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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시인의 그림 ②] 형형색색의 새는 ‘데미안’ 속 ‘아브락사스 새’인가

유럽 전통에 없는 ‘시서화(詩書畵) 함께’를 구사한 헤세의 그림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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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이상면 편집위원(연극영화학 박사)⁄ 2022.10.05 16:28:51

그림 그리는 헤세, 1919년.

◆헤세의 그림 – 그 시작은 언제일까?

한국 독자들에게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4년)의 작품들은 <데미안>을 비롯하여 <싯다르타>, <지성과 사랑>, <황야의 이리> 같은 소설과 많은 서정시들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가 그림을 그렸다는 것도 이젠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소박하면서 산뜻한 색감을 지닌 헤세의 수채화들은 국내 여기저기서 열린 전시회를 통해 알려졌고, 많은 팬들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헤세는 과연 언제부터, 어떤 이유에서 그림을 그렸을까? 그의 그림들이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즉 힐링을 위해 그려졌다고는 하지만, 좀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헤세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헤세와 그림’의 시작과 진전에 대해 더 알고 싶을 수 있다. 필자 역시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었기에, 앞으로 ‘헤세와 그림’을 설명하는 연재 기사들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문제에 대해 답해 보고자 한다.

헤세의 자회상(1917년).

헤세는 제1차대전(1914~19년) 시기에 내외적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앞서 모친이 떠난 후 부친이 1916년 세상을 떠났고,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베르놀리는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막내아들 마틴도 발병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즈음 제1차대전을 일으킨 독일에서는 참전과 애국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서 헤세는 평화를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가 언론과 주변 사회에서 “전쟁 반대자, 병역기피자, 조국 배신자” 등으로 비난받았다.

사실, 헤세는 당시 30대 중반 나이로서 전쟁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스위스 베른에서 상이군인을 돌보는 병원에서 일하며 전쟁 보조적인 업무를 수년간 수행했고, 또 전쟁 포로들에게 보내는 신문/잡지들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 이렇게 분명 오해가 포함되었지만, 헤세는 당시 독일 사회로부터 ‘反민족적인 작가’로 낙인찍혀 작품 발표와 출판이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심히 고통 받았다.

 

◆ 심리 분석과 미술 치료 – <꿈 그림>

꿈 그림, 1917년.

이렇게 가족 문제들과 사회적 오해와 비난으로 인해 헤세는 1910년대 중후반 무렵에 극심한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 그는 20대 중반 이후 꾸준히 소설과 시집을 발표하면서 이제 30대 후반의 젊은 작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가정과 사회로부터 커다란 문제들이 다가온 것이었다. 당시 자살 충동마저 느낄 정도로 고뇌를 겪은 헤세는 1916~17년 스위스 루체른의 병원에서 요셉 베른하르트 랑(Josef Bernhard Lang) 박사에게서 심리 치료를 받았다.

랑 박사는 저명한 심리학자 칼 G. 융(Carl G. Jung)의 제자로서 심리 치료에 미술을 활용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고, 헤세에게 꿈에 나타난 것들을 그려보라고 권했다. 이런 ‘꿈 그림들’(Traumbilder)과 더불어 헤세는 꿈에 나타난 것들을 글로 남기는 작업도 병행했다. 소위 <꿈 일기>(1917~18년)를 쓰며 꿈에 대해 기록하고, 스스로 그 의미를 분석하기도 했다.

심리적으로 괴로운 시기에는 악몽을 꿀 수 있고, 가위눌림도 경험할 수 있으므로, 랑 박사는 환자가 적극적으로 그림을 통해 이런 심리적 압박들을 파헤치고 풀어나가도록 하는 방법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방식은 20세기 후반 ‘미술 치료’ 혹은 ‘미술 테라피’라고 불리게 된다.

이렇게 헤세는 30대 후반에 닥쳐온 정신적 위기의 시기에 심리 치료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꿈 그림들’은 훗날 베른 시립미술관이 편찬한 도록에 보존되어 있어 살펴볼 수 있다. 이 그림들은 헤세가 병적인 시기에 남긴 그림들이란 점뿐 아니라, 훗날 문학 작품들과도 연관이 있기에 주목해 볼 만하다.

<꿈 그림들>은 단순한 방법으로 그려졌는데, 헤세는 색분필이나 색연필로 그리거나, 펜화에 채색을 하고, 또 간단한 수채화를 시도했다. 이 그림들은 꿈속의 무의식 세계를 표현한 것이므로, 무엇을 그렸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헤세 자신의 내면 심리상태가 불안하고 무기력함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그림 1, 2)

꿈 그림 1. 1916~18년, 무제, 펜.
꿈 그림 2. 1916~18년, 무제, 펜-수채-과슈.

