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백악산(白岳山)은 북악산(北嶽山)의 옛 이름이다. 이름도 우뚝한 북악산과 청와대가 실로 54년 만에 우리들 품으로 돌아왔다. 1968년 김신조 무리가 자하문을 넘어온 후 청와대야 그 이전부터 막혀 있었지만 북악산마저 막혀 접근은 물론 그 방향으로 사진도 찍기 어려운 시간이 오래 계속되었다.
북악산 기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필자와 친구들은 토요일 등교 때면 깡통과 나무젓가락을 들고 와야 했다. 4교시 땡 끝나면 깡통과 나무젓가락을 들고 북악산 기슭을 오르내리며 송충이(흰불나방 애벌레)를 잡아 깡통에 채워야 했다. 태종실록에도 ‘벌레가 백악산 솔잎을 갉아 먹았다(蟲食白岳山松葉)’고 했는데 우리 학창시절에도 매 한가지였다.
10대 한창 나이에 송충이 잡기가 무슨 재미가 있었겠는가. 북악산 기슭을 오르내리며 놀다 보면 깡통은 채우지 못하고 독사 같은 ‘맹 가’(죄송스럽지만 우리는 훈육주임? 맹 선생님을 그렇게 불렀다)였던가에 혼찌검이 나기 일쑤였다. 돌이켜 보면 북쪽 천리마운동 비슷한 맨몸으로 때우기 식이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던 북악산은 그저 먼 곳에서 바라만 볼 수 있던 산이 되었다. 다행히 노 대통령 시절 한양도성 순성길에 북악산 마루금 능선길이 열리니 큰 기쁨이었다. 또 문 대통령 시절, 범접도 못했던 지선(支線)길이 몇 군데 열렸다. 이제 윤 대통령 시대가 되면서 그렇게 기다리던 청와대도 우리에게 돌아왔다. 다행히 이제는 겸재 그림 길 중 공란(空欄)으로 비워두어야 했을 금강산과 청와대 주변 그림 중, 청와대 주변을 그린 그림들은 그 현장을 이렇게 갑자기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금강산도 어느 날 예고 없이 열릴 것이다’라는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겸재가 청와대 주변을 그린 그림들은 주로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전하는데,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장동팔경첩(壯洞八景貼) 여덟 그림인 자하동(紫霞洞), 청송당(聽松堂), 대은암(大隱巖), 독락정(獨樂亭), 취미대(翠微臺), 청풍계(淸風溪), 수성동(水聲洞), 필운대(弼雲臺) 중 대은암, 독락정, 취미대가 청와대 구역에 해당되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장동팔경첩 여덟 그림, 즉 취미대, 대은암, 독락정, 청송당, 창의문, 백운동, 청휘각(晴暉閣), 청풍계에도 마찬가지로 대은암, 독락정, 취미대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은암동록(隱岩東麓)과 백악산(白岳山)을 포함하면 청와대가 열림으로써 우리에게 돌아온 그림은 대은암, 독락정, 취미대, 은암동록, 백악산이 되는 셈이다. 오늘은 청와대 경내의 그림들은 놓아 두고 백악산으로 간다.
백악산이 팔 뻗은 용산
백악산과 청와대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백악산(북악산) 산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산줄기들은 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간 것인데, 강원도 식개령에서 갈라져 한강의 북쪽을 내닫는 산줄기가 한북정맥(漢北正脈)이다.
한북정맥이 흘러 와서 도봉산을 지나고, 우이령에서 올려쳐 상장봉으로 치닫는데, 한 줄기가 서남으로 흐른 것이 북한산이 된다. 다시 북한산의 남쪽 봉우리 보현봉이 형제봉과 보토현을 지나고 북악 연봉의 구준봉(狗蹲峰)을 지나 고개든 산이 북악산(北岳山)이다.
북악은 서울의 주산(主山)이며, 북한산은 서울의 조산(祖山)이다. 이 두 산을 중심으로 주변 산들이 서울을 에워싸고 있다. 북한산-아차산-관악산-덕양산(행주산성)을 외사산(外四山, 바깥쪽 산 4개)이라 하여 서울을 외각에서 호위하는 산이다.
한편 북악을 중심으로 작게 서울을 에워싼 낙산-인왕산-목멱산(木覓山: 남산)이 내사산(內四山, 안쪽 산 4개)인데, 조선이 건국돼 한양으로 천도할 때 이런 한양의 풍수가 여러 모로 중시되었다.
