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5호 천수림(사진비평)⁄ 2023.04.03 13:56:40
사진의 전통적 속성인 ‘기록성’과 디지털 이미지의 ‘허위성’ 조합은 마치 판소리의 작창(作唱)과도 닮았다. 창극에서 장단과 음계를 활용해 소리를 짜고 대사를 입히는 작업을 작창이라 하는데, 창극의 음악성을 극대화한다.
도시와 재개발 과정에 놓인 지역과 주변을 배회하며 찍은 일상사진에 페인팅을 한 강홍구, 그리고 아티스트북 작업을 이어가는 베트남계 미국작가 태미 응우옌은 동남아시아 식민지 역사와 디아스포라에 대한 서사를 시(스탠자, 시의 기초단위)를 작창하듯 다룬다. 우리는 회화와 아티스트북 등 다양한 매체와 사진, 문학과 만났을 때 예상치 못한 울림을 느낀다.
OCI미술관 기획전 ‘ㅎㅎㅎ’, 강홍구의 ‘언더, 페인팅’
회색 빛 공사 중인 실내에 코끼리 한 마리가 어슬렁대고 있다. 실내에는 작은 손수레와(코끼리보다 작은) 창문틀, 각목과 파이프, 건축 재료가 담겨있을 푸대가 놓여있고, 코끼리 뒤쪽 창문 밖 풍경은 돌무더기들이 쌓여 있어 이곳이 공사 중임을 알려준다. 이 작품은 공사장 사진에 아이가 일기장에 그려놓듯 슥슥 그린 그림이다.
붉은 갈색의 가스배관 사진 위에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배관공 형제 중 하나인 슈퍼마리오 캐릭터(마리오)가 등장한다. 마치 줄광대가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표정을 보면 저절로 ‘ㅎㅎㅎ’ 웃음이 난다. 빨간 양철문에 그린 무는 마치 누군가 몰래 남겨놓은 그라피티(길거리 여기저기 벽면에 낙서처럼 그리는 그림)처럼 자연스럽다.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는 강홍구표 ‘언더, 페인팅’은 OCI미술관 기획전 ‘ㅎㅎㅎ’에서 5월 20일까지 만날 수 있다. 강홍구, 김나훔, 박용식, 이건용, 정유미, 정철규가 참여한 이번 기획전은 SNS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용하는 ‘ㅎ’에 대한 사소하며 의미심장한 탐사와 여정을 보여준다.
인스타그램이나 핸드폰에 담긴 고양이나 강아지의 짤에서 시작된 박용식의 블링블링한(반짝거리는) 냥이(고양이)와 멍뭉이(강아지)들의 조각설치, 모텔 앞 천막자락을 들추고 들어서면 ‘웰컴 투’라는 환영인사를 건네는 정철규, ‘여기, 저기, 거기’를 외치며 동그라미를 그리는 이건용 소꿉놀이·시체놀이·병원놀이 등 연애놀이를 통해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정유미의 애니메이션, 김나훔이 건내는 빨래, 컵라면 등 일상의 이미지를 갸웃거리다 갑자기 현타(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오는 우리를 발견한다.
이들과 함께 전시장을 배회하다 강홍구를 만난다. 허름한 벽에 누군가 막 다가와 먹어야 할 것만 같은 자장면(노란 계란이 얹어있는)과 갈라진 벽에 가까스로 앉아 있는 참새 한 마리와 손글씨로 쓴 ‘웨어 앰 아이(Where am I)’를 보고 있으면 ‘허허’ 헛웃음이 난다.
강홍구는 오랫동안 주거환경으로서의 도시와 재개발 과정에 놓인 지역에 관심을 갖고, 사진-회화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그냥’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서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종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시를 기억하고 재생하는 데 사진만큼 명징한 매체도 없다. 이 객관적인 매체에 강홍구는 자신의 전공이기도 했던 ‘회화’를 접목시킨 독특한 장르를 개척해왔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공간에 엉뚱한 오브제를 놓고 찍는다거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이 상상할 것만 같은 천진난만함도 숨김없이 보여준다.
