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2호 김응구⁄ 2023.02.22 15:12:48
주얼리 마케터였던 고성용은 잘 다니던 회사를 5년 만에 박차고 나왔다. 그리곤 서울 뚝섬역 근처에 카페를 차렸다. 신나게 잘됐다. 재미도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카페를 접었다. 망했을까? 천만에. 나날이 커갔다. 그래도 스스로 문을 닫았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5년 만이었다.
여섯 달 고민하다 성수동에 막걸리 양조장을 세웠다. 마시는 걸 만드는 건 그대로였다. 다만, 커피에서 막걸리로 바꿨을 뿐이다. 성질 급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렇진 않다. 오히려 이처럼 낙천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두어 시간 여러 말 주고받다 보니 드는 생각. 어차피 고성용은 뭘 해도 될 사람이다.
- 미리 알아보고 왔어요. 이력이 독특해요. 주얼리회사 직원, 카페 사장, 그리고 양조장 대표. 이렇게 모두 15년이 채 안 돼요. 세 직업 모두 연결이 잘 안 되기도 하고요.
“사업적으로 봤을 때 연관성은 없죠. 학창시절 꿈이, 무엇이든 사람이 즐기는 브랜드를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회사 생활을 하고 사회 경험을 쌓다 보니 그동안 브랜드 범위를 너무 좁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깨달았죠. 주얼리, 패션뿐만 아니라 모든 게 브랜드가 될 수 있더라고요. 그다음엔 무엇을 할 건지 생각해봤어요. 결국, 처음 생각대로 어떤 것이든 누구나 즐기는 걸 하자고 결심했죠.”
- 성수동 카페는 꽤 잘됐다면서요.
“그 역시 사람들이 와서 즐기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단순히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를 먹는 카페는 싫었죠. 그래서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공연도 하고, 때에 따라 플리마켓도 진행하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성수동이 지금 같지 않았어요. 좀 낙후돼 있었죠. 공장지대였잖아요. 그런 곳에 카페를 차리니 이상하게 볼 수밖에요. 전 성수동이 참 좋았어요.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을 닮았거든요. 카페 이름도 ‘러스티드 아이언 인 덤보(Rusted Iron in Dumbo)’였어요. 브루클린 분위기가 나도록 실제 브루클린브릿지에서 사용한 철제 펜스를 가져다 소품으로 사용하고, 덤보 지역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곤 했죠. 요새 ‘성수동은 한국의 브루클린’이라는 말이 여기저기 돌잖아요. 제가 처음 사용한 말이에요. 카페 오픈하고 보도자료 만들 때 그렇게 제목을 달아 각 매체에 보냈거든요.”
‘덤보’는 브루클린의 맨해튼 다리 아래 지역이다. 헐리우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포스터의 배경이 바로 덤보다. ‘다운 언더 더 맨해튼 브리지 오버패스(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를 줄인 말이다. 덤보 지역도 낡은 공장과 창고로 가득했는데, 이를 갤러리 등으로 개조해 문화지역으로 변모했다.
- 그렇게 재밌고 잘 되던 카페는 왜 갑자기 접었나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가장 컸던 건, 일단 사람이 찾아와야 하잖아요. 공간사업이니까. 그게 답답하더라고요. 뭔가 즐기는 걸 더 많이 만들고 싶은데 한정적이고, 나는 무작정 기다려야 하고, 그게 아쉬웠어요. 또 커피라는 게 외국 문화잖아요. 확장성이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그즈음 우리 전통문화를 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고민 끝에 내 첫 번째 사업으로 재밌게 했으니 이제 정리하고 뭔가 새로운 걸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리곤 바로 정리했어요. 물론 주변에선 다들 뜯어말렸죠.”
- 그렇게 일순간에 정리되던가요, 무 자르듯?
“고민을 많이, 오래 했죠. 그래도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만둘 시점을 정해서 모두 정리했고, 그런 다음 내가 할 만한 또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죠.”
