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그림 길을 마무리할 단계에 이르면서 되도록 겸재의 산수화(山水畵) 배경이 되는 곳은 빠짐없이 둘러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이 번 차에 갈 곳은 홍지문(弘智門)이다. 홍지문은 인왕산과 북한산을 연결하여 쌓은 탕춘대성(蕩春臺城) 가운데 홍제천 수문(水門) 옆 문루(門樓)이다. 탕춘대성이나 홍지문은 이미 필자의 ‘이야기가 있는 길’, ‘옛 절터 가는 길’에서 소개한 바 있어서 탕춘대성 길을 걸으며 요약하여 짚고 가려 한다.
기차바위 방향이 탕춘대성 길
배낭 가볍게 메고 한양도성 창의문(彰義門)에서 출발이다. 이 문을 비롯하여 이 지역의 역사와 옛이야기는 겸재의 장동팔경첩 속 창의문도를 소개할 때 상세히 소개하였다. 성벽을 따라 잘 다듬어진 인왕산 길로 오른다. 몇 년 사이 확 달라진 풍경이 있다. 오르고 내리는 이들은 젊은이들이 대세를 이루고 외국인들도 간간히 보인다. 오호 감동.
오르막이 끝나면 직진 길은 인왕산 정상. ‘우회전 길은 기차바위’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기차바위 방향이 탕춘대성 길이다. 잠시 돌아본다. 사대문(四大門) 안 서울 시내가 손바닥 안에 들어온다. 멀리는 서울을 둘러싼 산들이 와락 다가온다. 관악산, 청계산, 남한산성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수원의 광교산, 백운산도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눈 아래로는 겸재의 그림 배경들이 펼쳐진다. 기린교가 있는 수성동을 비롯하여 필운대, 옥류동, 청풍계, 자하동, 유란동, 장동, 청와대 주변 대은암동, 경복궁…. 모두 눈 아래 있다.
뒤집어 보면 겸재가 저 아래 옥인동 인곡정사(仁谷精舍)에서 인왕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들의 배경이 되는 봉우리에 서 있는 것이다. 겸재의 그림 중에는 이 봉우리와 이어서 벋어나간 백련봉(白蓮峰: 기차바위)을 그린 그림들이 있다. 이제 기차바위를 향하여 인왕 북능선으로 출발. 겸재의 그림 속이다.
잠시 후 길옆에 부끄러운 듯이 얼굴 돌리고 앉아 있는 둥근 바위를 만난다. 무심히 지나가면 알 수 없는 바위인데 겸재 그림을 꼼꼼히 살피면 기차바위에 공깃돌이 앉아 있다. 인왕제색도, 창의문도, 인왕산도, 인곡유거도에 그려져 있다. 길 뒤편으로 돌아가서 이 바위를 보면 어김없는 해골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랫동네 유란동(경복고 주변)에서 젊은 날을 보낸 겸재는 아마도 이 능선이 익숙했던 모양이다.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기차바위가 들어간 그림에는 이 바위를 공깃돌처럼 그려 넣었을까? 누군가가 찾아내라고 던진 겸재의 퍼즐은 아니었을까?
기차바위는 안평대군의 무계동(武溪洞)과 옆 계곡 삼계동(三溪洞) 뒤로 우뚝 서 있는 큰 암벽이다. 겸재는 언제나 시원하게 쓸어내려 그림을 그렸다. 바위 위로는 철심을 박고 줄을 길게 매어, 어린 날 긴 줄을 묶어 뒤로 뒤로 쪼르르 달리면서 기차놀이하던 때를 연상케 한다. 아마도 그런 연상이 만들어낸 이름일 것 같다. 수락산 기차바위도 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능선은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확 트인 경관을 보여 준다. 기차바위를 지나면서 인왕산의 북 능선은 대부분 흙길로 편안하게 이어지는데 인왕산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일 것이다. 봄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자연의 산철쭉이 곳곳을 붉게 물들이고, 가을에는 구절초와 벌개미취도 만난다. 능선 길에는 30~40년쯤 된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트레킹 코스로 그만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짧은 것이다.
이렇게 진행하다 보면 국가 시설물을 지나면서 가파른 하산 길이 나타난다. 이쯤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성벽이 오랜 시간을 떠오르게 한다. 탕춘대성(蕩春臺城)이 시작된 것이다. 탕춘대성은 서쪽에 쌓은 성이라서 서성(西城) 또는 연융대(鍊戎臺) 옆 성이라 해서 연융대성이라고도 불렀다.
