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3호 김금영⁄ 2022.10.11 17:26:41
오랜만에 찾은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건물 내부를 걷다 보니 명품매장들 사이 곳곳에 예술 작품들이 설치돼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천경자 작가의 작품 ‘정’을 비롯해 미술관에서도 보기 힘든 근대 작품이 다양하게 설치돼 눈길을 끌었다. 롯데백화점 본점을 비롯해 동탄점, 인천점에서 열리는 ‘구상 미술’ 테마의 ‘재현과 재연’전 현장 풍경이었다.
롯데백화점 본점이 중후한 느낌이었다면, 잠실점은 분위기가 반전됐다. 이전에도 잠실점 롯데갤러리 ‘아트홀’을 많이 찾았었는데, 마치 첫 방문 같이 색달랐다. 기존에 갤러리를 채우던 새하얗고 눈부신 조명은 온데간데없이 칠흑같이 까만 입구가 떡하니 자리했다.
동굴을 탐험하듯 안에 들어가니, 야광 작품이 까만 공간에서 별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이어 화이트큐브(흰 벽으로 이뤄진 전시 공간)로 분위기가 반전되나 싶더니, 마지막엔 거대한 영상작품이 공간을 압도했다. 10월 3일까지 열린 TV, 컴퓨터 등의 새로운 기술을 예술적 표현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뉴미디어 아트’전이었다.
이처럼 각각의 개성이 돋보이는 다양한 전시의 중심엔 김영애 롯데백화점 아트콘텐츠실 실장(상무)이 있다. 김 상무는 지난해 9월 롯데백화점이 신설한 아트비즈니스실(현 아트콘텐츠실)을 이끌고 있다. 백화점을 방문한 사람들로부터 “백화점에서 이런 전시도 열어?”라는 흥미로운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 아트콘텐츠실은 현재 롯데백화점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나요?
“롯데백화점 본점과 잠실, 동탄, 인천터미널, 광주 등 전국 5개 점포의 롯데갤러리 내의 전시를 기획할 뿐 아니라 호텔, 식음료 등 롯데의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마케팅, 고객 경험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하나의 주제 아래 전시를 기획하더라도 백화점 각 지점마다 전시가 특색 있게 꾸려지는 점이 인상 깊었는데요.
“각 지점마다의 특색을 고려해 전시를 기획합니다. 잠실점 에비뉴엘은 약 100평 규모의 큰 전시 공간을 활용해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기 좋아요. 본점은 롯데의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곳이에요. 다만 화이트큐브 형태의 갤러리 공간이 없어, 백화점 곳곳에 하나하나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설치해 관람객의 주목도를 높이고 있어요.
MZ세대가 주로 찾는 동탄점은 젊은 감각의 개성 있는 전시를 주로 선보입니다. 인천점 갤러리는 문화센터와 같은 층에 있는데, 문화센터에 들렀다가 갤러리를 찾는 어린이 관객이 많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직접 색칠하거나, 만져볼 수 있는 체험형 전시를 주로 마련하는데 반응이 좋아요.”
- 올해 롯데백화점이 선보인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여성의 날을 맞아 진행한 ‘리조이스’ 테마 전시와 공예를 앞세운 ‘공예, 낯설게 하기’전이 있었습니다. 각각의 프로젝트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성과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리조이스는 기존에 롯데백화점이 여성의 꿈과 도전을 응원하는 취지로 진행해 왔던 캠페인이에요. 취지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과 연계해 여성 이슈를 다루는 8개 전시를 롯데백화점 각 지점에서 선보이며 규모를 키웠습니다.
전시 기획 초기엔 전시명에 리조이스를 넣는 것을 사람들이 반대하기도 했어요. 사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프로그램의 이름이 전시회 이름이 된다는 게 어색하다고요. 하지만 전시가 좋으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전시의 취지에 공감하고 의미 있게 봐줬어요. 덕분에 리조이스와 롯데갤러리의 인지도 모두 높아졌죠.
공예 전시는 리빙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어요. 7~8월 미술계에서 공예 분야 공모전 및 시상식이 다양하게 열리는데, 이 시기에 맞춰 공예를 내세운 전시를 열면 사람들의 흥미를 더 자극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어요. 디자인 요소가 중요한 백화점의 특성과도 잘 맞았고요.”
- 5월 진행한 롯데아트페어도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롯데백화점이 처음으로 진행한 아트페어였죠. 특히 부산에서 진행한 점이 눈길을 끌었어요.