조선의 한양은 이 내사산을 이어서 성(城)을 쌓고 수도로 삼아 600년 도읍을 이어갔다. 그 중심 산이 북악산이다. 조선의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과 창덕궁은 모두 이 북악산 품에 자리 잡았다. 그러면 이제 윤 대통령이 이른바 용산으로 집무실(과거 기준으로 보면 법궁)을 옮겨 갔으니 북악산과는 관련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북악산은 좌로는 팔을 벌려 타락산(駝酪山, 낙산)으로 이어지고, 우로는 인왕산으로 이어지는데 인왕산은 다시 두 줄기로 갈라져 남산과 안산(鞍山)을 만든다. 남산의 한 줄기가 이태원을 지나 서남쪽으로 갈라져 한강으로 내달으면 둔지산(屯之山)이 된다. 이곳이 바로 윤 대통령이 자리 잡은 곳이다. 안산의 한 줄기는 다시 팔을 벌려 만리재를 넘고 공덕동 뒤 언덕을 만들면서 남으로는 원효로를 품고 북으로는 마포를 품으면서 번개표 빌딩 앞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이 산줄기가 바로 용산(龍山)이다. 우리가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이라 부르는 까닭은 아마도 그 지역이 용산구에 속하다 보니 그리 부르는 것 같다.
그런데 땅의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용산이라 하는 것은 뭔가 거북하다. 그건 그렇다 하고 둔지산과 용산 산줄기 사이로는 이제는 땅 속 물길이 되었지만 만초천(蔓草川)이 흐른다. 왜인 시절에는 이름도 빼앗겨 욱천(旭川)이라 불린 날도 있었다. 사실 우리는 욱(旭)이라는 글자를 지명이라든가 고유명사에는 그다지 쓰지 않는다. 혹시 주변에 그런 이름이 있으면 일제강점기 때에 창지개명(創地改名)된 것이 아닌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 만초천에 참게가 참 많았다고 한다. 한강변 길을 걷다 보면 땅 속으로 물이 흐르는 무서운 터널을 만나는데 햇볕을 잃은 만초천의 모습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 괴물이 사는 곳이다. 이도 다 북악산의 자식들이다. 이제 겸재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북악 올라 기쁨과 슬픔에 잠긴 정약용
이제까지 필자가 만난 겸재의 북악산 그림은 네 점이다. 북악산이 다른 대상물의 배경으로 등장하거나 더 나타날 가능성을 기대하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우선 백악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이 두 점, 부아악(負兒岳) 한 점, 백악부아악(白岳負兒岳) 한 점 이렇게 네 점이다.
먼저 겸재가 직보(直甫)를 위해 그린 그림을 보자. 그림 좌측 제발에는 ‘겸재사여직보(謙齋寫與直甫: 겸재가 직보에게 그려 주다)’라는 설명이 있다. 최완수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직보는 한성부 서윤(庶尹: 판윤과 좌우윤을 보좌하던 종사품 벼슬)을 지낸 김정겸(金貞謙: 1709~1767)의 자(字)라 한다. 김정겸은 영의정을 지낸 김수흥의 손자이니 장동 김문(金門)의 한 사람으로, 겸재에게는 가벼이 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림은 백악산 모습만을 담고 일체의 주변 경관을 담지 않았다. 지금은 청와대가 된 경복궁 후원의 빈터나 주변 이어진 산줄기도 담지 않고 아침 이내 속에 가려진 듯 땅 위에 뜬 형태로 북악산만 강렬하다. 바위는 인왕제색과는 달리 백악(白岳)이 상징하듯 희게 그려 두드러지고 그 사이 골은 작은 나무들을 작게 그려 명암이 뚜렷하다.
눈에 띄는 것은 우측 기슭에 오리의 부리 같은 모양의 바위 모습이다. 최완수 선생은 오리 부(鳧) 자 부암(鳧岩)이라는 이름도 소개하였는데 겸재 자신은 부아암(負兒岩: 아기 업은 바위)이라 불렀다. 본래 모습도 군더더기 없이 우뚝한 산이지만 이 그림에서는 더욱 우뚝하여 선비의 기개가 보인다.
여기에서 북악에 올랐던 다산(茶山)의 시 한 수 읽고 가련다.