그동안 도시 재개발로 변해가는 풍경을 기록한 ‘그린벨트’(2000∼2002), ‘오쇠리 풍경’(2004), ‘미키네 집’(2005∼2006), ‘수련자’(2005∼2006), ‘사라지다-은평뉴타운’(2009), ‘그 집’(2010) 등의 연작을 발표했다. 그는 재개발에 대한 작업을 통해 한국이 건너온 개발지상주의와 우리들의 무심함을 환기시킨다.
4월에 개관한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에 ‘강홍구 컬렉션’이 소장돼 있다. 불광동 컬렉션은 2003년부터 2017년까지 재개발로 인한 불광동의 변화상을 기록한 사진자료로, 불광동의 이주와 철거과정에 오브제를 활용해 연출하고 편집한 ‘수련자’, ‘미키네집’ 등의 풍경이 포함됐다.
강홍구는 이름도 불리지 못하고, 인정받지도 못하는 변방의 장소들, 우리 문 앞에 펼쳐져 있지만 무시당하는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의 언어로 ‘작창’하고 있다. 강홍구는 “그냥 찍고, 그리고 싶을 때까지 노려보고, 그릴 만해서 그렸는데…”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시니컬하고 비판적인 그간의 작품에 비춰보면 여전히 신비롭고 잊힌 지역(혹은 고향)에 대한 상실감과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여정으로 안내한다. 특히 그의 고향 상실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는 현재 사비나미술관에서 진행되는 강홍구 개인전 ‘무인도와 유인도-신안바다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리만머핀 서울, 태미 응우옌의 아티스트북
회화, 종이 작업, 아티스트 북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작가 태미 응우옌의 전시 ‘필멸의 존재를 위한 희극: 지옥편’이 리만머핀 서울에서 5월 6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이탈리아 작가 단테(1265~1321)의 ‘신곡(Divine Comedy)’을 기반으로 한 작가의 전시 3부작 중 첫 번째 순서를 선보이며, 리만머핀 런던에서는 ‘필멸의 존재를 위한 희극: 연옥편’(2024), 리만머핀 뉴욕에서는 ‘필멸의 존재를 위한 희극: 천국편’(2025)으로 이어진다.
응우옌은 플라톤 동굴의 우화, 말레이시아 포레스트 시티의 역사, 베트남 산맥의 랑구르족 등 철학과 인류학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인간이 처한 도덕적 모호성을 탐구해왔다.
이번 ‘필멸의 존재를 위한 희극: 지옥편’에서는 지옥의 아홉 개 고리를 통과하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영적 순례와 냉전 시대 정치의 쟁점인 우주 경쟁을 연결한다. 응우옌은 수세기를 사이에 두고 단절되다가 천상계 우주로 가장 먼 곳에 도달하려는 광적 열기로 점철된 냉전서사를 다룬다.
응우옌은 로켓선의 단면도나 평면도로 보이는 다양한 우주선 이미지를 회화 전체에 배치시킨다. ‘프롬 네이션 투 네이션 앤 레이스 투 레이스(From Nation to Nation and Race to Race, 2023)’에서 미국 성조기는 마치 감금된 듯 우주선 그릴 안에 둘러싸여 있다. ‘디스 플레이스 이즈 써큘러(This Place is Circular, 2023)’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상화가 로켓선 및 대통령 인장과 나란히 등장한다. 이밖에 아이젠하워, 베트남의 부패 영부인으로 잘 알려진 마담 보우, 닉슨 대통령이 등장한다. 회화의 스크린 인쇄 공정에서 작가는 야광 잉크를 사용했다.
희미한 조명 속에 부분적으로 은폐된 ‘성조기(Stars and Stripes)’ 신문의 헤드라인은 ‘우주로 간 전우들 영웅으로 착륙하다(Space Comrades Land as Heros)’, ‘미국은 달에서도 러시아에 승리한다(US Will Beat Russia to the Moon)’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냉전 시기에 발행된 신문인 성조기는 당시 베트남에 주둔한 미군들이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정기 간행물이었다.