왕조 대피로 먼저 마련한 뒤 백성 걱정까지
이 성(城)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쌓은 성이며 무슨 까닭에 쌓은 성일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또 이런 병란이 올 때 어떻게 방어할까 하는 고민을 시작하였다.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蒙塵: 피난)을 해야 했으며, 인조는 강화로 가려다가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부끄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서 몽진하지 말고 한양을 방어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양도성은 평지성(平地城)인 데다가 성벽의 길이도 길어(18.6km) 조선의 국력으로는 쉽게 방어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대두된 방안이 한양에 가깝고 산세가 험준하여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삼각산에 산성을 쌓자는 의견이었다.
숙종이 즉위한 뒤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전회의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토의는 끝이 없었다. 무려 37년을 논의해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드디어 임금이 결론을 냈다. ‘사람의 소견이라는 것이 사람 얼굴이 다 다른 것과 같아서(人之所見如人面之不同)’ 논의해 봐야 끝없음을 알고는 그대로 공사를 밀어붙였다. 공사는 9개월쯤 걸렸다. 지금도 북한산 능선을 도도히 넘어가는 북한산성은 이렇게 쌓은 산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은 서로 떨어져 있어서 북한산성으로 피신하면 고립무원인 데다가 지도층만 피신하면 한양 백성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즉 조지서(造紙署: 세검정 앞 종이 제조 기관) 동 입구(홍제천 아래쪽 지금 홍지문 주변)에 성을 쌓아 한양도성과 북한산을 잇자는 계획이었다. 동쪽은 형제봉 능선과 보토현(補土峴: 북악터널 위 고개)으로 자연 방어벽이 되니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한양도성 ~ 현재의 평창동, 구기동 지역 ~ 북한산성이 연결되는 벨트가 형성되어 백성도 피난 갈 걱정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숙종 36년(1710) 10월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올린 차자(箚子)를 보자.
옛날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는 도성(都城)이 완고(完固)하지 못하여, 변란(變亂)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무너질 것을 깊이 염려하시고, 일찍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축(修築)하여 험조(險阻)에 의거하여, 근본을 굳게 하고 나라를 보전하며 백성을 보호하는 계책을 삼았습니다. 지금 만약 북한(北漢)에 성을 쌓아 내성(內城)을 만들어 종묘와 사직단을 옮기고, 또 조지서(造紙署)의 동구(洞口)를 막아 강창(江倉)을 옮겨 설치하면, 공사(公私)의 축적(蓄積)을 모두 옮겨 들여올 수 있습니다.
昔我孝宗大王, 深以都城不能完固, 有亂則必至先潰爲慮, 嘗欲修築北漢城, 以爲據險阻固根本, 保國保民之計. 今若築北漢, 作爲內城, 移安宗社, 又塞造紙署洞口, 移置江倉, 公私蓄積, 擧皆移入.
항전 준비 마치니 항전할 일 없어져
이렇게 성을 쌓고 그 안 지역에 각종 국가와 민간의 창고를 옮기자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숙종은 1715년(숙종 41년) 탕춘대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모두 끝난 것은 1754년(영조 30년)이었다. 이 지역의 동명이 평창동(平倉洞)인 것은 그때 옮겨 간 군량 창고 평창(平倉)에서 유래한 것이다.
탕춘대성 인왕산 구간을 내려오면 홍제천변에 우뚝한 문루(門樓)를 만난다. 홍지문(弘智門)이다. 문이 완성됐을 때 숙종은 친필로 홍지문 편액을 내렸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한다. 다행인 것은 이 성을 쌓고 이곳에서 항전(抗戰)해야 하는 국가적 재난은 없었다는 점이다.
겸재는 홍지문 그림을 두 점 남겼다. 하나는 연융대에서 창의문까지 폭넓게 그린 대작 홍지문이고 다른 하나는 홍지문과 오간수문(五間水門), 그곳을 흐르는 홍제천과 바위를 그린 수문천석(水門川石)이다. 앞산은 지금은 상명대 캠퍼스가 된 산을 우뚝하게 그렸다. 홍지문과 5개의 수문의 디테일은 정밀하다. 문루는 가로로 네 간(間), 옆으로 두 간(間)의 문루를 그렸는데 향후 홍지문 문루를 다시 복원할 때 참고하면 좋겠다. 만년에 큰 붓으로 쓸어내리던 붓놀림은 전혀 아니다. 아마도 이 그림의 주인이 될 어느 양반인지 사동을 거느리고 문으로 다가가고 문 안쪽에는 어느 양반과 두 사람이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는 듯하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버드나무 뒤로 단아한 초가 한 채가 분위기를 돋운다. 물결의 흐름도 정교하고 바위들로 모나게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렸다.