- 대안을 만들고 카페를 닫은 게 아니라 카페를 닫고 할 일을 찾았다고요?
“저는 그랬어요. 주얼리회사를 그만둘 때도 그랬어요. 저한테는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일을 그만두지 않은 상태에선 새롭게 할 일을 제대로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쨌든 카페 정리 후엔 정체성이 확실하고, 확장성도 있고, 우리 뿌리에 기반을 둔, 그러니까 전통문화를 갖고 뭔가 만들어내 세상에 소개하는 걸 해보고 싶다, 이렇게 막연히 생각만 했어요. 그러다 전통주를 접했고, 굉장히 재밌겠는데? 싶었죠. 알고 보니 좋은 술도 많고, 반면에 아쉬운 점도 있고, 그럼 일단 배워보자 해서 전통주 교육기관에 들어갔죠.”
- 그렇게 할 일을 정했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요?
“여섯 달 걸렸어요. 그간에는 전통식품 같은 것도 알아봤죠. 전통주를 하겠다고 맘먹었을 땐 입에 풀칠만 할 정도면 된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렇게 10개월 정도를 배우면서 준비했죠.”
- 그럼, 10개월 배우고 바로 한강주조를 설립한 건가요? 겁나지는 않았나요?
“무식했던 거 같아요. 강의 들을 때 내가 술을 직접 만들어보기도 하잖아요. 다양한데 재밌는 게 많았어요. 그때 명확히 보였죠. 막걸리나 전통주의 부족한 부분을 조금만 더 채워서 만들면 아주 잘 되진 않더라도 한 카테고리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싶었어요. 젊은 느낌으로, 기존 막걸리와 다른 형태로 말이죠.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하나씩 해보자는 마음이 컸어요. 물론 1년, 2년, 3년, 4년 목표는 세워놓고 시작했죠. 그리곤 긴 호흡으로 가자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주류는 오래 보고 가야 하는 사업이거든요.”
- 상호나 원재료에서 그대로 드러나듯 서울과 한강에 집중한 사실이 독특해 보입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산다는 건 가장 많은 수요가 있다는 얘기예요.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서울에 양조장을 차리자 결정했죠. 그다음으로 정체성을 고민했어요.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의 문제죠. 단지 서울에 있다고 서울을 대표하는 술은 아니잖아요. 정체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원재료였어요. 서울에서 나는 쌀을 쓰자 해서 찾아보니 딱 하나 있더라고요. 그게 바로 서울시 브랜드인 ‘경복궁쌀’이에요.”
- 그래서 막걸리 이름도 ‘나루’군요, 한강나루를 생각해서?
“한강은 그저 강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중요한 강줄기이고, 더 나아가 한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계속 흐르고 있다고 봤어요. 연결성이 있고 중요한 매개체로 생각했죠. 한강주조의 목표와 비전도 그래요. 과거에 화려했던 우리 문화를 현재로 가져와서 이를 소개하고 지속 가능한 문화로 만들자는 거예요.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게 한강이고, 그래서 한강주조가 된 겁니다.”
-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루터, 나룻배를 떠올렸겠네요.
“오래전에는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야만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어요. 이 나루터가 많은 사람이 교류하고 교역하는 장이었지만, 한시(漢詩)를 지어 선보이는 등 문학·예술적 공간이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지만요. 마포대교, 잠실대교 같은 지금의 대교(大橋)들이 대부분 나루터가 있던 곳이잖아요. 거기에 담긴 의미들은 계속 존재한다고 봐요.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할 거고요. 한강주조는 그런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이에요.”
- 라벨의 아이콘들도 당연히 의미가 있겠죠?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대략 짐작은 가지만요.
“나루터를 형상화한 거예요. 동그라미는 해와 달, 세모는 산과 대지, 네모는 나룻배예요. 사실, 디자인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어필하려고 일부러 노력한다든지 설명을 많이 한다든지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보고 예쁘구나, 정도로만 느껴지면 된다고 봐요.”