“부산은 제게 익숙한 곳이었어요. 아트부산을 비롯해 최고경영자 모임 등 다양한 VIP 대상 프로그램을 몇 년 동안 진행해 평균 한 달에 한번은 꼭 부산을 방문했어요. 덕분에 문화예술에 대한 부산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대형 시립미술관과 한두 곳의 대형 갤러리 이외엔 문화예술을 다양하게 접할 콘텐츠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어요.
또, 부산은 롯데에게도 홈그라운드와 같은 특별한 곳이었어요. 그룹 창업주인 고(故) 신격호 총괄회장이 일본 유학 전 20대 청년 시절을 부산에서 보냈고, 1968년 롯데제과 부산 거제동 출장소 설립을 시작으로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 창단과 백화점·호텔 설립을 활발히 이어갔죠. 현재 20개 넘는 계열사가 부산 지역에 진출해 있을 만큼 롯데는 부산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지점이 맞닿아 부산에서 첫 아트페어를 기획했어요. 특히 앉을 자리도 없이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아니라, 예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고급스러운 느낌을 바랐는데, 롯데 계열사인 시그니엘 호텔과의 협업이 도움이 됐어요. 호텔에서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형태로 진행됐습니다.
일반적인 아트에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공예와 디자인을 주요 테마로 내세우는 등 단순 아트페어가 아닌 다양한 예술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습니다. 특히 단색화 거장 박서보와 이탈리아 리빙 브랜드 알레시가 협업해 만든 한정판 와인 오프너, 그리고 ‘물방울 화가’ 故(고) 김창열과 덴마크 오디오 브랜드 뱅앤올룹슨의 협업 작품 등을 처음으로 공개해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롯데가 처음 여는 아트페어이다보니 처음엔 우려도 있었고, 복잡한 과정도 있었지만, 다행히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사람들에게 ‘롯데가 이런 아트 프로젝트도 진행한다’고 보여줄 수 있는 자리였어요.”
- 최근엔 잠실점의 ‘뉴미디어 아트’전이 굉장히 특색 있었어요. 첨단기술을 활용한 전시로 통통 튀는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이 전시는 어떻게 마련했나요?
“3월 리조이스부터 5월 아트페어, 7월 공예전시까지, 이른바 ‘3·5·7 전략’이었어요. 올해의 마지막 숙제가 9~10월이었는데 키아프, 프리즈 등 미술계에서 큰 행사가 열릴 때 오히려 주목받지 못하는, 비상업적 전시를 열어 더 많은 볼거리를 보여주자 생각했어요.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관심도는 높지만, 상대적으로 컬렉터 층이 얕은 미디어아트에 주목했고요.
지난해 역대 최연소로 제19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수상한 젊은 작가 류성실이 이번 전시에 참여했어요. 비즈니스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백화점을 찾은 고객에게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 과거 프랑스계 글로벌 화랑인 오페라갤러리의 서울 디렉터를 거쳐, 전시 기획사 이안아트컨설팅을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는데요. 롯데백화점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백화점에서 아트콘텐츠실을 맡으며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다양한 전시 기획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롯데백화점과 인연을 쌓았는데, 미술시장의 여러 상황을 두루 파악하고 있는 점을 좋게 봐준 것 같아요. 기존 전시 기획사와 백화점에서의 일이 많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데, 실제로 크게 다르진 않아요.
과거 전시 기획사를 운영할 때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너무 전문 지식만 내세워서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전시는 하지 말자’였어요. 전시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이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전 이들을 연결시키는 ‘매개’가 되자고 생각했어요. 롯데백화점에서도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요.”
- 과거부터 롯데백화점은 롯데갤러리를 통해 전시를 여는 등 끊임없이 백화점과 예술의 접촉을 시도해 왔습니다. 롯데백화점이 예술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비단 롯데뿐 아니라 다양한 기업이 예술 마케팅을 활발히 진행하는 추세입니다. 이것은 당당하게 ‘나 예술 좋아한다’고 아트 커밍아웃하는 시대가 도래한 영향이라고 봐요. 10년 전만 해도 ‘나 주말에 전시 보러 갤러리 간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한다’, ‘교양있는 척 한다’는 등 부정적인 반응이 주로 돌아왔어요. 아트는 너무 어렵고 즐길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에게 여유가 생기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어요. 잠재적으로 예술을 좋아하고, 작품 구매 욕구가 있었지만 숨어 있던 사람들이 수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죠. 올해는 세계적 행사인 프리즈까지 서울에서 열렸어요. 10년 전엔 ‘허황된 이야기’라며 상상도 못했던 일이죠. 시대의 트렌드에 특히 민감한 백화점은 자연스럽게 아트 커밍아웃 시대에 빠르게 적응했고요.