조선 후기 산기슭 나무들도 어쩌면 저리 곱게도 그렸을까. 옥소 권섭의 손자 권신응도 (홍지문) 수문루를 그렸다. 디테일한 그림은 아니고 스케치에 가까운 형태의 그림이다. 홍지문을 漢北門(한북문)이라 써 넣었고 왼쪽 위편에 산 이름도 文殊峰(문수봉)이라고 써 넣었다. 지도를 그리는 형식이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이다. 북악십경첩 속의 한 폭이다. 세 명의 선비가 홍지문 전후를 지나는데 모두 타고 가는 것은 말이 아니고 나귀로 보인다. 그의 시대(1728~1786년)에는 탈 것으로 나귀가 일반적이었나 보다.
한양으로 가는 두 길에 ‘백불’이 놓인 뜻은?
이제 홍지문에 왔으니 꼭 들러 가야 할 곳이 있다. 홍지문 조금 아래에 있는 옥천암(玉泉菴) 보도각(普渡閣)이다. 그곳에는 보물로 지정(옛 기준 1820호)된 백의관세음보살(白衣觀世音菩薩)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1900년대 전후에 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면 한 번쯤 다녀가고 싶은 한양의 핫플레이스였다.
이곳은 겸재나 권신응의 그림처럼 물 좋고 바위 좋다. 한양에서 놀러올 만한 곳으로, 시 짓고 놀러오는 유오(遊敖)의 장소였다. 산 넘어 살던 청음 김상헌도 청나라에 죄인으로 가서 있을 때 집이 그리워 시를 지었는데 집 근처 그리운 10곳을 읊은 근가십영(近家十詠) 중 한 수가 이곳을 읊은 불암(佛巖)이다.
불암 개울 돌 제일이라 부르리 佛巖川石稱第一
시냇물은 유리 같고 돌은 매끄럽네 川似琉璃石潤滑
놀이객 밀납 바른 나막신 신고 얼마나 향했던가 幾向遊人費蠟屐
새삼 문사 끌어 대문장을 시험했네 更引書流試椽筆
취해서 산꽃 꺾어 한 곡조를 부르노니 醉折山花歌一曲
산바람은 소슬하고 산달은 빛 하얗었네 山風蕭蕭山月白
나의 집은 근처라서 자주 오고 갔었네 吾家住近往來熟
어느 날에 돌아가 예전 자취 찾아 볼고 何日歸歟尋舊跡
아울러 홍지문도 함께 유명해졌다. 그 시절 외국인들에 의해 찍혀진 사진이 10여 장 전해지고 있다. 인력거 타고 왔던 사진도 전해진다. 더구나 특이한 것은 스코틀랜드 출신 여류화가의 목판화다.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는 일본에 있는 언니에게 왔다가 1919년 처음 조선을 방문한 후 조선을 소재로 한 그림을 80점 가까이 남겼고 1921년과 1934년에는 전시회도 열었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 중 목판화(우끼요에: 浮世繪. 일본식 목판화)로 제작한 보도각 관세음보살이 전해지고 있다. 보도각의 관세음보살은 흰 옷을 입은 백의관음(白衣觀音)이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상징이라서 찾는 중생의 바람에 따라 그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른바 33가지의 모습인데 백의관음은 자식을 얻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서원을 이루게 하는 관세음이라고 한다.
얼마 전 보도각 백불 앞에 갔더니 젊은 내외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요즈음도 이곳 보도각 백불(白佛)은 영험하신가 보다. 이 백불이 새겨진 바위 뒤편을 보면 바위에 돌을 갈아 털썩 붙으면 득남한다는 민간신앙을 믿었던 이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지역에 부암동(付巖: 붙임 바위)이 있고 붙임바위로 유명했던 일은 백의관음과 무관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서울 동편에는 이 백불과 4촌처럼 닮은 또 한 분의 백불이 있다.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의 부속 암자인 길 건너 보타사(普陀寺) 백의관음이다. 이 두 백의관음은 아마도 고려 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는 ‘청와대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문종 때 한양에 남경유수부를 설치하고 이듬해 신궁을 지었다. 그 아들 숙종은 한양으로 천도도 추진한 바 있다. 이렇듯 한양을 중시했으니 자연 왕래도 많아졌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니는 길도 정비되고 잘 뚫려야 했다. 지금 우리 생각대로라면 당연히 의주대로(현대의 통일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개성을 출발하면 장단 ~ 파주를 거쳐 길은 갈라졌다. 하나는 개성 ~ 장단 ~ 파주 ~ 광탄 ~ 혜음령 ~ 벽지(벽졔) ~ 홍제(유진상가) ~ 홍제천 끼고 ~ 백불 ~ 창의문 쪽 고개 ~ 남경(청와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개성 ~ 장단 ~ 파주 ~ 양주 ~ 녹양 ~ 도봉역 ~ 창동 ~ 수유현 ~ 종암동(백불) ~ 동대문 ~ 남경으로 오는 길이다. 두 백불이 서쪽 길목과 동쪽 길목에 자리 잡고 남경을 오가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우연히 자리 잡은 그곳이었을까 아닐까?