- 패키지가 굵은 일자 모양이에요. 단순해서 좋아 보여요.
“서울 양조장에 서울 쌀을 사용하고 무감미료이기도 한데 다른 막걸리들과 비슷한 패키지와 라벨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사람들은 제품을 처음 볼 때 맛보다 비주얼로 판단하잖아요. 때론 맛이랑 비주얼을 매칭시키기도 하고요. 그래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리병은 쉽지 않았고, 페트병이어도 직접 금형을 떠서 만드는 게 아니면 시중에 있는 걸 선택해야 하는데 마음에 드는 게 거의 없었어요. 찾고 또 찾다 보니 지금의 것이 가장 마음에 들더라고요.”
- 처음 막걸리를 만들 때 레시피는 어떻게 만들었나요. 전통주 교육기관에서 배운 대로만 할 수도 없는 거고, 뭔가 독창적인 방법이 있었나요?
“맨 처음에는 누룩에 집중을 많이 했어요. 자가(自家) 누룩이 있어야 진정한 나만의 술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죠. 그래서 한 여섯 달 정도는 누룩만 만들었어요. 처음엔 그걸로 약주를 만들 생각이었어요. 근데 쉽지 않더라고요. 누룩을 직접 만드는 게 불편하거나 어렵다는 게 아니라, 일정한 품질의 술을 만드는데 필요한 누룩을 제조하는 게 쉽지 않아요. 제 목표는 소비자가 일정한 맛의 술을 즐기는 것, 그런 대중적인 술을 많은 사람이 즐기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결국에는 ‘전통주도 맛있고 좋은 술이구나’라는 걸 알았으면 했거든요.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고 판단한 거죠.”
- 그래서 탁주로 선회한 거군요?
“맞아요. 이제 어떤 막걸리를 만들 것이냐의 문제죠. 오랜 고민 끝에 쌀에서 나오는 적당한 단맛, 부드러운 목 넘김, 너무 끈적이지 않고 적당한 텍스처(입안에서 느끼는 질감), 좀 더 나아가 단맛과 산미(酸味)의 밸런스가 좋고 탄산감이 없는 막걸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했어요. 이후 그 맛을 찾아 계속 가지치기하면서 맞춰갔죠. 그렇게 좁혀가며 하나의 레시피를 만든 거예요. 이것도 여섯 달 정도 걸렸어요.”
- 컬래버레이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소비자, 그중 애주가라면 한강주조까지는 몰라도 ‘표문막걸리’ 내지는 ‘곰표막걸리’ 정도는 알잖아요. 탄생 배경이 궁금합니다.
“막걸리는 섞는(흔들어 마시는) 게 맞다고 봐요. 살짝 위에 뜬 것만 마시려면 그냥 약주를 마시면 돼요. 개발 단계에서 흔들고 뒤집어보니까 ‘곰표’가 ‘표문’이 되더라고요. 진짜 재밌잖아요. 그래서 ‘곰표막걸리’가 ‘표문막걸리’가 된 거죠. 근데, 개발 기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요. 그러다 보니 출시도 늦어졌죠. 곰표와 컬래버한 제품이 몇 있잖아요. 그들보다 우리가 먼저 준비했는데 개발 시간이 길어지니 맥주가 먼저 출시되고 팝콘, 나쵸까지 나오더라고요. 그러는 가운데 맥주가 엄청 히트치면서 저희가 반사이익을 좀 봤죠.”(웃음)
- 나루생막걸리, 표문막걸리… 어쨌든 탁주는 잘되고 있고, 최근에는 ‘나루약주’도 내놨어요. 언뜻 증류식소주나 그 이상의 프리미엄급까지 계속해서 단계를 밟고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강주조를 처음 기획했을 때부터 약주를 만들고 싶었어요. 테스트도 계속했죠. 쉬지 않고 제조법을 연구하고, 원하는 맛을 뽑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생각보다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좀 오래 걸렸죠. 화이트와인과 사케랑 비슷한 느낌의 약주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드라이하면서도 향미가 좋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그런 약주요.”
