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굳건하다 믿었던 가치와 기준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들이 재정립되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 이 불확실성은 사람들 마음에 많은 불안을 가져왔다. 흔들리는 우리를 무엇이 잡아줄 수 있을까? 서울대미술관의 전시는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됐다.
서울대미술관이 ‘시간의 두 증명-모순과 순리’전을 5월 28일까지 연다. 전시가 주목한 건 흘러온 시간 속 자리 잡은 ‘전통’의 힘이다.
심상용 서울대미술관 관장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 내면엔 자연스럽게 심리적 공허감이 쌓여갔다. 이 공허함은 과연 우리가 어디부터 시작하고, 흘러가고 있는지, 즉 우리를 굳건하게 지탱해주는 뿌리와 줄기는 어디인지 생각하게 했다”고 했다.
이는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돌아온다는 ‘복고’ 열풍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여파로 전 세계는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까지 ‘3고(高)’를 겪고 있는데, 이 시기 국내엔 복고 열풍이 돌아왔다. 2000년대 유행했던 Y2K(세기말) 패션이 다시 주목받고, 과거 인기 있었던 콘텐츠가 재해석돼 돌아와 흥행하는 등 복고가 유행 트렌드로 떠올랐다.
하지만 심 관장은 이번 전시에서 돌아보는 과거는 복고 유행과는 결을 달리한다고 짚었다. 그는 “우리는 힘들 때 과거 행복했던 시기를 떠올리며 힘을 얻곤 한다. 하지만 과거를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정에서 오는 불행을 완화시키기 위한 만병통치약 차원으로만 접근하는 건 망각보다 더 해롭다. 그런 과거는 일시적으로 상상된 것이기 때문”이라며 “배우고 학습돼 마치 숙제 검사를 하듯 상상된 모범 답안의 틀 안에서 우리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싶진 않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통의 시간에 대한 질문은 단순하지 않았다. 심 관장은 “우리가 제국주의 등 인위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의 개입으로 갑자기 역사의 단절을 겪고, 회복하기도 하는 등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은 영향도 있다”고 짚었다.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던 차에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연이 닿았다. 아름지기는 ‘새로운 것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과거에 대한 권태’의 양극단 사이에서 중심을 지키고, 시대와 세대를 넘나들며 전통문화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이어왔다. 특히 단순히 전통문화의 미적인 아름다움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조의 일상을 담은 전통문화에서 자연스럽고 격조 있는 태도, 더 나아가 하나의 뿌리를 가진 우리네 미감과 철학을 읽어왔다.
심 관장은 “이번 전시는 우리의 의·식·주에 녹아있는 우리의 전통, 가치관과 지혜에서 오늘날의 삶과 예술, 더 나아가 문명의 길을 밝힐 영감을 구하고자 기획됐다. 현재라는 동굴에서 빛으로 나오기 위해 과거를 살펴봐야 한다는 두 기관의 공명이 일치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의·식·주를 기반으로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포착한 현대미술작가들의 작품 75점, 그리고 전통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면서도 오늘날의 쓰임새에 맞게 편의를 확보하는 아름지기의 약 100여 점이 넘는 소장품을 통해 구성된다. 이를 통해 시간을 뛰어넘어 전통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지는 일상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의도다. 그리고 이 과정은 뿌리 찾기에 이어 ‘소통’으로도 연결된다.
박보나 서울대미술관 큐레이터는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비대면 소통의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사회적 상호작용을 맺고 교류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을 더욱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지만, 현실에서는 고립되고 파편화된 초개인주의적 사회가 도래했다”며 “이번 전시는 이런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서의 전통의 가치에도 접근한다”고 말했다.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과거, 현재, 미래
전시는 크게 3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섹션1 ‘오늘, 우주의 시’는 상호 연결돼 정처 없이 흐르는 시간 속 잠시 멈춰 사유할 수 있는 틈을 제공하는 자리다. 박 큐레이터는 “과거와 현대를 단절하지 않고, 자유로이 왔다 갔다 하며 이어진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전시의 시작점엔 김보민의 ‘도시-산수화’가 자리하는데, 작품엔 종종 다른 시간대의 사건과 풍경이 함께 그려진다. 하지만 그 풍경이 이질적이지 않고, 오히려 전통과 현대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다층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전통과, 새로운 맥락으로서의 현대사회를 보여준다.
