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9호 김금영⁄ 2022.12.27 15:18:27
다양한 크기의 조각이 전시장 입구에서 사람들을 맞이한다. 멀리서 봤을 땐 하나의 거대한 조각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깨진 도자 파편들을 연이어 붙여서 만든 결과물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 조각들이 모이고 모인 모습은 마치 전시장에 나무가 솟아나 숲을 만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어지는 전시 공간엔 바닥부터 천장까지 다다르는 5m의 압도적인 크기가 인상적인 대형 조각 작품이 설치됐다. 그리고 이 조각들을 마치 감싸 안듯 장미꽃 그림들이 전시장 벽에 위치하며 또 다른 거대한 숲을 만들었다. 그 조화가 아름답다. 이 모든 작품들은 이수경 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다.
더페이지갤러리가 이수경 작가의 개인전 ‘이상한 나라의 아홉 용’을 연다. 이번 전시는 입체, 평면, 디지털 작업까지 작가의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다. 전시장 초입에서 만난 조각들은, 조각적 오브제 형식의 설치 작품 ‘반역된 도자기’ 연작들이다.
전시명이자 작가의 대표작이기도 한 ‘이상한 나라의 아홉 용’은 201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 출품됐던 작품으로, 국내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작품 또한 깨진 도자 조각을 모아 에폭시 접착제로 이어 붙인 번역된 도자기 연작 중 하나로, 5m의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한다. 작가와 갤러리에 따르면, 이 작품은 내년 미국의 미술관급 기관에서 전시한 뒤 소장하기로 예정돼 있어 이번 전시가 국내에서 작품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번역된 도자기’라는 용어가 흥미롭다. 작가가 작업을 통해 번역하는 건 아름다움이다. 그는 작업을 통해 세상, 그리고 산다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찬미해 왔다. 특히 ‘만남’과 ‘조화’를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대표적으로 이상한 나라의 아홉 용은 동아시아의 역사, 예술에 관심이 많던 작가가 중국 설화에서 발견한 내용을 기반으로 창조됐다.
작가는 “일반적으로 용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강력한 왕권, 힘 등을 상징해 일반인은 함부로 다가갈 수도, 다룰 수도 없는 존재였다”며 “하지만 해당 설화에서는 용이 여러 동물들과 결합한 뒤 아홉 명의 자식을 낳는다. 유일무이했던 존재가 이질적인 것들과 엮인 결과, 좀 더 창의적·유기적인 가능성을 생산해 냈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작업 방식 또한 설화처럼 여러 요소가 뒤섞였다. 일종의 번역 과정과도 같다. 2001년 이탈리아 알비솔라 비엔날레에 참여했던 작가는 시조시인 김상옥의 ‘백자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백자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시로, 이 내용을 영어로 번역한 뒤 이탈리아 도공에게 들려주고 “상상으로 조선 백자를 재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백자 12점이 나왔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이후 한국에 돌아와 우연한 기회에 친구 친척이 경기도 이천에서 운영 중인 도예 가마터를 구경했다. 거기서 뜻밖의 장면을 마주했다. 도예가가 자신의 작품을 마구 깨뜨리고 있었던 것.
작가는 “내가 봤을 땐 하나의 완성된 작품 같았는데, 도예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도자기를 하나하나씩 깨더라. 그는 완벽한 존재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깨는 것을 아름다움을 번역하는 과정으로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름다움을 번역하는 과정
깊은 인상을 받은 작가는 자신만의 번역 방법을 강구했다. 도자 명장들에게 부탁해 얻은 버려진 도자 조각들을 책상 위에 늘여놓고 만지작거렸다. 깨진 조각들은 작가의 눈에 아름답게 비춰졌다. 그러다 각각의 조각들이 딱 맞물리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라고 느꼈다.
작가는 “어떤 에너지가 발생하려면 서로 부딪히고 만나야 한다. 깨진 조각들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마치 중국 설화에서 나온 용의 아홉 자식이 만난 모습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며 “거북이, 개구리 등 아홉 자식을 통해 용이 사람들에게 더 익숙하고, 다정한 존재로 번역됐듯이 작업을 통해 통합과 화합, 여기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각각의 깨진 도자조각의 틈 사이는 금분으로 메우고 금박을 입혔다. 김린아 더페이지갤러리 큐레이터는 “작가의 작업에서 금(gold)은 단순히 복구나 복원의 의미가 아닌, 조각난 도자 파편들의 금(crack)을 메우며 파손 뒤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장치”라며 “처참히 버려져야 했던 도자 조각들의 숙명적인 연약함은 금(gold)에 의해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아름다운 하나의 오브제로 탈바꿈한다”고 말했다.
이 조각들을 감싸 안듯 전시장 벽마다 설치된 ‘오 장미여!’는 작가가 올해 새롭게 시작한 회화 연작으로, 이 또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매개물이다. 작가는 “2014년부터 쭉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가 스스로의 내면에 깊이 들어가 보니 내게 빛이자 생명을 뜻하는 장미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고 말했다.
미디어 아트로 구현된 장미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장미 한송이’와 ‘꽃밭에서’는 똑같이 장미를 다루지만 매우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대한 조각과 다양한 그림들이 설치된 넓은 전시 공간 속 한구석 어두컴컴한 곳에 오롯이 혼자 자리 잡고 피어 있는 ‘장미 한송이’는 그래서 더 눈길이 간다.
‘장미 한송이’가 절제의 미학을 지녔다면, ‘꽃밭에서’는 화려함을 내세웠다. 마치 오로라를 연상케 하는 찬란한 빛 속 작은 생명들(장미)이 영상 속에서 활짝 피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압도적인 크기의 캔버스는 관객에게 초월적 공간을 경험하도록 이끈다. 여기에 정가(正歌) 가수 이현아가 나지막이 정훈희의 ‘꽃밭에서’를 읊조리듯 노래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작업들엔 메타버스나 증강현실(AR), 대체불가토큰(NFT) 등 새로운 기술에 대한 작가의 관심도 반영됐다.
작가는 “회화, 조각들에 미처 담지 못한 부분을 디지털 영상으로 확장해 풀어냈다. 2012년부터 3D 조각도 하는 등 새로운 매체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갖고 있었다”며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우리의 삶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다. 예술 또한 여기서 멀어질 수 없다. 이제 선택이 아니라 당연히 알아야 한다. 물리적인 작업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작업을 넘나들며 늘 새로운 작업방식을 공부하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표현방식도, 규모도 다양한 작업들은 여전히 작가에게 설렘을 안겨준다고 한다. 작가는 “작업을 할 때 미쳐버릴 정도로 두근 두근대는 설렘이 내 작업에 중요하다. 모든 감각이 고양되는 순간, 세계는 더욱 아름답고, 살아있음에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세상을 작가는 이렇게 찬미한다. 전시는 더페이지갤러리에서 내년 2월 10일까지 이어진다.
한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 전공으로 학·석사 학위를 받은 이수경은 졸업 후 뉴욕 브롱스 미술관, 니스 빌라 아르송, 서울 쌈지 스튜디오 등 국내외 레지던시를 거쳤다. 리버풀 비엔날레(2008), 마루가메 현대미술관(2009), 샌프란시스코 미술관(2011), 국립현대미술관(서울, 2012), 아트바젤(홍콩, 2014), 그랑팔레(파리, 2016), 베니스 비엔날레(2017), 나폴리 마드레 미술관 및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2019) 등 전 세계 유수 미술관 및 비엔날레에서 전시를 가졌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