그런데, 그림 3(1917년)에서 보이는 새는 특이하다. ‘꿈의 정원에서의 새’란 제목의 채색 펜화로, 수탉 혹은 꿩의 몸통에 다채로운 공작새 꼬리를 지닌 새가 나무 아래 덤불 속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꿈 그림 3. 1916~18년, 무제, 펜-수채.

헤세의 <꿈 일기>(1917년 8월 4일)에 의하면, “나는 길가의 덤불 속에 반쯤 몸을 숨기고 있는 새 한 마리를 보았다. … 형형색색의 커다란 꼬리를 지닌 그 새는 아름답고 화려했다”고 쓰여져 있다. 이것은 바로 이 꿈 그림의 새를 말하는 것이며, 후에 쓰인 문학 작품들과 연관성이 있다.

우선, <데미안>(Demian, 1919년)에는 세상 속으로 뛰쳐나오려는 새과 알의 비유가 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알을 깨고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황금빛 머리의 새매 그림을 보내고, 데미안은 다음과 같은 메모를 보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그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데미안> 중)

‘꿈의 정원에서의 새’는 알을 깨고 태어나 닭의 머리를 하고 아브락사스 신에게 날아가고자 하는 새의 형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 후에 쓴 동화 <픽토르의 변신>(1925년)에서 이런 새는 다시 나타난다. 작품 속에서 다채로운 새는 주인공 픽토르가 들어선 낙원의 숲에서 여러 색깔 빛을 발하는 꽃으로 변한 후, 다시 나비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선명한 붉은 색이 빛나는 수정으로 변화된다. 새 모티브는 <싯다르타>(1922년)에도 나오고, 노년의 작품들에서도 ‘생의 행복’을 상징하며 나타나기도 한다.

1925년에 쓴 동화 '픽토르의 변신'에 그려진 새. 

◆ 괴상한 자화상


심리 치료를 받던 시기에 헤세는 자화상을 연필 스케치들과 수채화로 그렸다. 그런데 이때 자화상들은 매우 기이한 모습이다. 당시에 괴로웠던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 같고, 여러 모로 붕괴된 자아를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자화상들에서는 대부분 가슴 위와 얼굴 모습이 정면 시각에서 그려졌는데, 표현주의 화가들의 넘치는 주관적 감정 표현을 연상시킨다.

자화상(1919년). 수채. 

1919년에 그린 자화상에서 시가를 입에 물은 헤세의 왼쪽 얼굴은 오른쪽과 달리 매우 암울하고, 양눈은 초점 잃은 듯 퀭하고, 흰색 와이셔츠는 턱 바로 밑까지 올라와 얼굴을 압박하는 듯 하고, 불그스레한 왼쪽 귀는 삐죽이 올라가 있다. 이 귀는 마치 빈센트 반 고흐가 자해를 해서 잘라진 귀를 연상시킨다. 좀 섬뜩한 느낌이 내포된 자화상이고, 한 마디로 ‘일그러진 자화상’들이다. 정신적 고통과 인생의 고뇌 속에서 헤세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실, 헤세가 이 당시의 정신적 위기를 넘기며 1919년 봄 이후 스위스 몬타놀라로 이사한 다음에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고, 다른 화가들이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었기에, 이 시기에 그려진 헤세의 자화상들은 특정한 의미에서 돌아볼 수 있다.

◆ ‘글과 그림’의 병행 – 그림 엽서, 시와 그림 / 헤세의 시서화(詩書畵)

이렇게 살펴볼 때 헤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를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헤세에게 어려웠던 시기에 시작된 그의 그림들 가운데에는 한 가지 특징을 더 볼 수 있다. 그것은 ‘글과 그림’의 병행이다. 헤세는 일생동안 수많은 작가와 지인-친구들과 수많은(약 4만 통)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1917년 이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편지나 자그마한 엽서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곁들여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보낸 엽서 한 곳에는 삽화처럼 그림이 실려 있기도 하며, 또 동화에는 자신의 그림들을 글 옆에 포함시키기도 했고, 시 옆에 그림을 곁들여 시집을 마치 시화집(詩畫集)처럼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글과 그림의 병행 작업은 일생동안 계속되었다.

이처럼 ‘글과 그림’이 같이 동반된 것은 서양 작가들에서 매우 드문 경우인데, 오늘날 개념으로 말하자면, 헤세는 ‘텍스트와 이미지’(text & image)의 결합을 선보였다고도 할 수 있다. 더욱이 그의 ‘그림엽서’들은 꼬불꼬불 쓰인 그의 펜글씨에다가 한 조각 그림이 같이 있는 형태로서, 과거 동양에서 시-서-화가 병행되던 문화와도 상통한다.

그림을 곁들인 엽서. 1918년.
그림을 곁들인 엽서. 1918년.

 

그림을 곁들인 엽서. 1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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