- 약주는 분명 좋은 술이죠. 근데 만드는 입장에선 과연 이게 팔릴까? 하는 고민도 들잖아요.
“약주시장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약주, 너무 어렵죠. 알죠. 우리야 좋아하니 마시지만, 일반인에게 쉬운 술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저는 이걸로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 확장할 거야, 매출을 많이 낼 거야, 이런 마음보다 우리가 진짜 만들고 싶었던 약주를 만들자, 대량은 아니어도 소규모로 만들어 꾸준히 소개하자, 이런 생각이 커요.”
- 그런 생각도 해봐요. 일반인에게, 소비자에게 약주를 이해시키는 일도 만만찮은 과정이겠구나, 하는 생각 말이에요.
“국민 대부분이 약주는 알죠. ‘약주하셨나요?’ 묻기도 하잖아요. 알긴 해도 실상 떠오르는 브랜드는 없어요. 약주 출시하면서 사람들한테 물어봤어요. 어떠냐고. 그랬더니 ‘무슨 약재(藥材)가 들어가죠?’라는 질문이 첫 번째, ‘약주가 뭐죠?’라는 질문이 두 번째로 많았어요. 그럼 많은 설명을 해줘야 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기 쉽지 않고 굳이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죠. 그냥 이런 약주다, 하는 정도만 알면 될 것 같아요. 약주는 긴 호흡으로 가져가야 하는 주종이에요. 저는 약주가 정말 좋거든요. ‘맑은 술’이잖아요. 사케보다 훨씬 다채로운 맛을 갖고 있고, 색도 엄청 예쁘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봐요.”
- 제 생각에도 이제 시장이 프리미엄 증류주까지 왔으니 앞으론 약주 차례가 아닐까 싶어요. 계속 반복되는 얘기지만, 이를 어떻게 알려야 할까. 내수시장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할까는 앞으로의 고민으로 남겠죠.
“다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막걸리도 약주도 소주도. 전통주 면허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주종을 할 수 있다는 점이잖아요.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다양한 주종을 만들고, 소비자들이 잘 접하도록 과정을 세팅하며 조금씩 조금씩 알려가야죠.”
- 마지막으로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광고 얘기를 하고 마무리해야겠어요. 꽤 반향이 컸죠? 거기서 유래한 ‘막걸리 바보’라는 애칭도 얻었고요. 짧은 영상이었지만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2020년의 일인데, 우선 타이밍이 잘 맞았던 듯싶어요.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측에서 여러 셀러(seller) 가운데 저희를 추천했더라고요. 영상은 우리가 만들어뒀던 콘텐츠를 활용했어요. ‘안녕하세요, 성수동 막걸리 바보 한강주조입니다’라고 말하곤 걸어가면서 술 던지는 걸 받아 마시고, ‘진짜 맛있어요’라고 하는 게 저희가 만든 콘텐츠였거든요. 그걸 네이버 측에서도 재밌게 본 거예요. 미리 콘티를 여러 개 짜뒀겠지만 저희가 만든 걸 써도 되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더 자연스러운 영상이 만들어졌죠.”
2019년 6월 한강주조의 문을 열었을 때 발효탱크는 세 개였다. 그러다 다섯 개로 늘었고, 지금은 열 개가 꽉 차 있다. 그렇게 나루생막걸리를 무럭무럭 키웠고, 데려와 키운 ‘양아들’ 표문막걸리도 효도하는 중이다. 나루약주는 이제 막 여기저기에 얼굴을 알리고 있다.
자식 키우는 일이 쉽지 않다. 고성용에게 이들은 자식이다. 정말 ‘좋아 죽겠어서’ 키우고 있고 보기만 해도 늘 예쁘다. 한 번씩 속을 썩여도 뭐 어쩌랴,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이들이 잘 되든 그렇지 않든 고성용은 늘 응원할 것이다. 왜? 모두 그의 자식들이니까.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