포함된 기사 문구는 동남아시아와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국에 살면서도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를 잃지 않는 민족)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 관심을 통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응우옌은 베트남의 열대 기후를 기독교적 관념으로서의 지옥과 행성체로서 태양의 열기와 비교한다. 우주 경쟁 시기의 미국 지도부와 식민지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비평을 전달하는 메시지는 2층 전시실에 놓여있는 아트북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응우옌이 직접 수제로 제작한 종이와 실크 스크린, 스탬핑, 도금 등 수작업과 함께 AI(인공지능)를 적극 활용해 냉전시대와 우주전쟁의 이미지를 추출했다면, 사진 이미지와 뉴스페이퍼, 옻칠, 콜라주 등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우아한 장정과 제본, 다층적인 구조를 지닌 아트북은 책과 조각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다. 작가는 ‘필멸의 존재를 위한 희극: 지옥편’을 위해 총 아홉 권의 아티스트 북을 제작했는데, 그 중 6권은 리만머핀 서울에서, 3권은 소전서림(4월 8일∼–5월 6일)에서 소개된다. 응우옌은 우주선 형태로 연출된 아티스트 북에서 ‘지옥편’의 원문을 직접 인용한 뒤 스탠자의 특정 구절을 삭제하거나 변경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가미한다.
책장을 열면 신문과 사진 이미지로 이뤄진 정치·사회적 이슈는 들춰볼 수 있는 접지형태(종이)로 이뤄져 있다. 일일이 펼쳐봐야 하는 수고로움을 통해 우리는 동남아시아 식민지 역사와 디아스포라의 여정에 비로소 동참할 수 있다.
응우옌은 2016년에 현대 정치를 실험적인 아티스트북 방식으로 소개하는 마사 쿼터리를 포함해 독립 출판 플랫폼인 ‘패신저 피죤 프레스(Passenger Pigeon Press)’를 설립했다. 응우옌은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토론과 관련된 정부 문서를 재현하는 ‘퍼블릭 도메인’, 1955년 반둥 회의의 유산을 부분적으로 국빈 만찬 형식으로 탐구하는 ‘컬러 커튼 프로젝트’ 등 실험적 접근을 이어 나가고 있다.
<작가 소개>
강홍구(1957년 출생)는 전라남도 신안 출생으로, 목포교육대학교와 홍익대학교 서양화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비상임위원,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다. 2016년 우민아트센터, 2013년 고은사진미술관, 2009년 몽인아트센터, 2006년 리움미술관 로댕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201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프레임 이후의 프레임: 한국현대사진운동1988-1999’(2018, 대구미술관, 대구), ‘SeMA Gold X: 1990년대 한국미술’(2016,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동백꽃 밀푀유’(2016, 아르코미술관, 서울), ‘우리가 알던 도시’(2015,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2015년 루나포토 페스티벌 올해의 작가상, 2008년 동강사진상,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등에 작품이 소장돼있다.
태미 응우옌(1984년 출생)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출생으로, 코네티컷주 이스턴에서 거주, 2007년 쿠퍼 유니언에서 학사, 2013년 예일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개인전은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 공공 도서관(2022), 일본 도쿄의 니치도 현대미술관(2022),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프랑수아 게발리(2022), 싱가포르 S.E.A 포커스의 트로피컬 퓨쳐스 인스티튜트(2022), 뉴욕주 브루클린의 스맥 멜론(2021), 오클라호마주 노먼의 오클라호마 대학교 라이트웰 갤러리(2019),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교 앤더슨 갤러리(2019), 뉴저지주 하이츠타운 페디 스쿨의 마리보 갤러리(2018), 일리노이주 시카고 예술대학의 조안 플래쉬 아티스트 북 컬렉션(2017), 뉴욕주 브루클린의 그라운드 플로어 갤러리(2017) 등에서 열렸다. 응우옌의 아티스트 북은 다수의 저명한 공공 기관에 소장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