 함의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콜렉티브 혼프의 작품 ‘잉선’이 전시되어 있다. 철 구조물, 전자회로, 비디오 등으로 설치된 ‘잉선’은 인간과 다른 존재와의 연관성을 다룬다. 또한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고대 자바의 신화 속 1,000개의 사찰로 구성된 6개의 신전 중 3개를 따와 설치했다는 ‘잉선’은 쌀의 신, 바다의 신, 미래 여신, 인생 전체를 상징하는 반얀트리, 영적인 힘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삶의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잉선’은 고요한 새벽, 벼가 자라는 논에서 들리는 미세한 소리를 닮은 사운드를 전시장 안에 공명시킨다. 관련해 혼프는 “벼는 논의 진흙 속 박테리아를 통해 에너지를 얻고 쌀을 생산하는데, 이 사운드는 박테리아의 에너지를 상징한다”며 “자바 전통 철학에서 흙이 만들어내는 사운드, 여러 원소를 통해 하나의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화, 과학, 기술이 결합한 ‘잉선’은 고대 철학의 지식이 현대에 어떤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땅속 그물 이야기’는 오프라인 전시와 온라인 가상 전시관이 함께 운영된다. 온라인 전시는 뉴아트시티(newart.city/world/arko-festival-2022)에서 감상할 수 있다.
아르코미술관 2층 아카이브 라운지의 ‘균사체의 정원’은 온라인 전시 뷰잉룸이다. 이곳에서는 근균 곰팡이의 생장 특징에 따라 구성한 마이크로 세계가 펼쳐진다. 관람객은 스스로 미세한 포자가 되어 땅속 그물망으로 연결된 가상공간을 탐험한다. 온라인 가상공간 전시는 예술가 창작 집단 PACK.(팩), 게스트 큐레이터, 필자의 긴밀한 협업으로 이루어진 공동창작의 산물이다.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김윤익 PACK. 대표는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세계관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인간·도시와 대상화된 숲·바다·곰팡이 등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이 결국 홍수와 같은 극단적인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관계망을 만들고 있는 것 아니냐”며 “균사체의 정원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균사체로 대변되는 자연과 인류가 자연을 즐기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정원을 합쳐 자연과 기술을 연속적인 대상으로 볼 수 있는 전시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통곰팡이균류의 정원, 자낭균류의 정원, 담자균류의 정원 등 총 4개로 구성된 온라인 전시는 우리가 몰랐던 곰팡이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 대상화된 자연이 아닌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자연을 직관할 수 있는 디지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다중의 관점이 얽히고 혼합된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땅속 존재들은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지구 생명체와 연합해 살고 있다. 이번 전시는 관객에게 이 존재들이 내뿜는 생성의 에너지를 다양한 관점과 표현 방식, 매체 등을 통해 전한다.
한편 아르코미술관은 '디지털 아트 페스티벌, 타이베이'와 협업해 9월 30일부터 10월10일까지 온라인 전시 및 스크리닝 프로그램을 동시에 선보일 예정이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