한편 이 골짜기에는 범도 많고 표범도 많았다. 인왕산 호랑이라는 말이 빈 말은 아니었다. 정조 7년(1783) 2월에 “금위영이 아뢰기를 ‘한북문(漢北門) 밖에서 작은 범 한 마리를 잡아 봉진(封進)합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호랑이는 경에게 사급(賜給)하겠다. 장교는 본영에서 각별히 시상하라(禁衛營啓言. 漢北門外. 小虎一頭捉得封進. 敎以. 虎則卿處賜給. 將校自本營各別施賞.)” 하였다.
고종 18년 신사(1881)에는, 또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말로 아뢰었다.
삼계동(三溪洞) 근처에서 중표범 한 마리를 잡았고, 인왕산(仁旺山) 밖 근처에서 중표범 한 마리를 잡은 뒤에 이어 사냥을 하였는데, 오늘 신시쯤에는 옥천암(玉川菴) 뒤쪽 봉우리 근처에서 중표범 한 마리를 또 잡았기에 삼가 이것을 봉진합니다. 연이어 세 마리의 표범을 잡은 해당 장교에게 상을 주도록 논하였다.
又以訓鍊都監·禁衛營·御營廳言啓曰, 三溪洞近處, 中豹虎一頭捉得, 仁旺山外近處, 中豹虎一頭捉得後, 仍爲行獵矣. 今日申時量, 玉川菴後峰近處, 中豹虎一頭, 又爲捉得, 故謹此封進, 而連捉三虎之該校論賞.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이제 이어서 탕춘대성 길을 가자. 겸재나 권신응의 그림에는 성이 좌측 북한산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민가가 막아 길은 끊겼다. 옥천암 아래 북한산 자락길로 들어선다. 지자체에서 데크 길을 잘 만들어 놓았다. 중간에 탕춘대성 길로 오른다. 옛날부터 북한산 향로봉이나 비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중간에 독바위골(甕巖)로 나가는 암문을 지나 이윽고 향로봉 아래에 닿는다. 탕춘대성 시발점이다.
이 봉우리의 본래 이름은 향림봉(香林峰) 또는 향림사 후봉(香林寺 後峰)이었다. 이 봉우리 밑에 향림사가 있었던 까닭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봉우리 좌측 길을 잡아 하산 길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곳은 연신내역이다. 하산 길 초입 향로봉 아래 계곡 안쪽 길에는 무너진 돌 축대 위로 넓은 공터가 있다. 향림사로 여겨지는 고려적 절터다. 이곳은 고려가 거란 침략을 받았을 때 태조 왕건의 재궁(梓宮: 관)을 두 번씩이나 은신시켰던 절이었다. 기록을 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향림사(香林寺)는 삼각산(三角山)에 있다. 고려조 현종(顯宗) 경술년 난리에 태조의 재궁(梓宮: 관)을 이 절로 옮겼다가, 7년 병진에 현릉(顯陵)으로 환장(還葬: 도로 장례 모심)하였으며, 9년에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다시 내침하자 여기에 이안(移安)하였다가, 10년에 다시 현릉으로 모셨다.
在三角山 高麗顯宗庚戌之亂 移安太祖梓宮于是寺 七年丙辰還葬顯陵 九年契丹蕭遜寧來侵又移安是 十年復葬顯陵.
거란이 침공하자 고려 태조 왕건의 관을 삼각산에 있는 향림사에 두 번이나 옮겨 숨겼다는 것이다. 향림사는 고려 왕조로서는 그만큼 믿을 만했고 또 은밀한 곳이었을 것이다. 북한산성 축조에 큰 몫을 한 성능(聖能) 스님의 북한지(北漢誌)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한 줄 설명이 더 있다. “향림사는 비봉 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香林寺 在碑峰南 今廢).”
향림사를 끝으로 오늘의 탕춘대성 길을 마무리한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