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영⁄ 2022.11.30 14:48:09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 조명이 반짝이며 화려한 무대를 비춘다. 그보다 더 빛나는 건 그 무대 위를 누비며 춤추고 노래하는 배우들. 어둠을 밝히는 별, 그야말로 스타의 강림이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이하 42번가)가 2020년 이후 2년 만에 돌아왔다. 1980년 뉴욕에서 초연 이후 5000회 이상 장기 공연, 토니상 최우수 작품상과 안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CJ ENM과 샘컴퍼니가 공동 제작을 맡아 한국 초연 26주년 무대의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1930년대 뉴욕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최고의 흥행 공연제작자 줄리안 마쉬가 알렌타운에서 온 배우 지망생 페기 소여를 발탁해 스타로 길러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에 페기 소여의 재능을 알아본 동료 댄서 애니와 작가 겸 작곡가 메기 존스, 줄리안 마쉬의 ‘프리티 레이디’ 무대를 통해 재기를 꿈꾸는 왕년의 스타 도로시 브록, 첫눈에 페기 소여의 매력에 빠져든 배우 빌리 로러 등 공연업계의 다양한 종사자들의 이야기가 얽힌다.
대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줄리안 마쉬가 새로운 무대 ‘프리티 레이디’를 준비하는데 스폰서의 힘을 입은 도로시 브록이 여주인공으로 낙점된다. 모두가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상황에서 페기 소여가 무대 오디션을 보러 찾아오고, 좌충우돌 상황 속 결국 무대에 코러스로 합류한다. 하지만 공연 도중 도로시 브록을 밀어 부상을 입혔다는 오해를 입고 해고된다. 스타가 되겠다는 꿈이 사라졌다는 생각도 잠시, 오해가 풀린 줄리안 마쉬는 페기 소여의 재능을 믿고, 도로시 브록을 대신해 여주인공으로 무대에 서달라고 부탁한다.
김미혜 샘컴퍼니 대표는 공연 소개글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1930년대 대공황기 브로드웨이를 다루고 있는 극 중 배경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세계적인 불황을 겪고 있는 현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고 짚었다.
그의 말처럼 공연 속 배경은 저 먼 과거이지만, 극 중 배우들이 경제 대공황 속 먹고 살기 위한 일자리를 걱정하는 모습은 코로나 팬데믹과 전쟁 등으로 고군분투하며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실제로 배우, 제작자들은 지난해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공연장이 문을 닫으며 하루아침에 설 무대가 사라지고, 관객의 발걸음이 줄어드는 상황을 여실히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선 이 무대의 소중함을 느끼는 배우들의 연기엔 진실성과 간절함이 더해졌고, 극 중 이야기가 허황되거나 마냥 가상으로 느껴지기보다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여기서 공연은 한발 더 나아가 희망과 다시 일어설 의지를 바라본다. 42번가를 현 시점에 다시 무대로 소환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 대표는 “모든 배우와 제작진이 피땀 흘리며 고군분투하는 지금 이 순간은, 경제적 위기를 버티고 무대를 성공으로 이루는 42번가와 매우 닮아 있다”며 “힘겹게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42번가가 담고 있는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로 깊은 공감과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싶다”고 말했다.
큰 무대 위를 압도하는 배우들의 탭댄스
극 중 인물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 페기 소여는 재능은 있지만 무대에 설 기회가 없고, 줄리안 마쉬와 메기 존스는 공연 제작 능력은 뛰어나지만 이를 소화할 배우를 찾기 쉽지 않다. 한때 최고의 뮤지컬 스타였던 도로시 브록은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지만 현실은 남자친구인 애브너 딜런의 스폰에 기댈 수밖에 없고, 애니와 빌리 로러는 코러스와 배우로서 당장 설 무대와 여기에 함께 할 재능 있는 동료가 절실하다.
이처럼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주저앉아있기보다 노래를 부르고, 발을 굴러 탭댄스를 춘다. 단순 유희나 현실 도피 차원이 아니다. 이들에게 무대, 그리고 쇼는 삶이자 자신들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힘들수록 이들의 춤은 더 강렬해지고, 특히 음악 없이 오롯이 배우들의 탭댄스가 무대를 가득 채우는 순간은 그 어떤 장면보다 강렬하다.
42번가는 노래보다는 화려한 탭댄스의 매력이 부각된 작품이다. 주요 배역인 줄리안 마쉬의 경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두 번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대는 꽉 찬 느낌이다. 42번가가 ‘쇼뮤지컬’이라 불리는 이유를, 26년째 이어져 온 공연의 저력을 알 수 있다.
관록의 배우 전수경, 정영주의 존재감은 수많은 배우들 속에서도 여전하다. 전수경은 다소 호들갑스럽지만 배우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메기 존스, 정영주는 왕년의 인기를 잃었지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도로시 브록으로 완벽하게 변신한다. 특히 정영주가 부르는 이 공연의 대표곡이기도 한 ‘42번가’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맴돈다. 완곡하지 않고, 페기 소여가 이후 이곡을 다시 부르기도 하지만, 황폐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42번가의 묵직하고도 환상적인 느낌이 정영주의 목소리를 통해 강하게 전달된다.
송일국은 줄리안 마쉬 역할을 과하지 않게 해낸다. 특히 무대 전환 장면을 자연스럽게 이끌고, 그가 등장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쏠리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는 최근 다양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노래라고는 애국가, 독립군가밖에 안 불렀는데 42번가에 출연하면서 노래에 빠졌다”고 고백하기도 했는데, 공연의 마지막을 그의 목소리로 장식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페기 소여는 결국 무대 위의 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쟁취해낸다. 페기 소여 역의 배우 유낙원 또한 실제로 ‘브로드웨이 42번가’ 2018년 공연에서 앙상블을 맡았다가 올해 공연에서 주역으로 발탁됐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처음엔 자신을 ‘작은 먼지’로 비유했지만, 어둠을 밝히는 그 누구보다 빛나는 ‘별’이 된다.
예주열 CJ ENM 공연사업부장은 공연 소개글을 통해 “42번가는 시련과 좌절을 뛰어넘어 꿈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감동과 희망을 전하는 작품”이라며 “수많은 땀방울이 모여 완성된 경쾌한 탭 사운드가 세대와 세월을 초월해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페기 소여뿐 아니라 무대에 선 모든 배우들이 공연 말미에 이르러서는 어둠을 환하게 비추는 별이 된다. 그리고 관객에게도 전한다. “당신도 별이 될 수 있다”고 그리고 누구보다 밝게 빛날 거라고. 공연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내년 1월 15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