북악에 올라(登北嶽)
서북에 층층 쌓은 성 푸른 산 빛 누르고 西北層城壓翠微
일곱 선왕(先王) 좋은 기운 대궐로 모여드네 七陵佳氣入彤闈
(백악은) 철령에서 나뉘어 천리를 달려오고 山分鐵嶺行千里
용문에서 물길 갈라 경기 땅이 나뉘었네 水割龍門作兩畿
멋진 새 누대엔 꽃 또렷하고 新貴樓臺花的的
볕 밝은 궁터에는 풀이 무성하구나 正陽宮殿艸霏霏
어지럽다 이백 년간 있었던 일이 紛紜二百年來事
오랑캐처럼 서로 다투니 어찌 시비만 있나 蠻觸交爭孰是非
아마도 다산은 우뚝한 북악에 올라 멋진 국정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층층 쌓은 성벽과 아마도 일곱 임금님을 낳으신 임금의 어머니 사당 칠궁(육상궁)을 보며 선왕들의 좋은 기운(佳氣)도 그려 보았고,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철령(鐵領)을 넘어 백악까지 이른 도도한 산줄기도 그려 보고, 용문산 줄기 아래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뉜 경기도 땅도 생각났나 보다. 그러다 불현듯 임진란 이후 갈라져 파당을 지은 나랏일이 떠올라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하다. 노론 세상에서 남인으로 살아야 하는 다산의 아픔도 보인다. 백악에서 내려다보는 경복궁의 빈 터는 또한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청와대 동쪽과 본관 앞에서 그렸을 두 점
두 번 째 그림 역시 겸재의 백악산이다. 같은 제목의 다른 그림인데 이 그림은 먼저 직보에게 그려 준 그림과는 달리 지금의 청와대 동쪽 골짜기에서 그렸다. 필자의 산길 물길 지도의 물줄기 3에 해당하는 물길이니, 지금의 청와대 상춘재 앞 물길에서 그린 것이다. 앞에 보이는 초막(草幕)은 아마도 독락당(獨樂堂)이리라. 그 위쪽으로 보이는 바위는 대은암일까? 앞 산기슭에는 부아암이 실물과는 다르게 남근석처럼 우뚝하다. 겸재 특유의 과장법이다.
이제 만날 겸재의 두 그림은 아예 부아암(負兒岩)을 그린 것이다. 하나는 부아암, 다른 하나는 백악부아암(白岳負兒岩)이다. 부아암이라 이름 붙인 그림은 앞 그림 백악산에서 부아암 부분을 확대한 그림의 성격이라 달리 살필 필요는 없다. 백악부아암은 상당히 시적(詩的) 느낌을 준다. 그림은 지금 청와대 본관 마당 쯤 되는 곳에서 뒷산 북악산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그렸다.
백악산 아랫녘은 연무에 쌓여 있다. 그러다 보니 백악산은 구름 위에 뜬 신선의 세계가 된다. 앞마당 둔덕 바위 위에는 두 선비와 사동 한 명을 그렸다. 두 선비는 방금이라도 구름 속으로 떠나려는 신선 같다. 아마도 취미대(翠微臺) 위 인 모양이다. 계절은 봄인지 백악산 아래 작은 나무들에는 여린 잎이 나오는 순간 같다. 겸재의 네 그림 중 가장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는 그림으로 보인다.
이곳 백악 아래에서 살았던 또 한 사람의 시 한 수 읽고 가자. 칠궁(七宮)께가 그의 집이었던 청음 김상헌이다. 청나라로 이송되어 구금 생활하던 청음이 집을 그리며 쓴 시 ‘근가십영’(近家十詠: 집 가까운 곳 열 곳을 읊다) 중 한 수다.
공극산의 둥근 봉 천태산에 비교되니 拱極員峯應天台
높은 구름 못 넘어 나는 새도 돌아가네 高雲不度飛鳥廻
어느 누가 우러르며 좋은 이름 붙여 줬나 誰其仰止配佳名
천하의 재사이신 운강 학사 그분이네 雲岡學士天下才
임금 가마 때때로 경회루에 납셨더니 龍輿時出慶會池
천암만학 앞 다투어 기이함을 바치누나 千巖萬壑爭效奇
나의 집은 바로 그 산 아래 있는데 吾家住在此山下
생각사록 그립구나 어느 날에 돌아갈꼬 願言思之何日歸
이상은 공극산(拱極山)을 읊은 것이다. - 공극산은 북악(北岳)이다.
(기존 번역 부분 수정)
중국 사대주의 담은 산 이름 공극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리움을 담았다. 산이 높아 나는 새도 돌아간다는 시구를 지으며…. 북악산은 고려 시대에는 면악산(面岳山), 조선시대에는 백악산과 북악산이라 했는데 낯설게도 북악산을 공극산(拱極山)이라 하고 운강학사(雲岡學士)를 기리고 있다. 그는 누구였으며 공극산은 무엇이었을까?