또, 사람들의 생각보다 백화점이 작품을 전시, 판매해 온 역사는 꽤 길어요. 지금의 롯데백화점 본점 영플라자 건물의 전신이 1955년 이중섭 작가가 작품을 전시했던 미도파백화점 화랑이에요. 1956년 반도호텔(현재 롯데호텔 자리) 안에 주한 외국인 부인들이 세운 반도화랑에선 박수근 작가의 전시도 많이 열렸고요. 현대갤러리 등 미술계 전통 있는 갤러리가 1980년대부터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보다 훨씬 앞섰던 거죠.”
-롯데백화점뿐 아니라 신세계백화점, 현대백화점, AK플라자 등도 전문 전시 공간을 두고, 백화점 내부에 작품을 설치하는 등 예술과 백화점의 만남을 적극 시도하는 사례가 점점 더 늘고 있습니다. 타 백화점 전시와 롯데백화점의 예술 콘텐츠가 차별화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스토리입니다. 어디에서 열어도 어색하지 않은 흔한 전시가 아니라, 롯데에서 열려 더 의미가 있는 전시들이죠. 예컨대 롯데의 캠페인에서 출발한 리조이스 테마 전시처럼요.
백화점에서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브랜드의 철학, 고객의 경험을 아우르는, 공감을 이끄는 브랜딩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 중심엔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가 있어야 하죠.
‘아트비즈니스실’에서 ‘아트콘텐츠실’로의 변화가 예술을 대하는 롯데의 변화를 내포해요. 본래 팀 신설 당시엔 아트비즈니스, 즉 예술을 상업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부분이 컸어요. 많은 백화점이 그런 분위기였죠.
이 가운데 정준호 롯데백화점 대표가 예술을 단지 일이자 비즈니스적 측면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브랜딩 차원에서 백화점의 가치까지 올리는 데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어요. 그래서 아트콘텐츠실로 이름이 바뀌었죠.
롯데가 지닌 강점도 있어요. 백화점, 호텔, 쇼핑, 케미칼 등 전 계열사를 통해 예술의 가치를 알리는 프로젝트를 기획할 수도 있고, 이를 해외에 나가 있는 롯데 계열사들을 통해 글로벌하게 확장시킬 수 있죠. 동남아를 시작으로 홍콩 등에서 컬래버레이션 전시 및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에요. 더 나아가 해외작가를 국내에 소개할 뿐 아니라, 거꾸로 해외작가를 해외에 소개하는 역할도 해나갈 계획이고요.”
- 앞으로 롯데백화점 아트콘텐츠실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어요. 일본 작가 야마구치 슈의 ‘일을 잘한다는 것 : 자신만의 감각으로 일하며 탁월한 성과를 올리는 사람들’인데, 작가가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미학미술사를 공부했어요. 그는 눈앞의 상황을 철학이나 심리학, 경제학 개념에 맞춰 생각하며 늘 정답제시가 아닌, 질문을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저도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일을 두고 볼 때 실적을 이만큼 냈다는 성공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도전하는 가치를 높게 봐야 한다는 거죠. 특히 도전을 하기 위해 문제를 잘 찾는 것이 중요해요. 예컨대 인터넷 검색창에 궁금한 걸 물어보면 다 답이 나오는 시대에, 이미 나온 답을 찾는 건 비효율적이죠. 오히려 어떻게 검색할 것이고, 무슨 내용으로 찾아보고, 키워드는 뭘로 할 것인지 등 문제 제기가 중요해요. 저는 이런 문제 제기를 잘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예술은 우리의 삶에서 더 중요해질 것이라 봅니다. 단순 백화점 공간을 예쁘게 꾸미는 환경 미화적 측면에서 더 나아가 회사의 이미지와 철학을 굳건히 하는 데 아트가 있을 것이라 믿어요. 그냥 작품을 판매하는 단기적 실적 평가 차원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해요.
백화점이 아트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너무 상업적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는데, 미술계와 경쟁 구도 차원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예술을 보여주는 상생의 장으로 서로 힘을 주고받기를 바라요.
겉멋 든 아트가 아니라, 마인드 자체에 아트가 녹아들어 새로운 일에도 거침없이 깊이 있게 도전하는 삶의 태도를 갖고 이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괴테의 말이 있어요. ‘모든 큰 노력에 끈기를 더하라.’ 이 말을 실천하고 이어가고 싶습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