중종 32년(1537년)명나라 사신이 명 황태자의 탄생을 알리러 오게 되었다. 그때 명 사신이 한림원 수찬으로 있는 운강(雲岡) 공용경(龔用卿)이었다. 조선에서는 혹시라도 꼬투리 잡힐까 전전긍긍하였고 글 잘하고 인품 있는 소세양(蘇世讓)이 접빈의 책무를 맡았다. 다행히 분위기는 좋았고 글 잘 하는 공용경에게 대궐에서 바라보이는 산 이름도 작명을 청하여 받으니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 백악산은 공극산(拱極山)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필운대, 필운동은 이 일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러면 공극산은 무슨 뜻일까? 공(拱)은 두 손을 맞잡는 공손한 자세다. 극(極)은 북극성이다. 단순히 보면 북극성 앞에 두 손을 맞잡고 공손히 허리 굽히는 것인데 북극성은 하늘에 제왕이니 비견하면 명나라 황제는 북극성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산 아래에서 산 장동 김씨는 구지 백악산을 공극산이라고 불렀다. 청음이 그렇고 곡운이 그렇고 삼연이 그랬다. 인조 이후 서인, 영조 이후의 노론에게 절대가치는 주자(朱子)와 명(明)나라였다.
이제 다른 그림으로 가 보자. 북악산을 그린 화인(畵人)은 물론 겸재만이 아니다. 김득신의 북악산도는 북악의 동쪽인 삼청동 방향에서 비교적 원경으로 그렸는데 북악산 주봉(主峰) 아래 성벽 길 능선 위 청운대와 원경으로 구준봉도 그려져 있다. 그 뒤로는 멀리 삼각산의 위용이 우뚝하다. 아래로는 삼청동으로 보이는 마을이 아스라하다.
그밖에 엄치욱의 백악산도도 전해진다. 구도는 김득신과 마찬가지로 삼청동에 가까운 동쪽에서 그렸다. 역시나 청운대와 구준봉이 보인다. 북악산 내리막 기슭에는 부아암을 비롯하여 바위들이 우뚝하다. 산의 능선은 모두 부드럽고 볼륨감이 있다. 어찌 보면 육감적이기도 하다. 디테일이 상당히 섬세하여 바위의 위치와 형태도 실물에 가깝고 이어지는 성벽도 위치가 정확하다. 수원 화성 공역에 참가했고 의궤를 그리는 화인이라 정확성이 특출해 보인다.
마지막 궁중 화가가 애달프게 그린 경복궁
마지막으로 접할 그림은 심전(心田) 안중식의 백악춘효(白岳春曉: 백악산의 봄 새벽)이다. 1915년 작품이라 한다. 이 해는 일제가 경복궁에서 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산업박람회)를 열기로 하고 경복궁 건물을 철거하기 시작한 해이다. 조선 말기의 궁중 화가로서 그는 필사의 힘을 들여 마지막 경복궁 모습을 담았다. 광화문과 궁궐 건물 그 뒤 북악산, 북악산 뒤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북한산 보현봉까지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이제 열린 북악산으로 산행 길을 떠나 보자. 산행이라 하기보다는 트레킹이란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필자가 올려 놓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여러 코스가 열려 있어 몇 번에 나누어 가면 좋은 코스가 된다. 산길은 물론이지만 물길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북악산에는 두 개의 큰 물길이 있다. 서(西)로는 백운동천 계곡 물길이다(번호 1). 이 물길은 창의문 위에서 시작하여 경복궁역 앞을 지나고 종침교회 앞으로 해서 동아일보 앞 청계천으로 들어간다. 청계천의 발원수인 셈이다.
또 하나 큰 물길은 백악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삼청동을 지난 후 동십자각 앞 중학동을 지나 청계천 모전교로 빠지는 물길이다(번호 4).
북악산에는 또 작은 물길 두 개가 있다. 청와대 담 서쪽 작은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청송당(경기상고)과 경복고를 지나 효자동 골목길을 통과한 후 경복궁 경회루 연못으로 들어가는 물줄기이다(번호 2).
이제는 모두 지하로 흐르는 물이 되어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하나 물길은 청와대 안에 있다. 청와대 동쪽인 은암동록 앞 상춘재와 녹지원 옆 물길이다(번호 3). 이 물길은 겸재의 그림을 파악하는 데 랜드마크가 된다.
이제 산길을 가 보자. 필자는 그간 한양순성길 코스를 다니느라고 성벽을 끼고 가는 코스만 다녔는데 최근에는 다양한 코스를 다녀 보고 있다. 우선 기존의 순성코스는 창의문에서 와룡공원까지 오든지, 삼청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이 있다. 반대로 길을 걸어도 마찬가지다. 고도 342m 산이다 보니 많이 벅차지는 않다. 특히 친구나 가족과 가는 길은 행복하다. 342m 정상에 오르면 정상석이 기다리고 있다. 눈 밝은 이라면 정상 평평한 바닥에 깨진 기왓장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태조 때부터 백악산단에 제사를 올렸다(有事于白岳山壇). 가뭄이라도 오래 되면 나라에서는 영험한 이곳 신께 기우제도 드렸다(行祈雨祭于木覓山 白嶽山 漢江 三角). 이 기왓장은 백악신사의 흔적이리라.
성벽 길에는 1968년 김신조 무리가 도망칠 때 생긴 총탄 자국이 선명한 김신조 소나무도 있고 성 돌에 새긴 조선 시대 장인들의 글씨도 남아 있어 시간을 머금고 있다. 촛대 바위에는 일제강점기에 박은 쇠막대를 빼낸 아픔도 있고 오행을 맞추기 위해 만들되 사람 출입은 금했던 숙정문도 만난다.
청와대 외벽 길의 만세동방 약수터
새로 개방된 길은 청와대의 외벽을 끼고 도는 코스가 인기있다. 옛 프레스 센터인 춘추관에서 오르는 길, 칠궁에서 오르는 길도 있고, 삼청동에서 오르는 길에는 법흥사 터도 지난다. 이렇게 오르면 청와대에서 시작하여 경복궁을 지나 서울 사대문 안이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이고 멀리는 서울 주변 산들이 와락 다가온다.
이 길에서 꼭 보아야 할 곳이 만세동방(萬歲東方) 약수터이다. 조금의 수고로움이 필요하지만 범상치 않은 북악산 속 각자(刻字)를 만나고 정성스레 파낸 옹달샘도 만난다. 임금께서도 드신 물이라던가.
각자는 “萬歲東方 聖壽南極(만세동방 성수남극)”이다. 해서체로 반듯하고 격조 있는 글씨는 일반 개인이 편히 쓴 글씨는 아니고 내용 또한 개인이 복을 비는 내용도 아니다. 필자의 생각대로 윗글을 읽어 보면,
“만세에 뻗어 나갈 동방 조선이여, 임금님 수명은 남두성(南頭星)처럼 오래 사십시요”라는 의미일 것이다. 경복궁이 세워지고 임금이 이 산 아래에서 사실 때 새긴 것은 아닐까? 발원의 내용이 유교적이지 않고 도교적 또는 민간신앙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궁궐의 내실에서 민간신앙을 행하는 자를 통해 궁궐의 주산인 북악에 새긴 것은 아닐까?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아마도 고종의 수명을 빈 발원문일 것 같다.
또 지난해 새롭게 열린 코스로는 북악산 북측 창의문에서 백사실 가는 길 중간에 출입할 수 있는 코스가 있다. 상당히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길이다. 모두 전에는 청와대를 경비하던 군인들의 주둔지였다. 꽃 피거나 단풍든 날 가보시기를. 그런데 아직도 아쉬운 점은, 길은 지정된 코스로만 이어질 뿐 대부분 지역은 아직도 철망과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는 것이다. 겸재의 그림 속 바위를 찾거나 어딘가에 있다는 각자(刻字)를 찾아갈 수 있는 때는 언제가 될까?
계곡선생집에서 삼각산과 백악산과 목멱산에 기도를 올린 글(三角白岳木覓祈禱文) 제문(祭文)을 찾아 읽으며 백악산을 줄인다. 다음 차는 청와대 안이다.
한양 수도에서 각자의 덕 발휘하며 藩都配德
신령스런 그 힘 빛나고 빛나기에 赫赫厥靈
나라에 큰 재앙 일어날 때면 國有大災
온갖 제물 아끼지 않아 왔지요 靡愛斯牲
자성전하 환후 위독하시어 慈聖疾篤
서울과 지방 모두 황급해하니 中外遑遑
원컨대 음덕(陰德)을 내려 주시어 願賜陰騭
속히 건강 되찾게 하여 주소서 亟躋平康
(기존 번역 전재)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