이인선의 기계자수와 김미라, 양유완, 정유리의 은 주병 그리고 백남준의 ‘토끼와 달’은 시간이 중첩된 초현실적인 느낌을 제공한다. 은 주병은 풍류와 희로애락을 담는 매개체로서 선조의 정신을 이어가되, 현대에 맞는 술 문화를 위해 구현한 공예작품이기도 하다. 지금 바로 일상생활에 사용해도 될 정도로 어색함이 없이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차 문화를 보여주는 다기들과 함께 전시된 이성자, 김수자, 장욱진, 이종상, 하동철의 작품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삶의 보편성을 다룬다. 특히 이성자의 작품은 단절 아닌 연결을 이야기하는 이번 전시 콘셉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박 큐레이터는 “이성자 작가는 해외 유학이 흔하지 않던 1950~1960년대 프랑스로 건너갔는데, 한국의 전통을 잃지 않고 작품에 이를 꾸준히 드러내왔다”며 “이번 전시엔 비행기로 한국과 프랑스 하늘을 오가며 바라본 풍경을 담은 작품이 설치됐는데, 화면엔 음과 양, 동양과 서양 등 대척점에 선 존재들이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며 조화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섹션2 ‘지속될 느낌’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박진아와 조해리는 자전적인 경험을 담은 작품으로 일상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국악을 공부한 조해리는 이를 서양식 악보가 아닌, 조선시대 세종이 창안한 악보인 ‘정간보’의 방식으로 그려냈다. 특히 음계에 해당하는 공란에 우리의 일상을 표현한 그림들을 집어넣으며 재치 있게 매치시켜 눈길을 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유학 생활로 세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서도호는 ‘내 집을 싸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는데, 이 바람을 작업에 풀어냈다. 시공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개인적인 공간을 패브릭 등의 매체를 통해 상세하게 복제해냈다. 이와 더불어 김태호, 정재호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며 거주 그리고 기억의 방식을 다룬다.
양혜규의 ‘중간유형–구렁이 생명체’에서는 인류역사 속 공예가 가진 근본적인 미감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문영민과 류성실의 작품은 ‘명재 윤증 기제사상’, ‘노마드 제사상’과 함께 전시돼 시대에 따라 변화하면서도 전통적으로 지켜 내려오는 의식을 포함하는 우리 문화의 정신과 가치를 보여준다. 이건빈은 휴대할 수 있는 제기들을 선보이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제사 문화엔 형식뿐 아니라 떠나간 사람을 기리는 마음이 담겼음을 강조한다.
또, 전통 복식인 조선시대의 도포와 고려와 삼국시대 복식을 토대로 재현한 말두고, 백습고, 그리고 백자 주병은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 시리즈와 함께 전시되며 옛것에 새로움을 불어넣고,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미의식을 보여준다.
섹션3 ‘기억하기 또는 살기’는 현재 우리의 일상적 모습을 담담한 필치로 보여주는 우덕하의 ‘사람들’로 시작된다. 과거와 미래의 정서를 오가며 앞으로 이어질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섹션이다.
이 섹션에 크게 자리한 이문(二門)은 연경당의 장락문(長樂門)을 모델로 한 것으로, 굳게 닫히지 않고 활짝 열려 있다. 관람객 또한 이 문 사이를 오갈 수 있는데,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과거, 현재, 미래의 통로이기도 하다. 이문을 중심으로 전시장은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의 풍경과 삶을 담은 작품을 보여준다.
서용선과 조덕현의 작품은 시대와 공간 그리고 계층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기억을 다룬다. 윤석남, 이인진, 권창남은 어머니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다발킴의 작품은 분절된 이념을 뛰어넘어, 화해와 융합의 이미지를 재해석한 한복으로 보여준다.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의 개수는 방대하지만, 결국 모순과 순리가 공존하는 우리네 삶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시켜 조화를 이룬다는 한 주제 아래에 모인다. '이런 과거가 있었다'는 단편적 기억 회고나 단절의 방식이 아닌, 끊임없이 현재, 과거를 동시에 강조하는 것도 이런 연유다.
심 관장은 “현재 우리의 삶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신기술의 집합체인 스마트폰 등 새롭고 빠른 문화가 형성되고 미래를 대비하는 등 여러 시간들이 혼재돼 있다. 일정시간을 유영하지만 마치 영원을 살 것 같이 행동하고, 과거와 미래 없이 현재만 살아가는 듯한 모순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과거가 있어야 현재가 있고, 미래가 이어지듯 시간은 누구에게나 순리대로 흘러왔고, 현재도 흘러가고 있으며, 그 중심엔 우리의 삶이 있다. 시간을 멀리 동떨어져서 바라보지 않고, 바로 우리가 먹고, 입고, 마주하는 삶으로서 가까이 바라보며 전통의 가치를 재고찰하고자 했다”며 “마치 여행을 시작하듯 전시를 돌아보며 우리의 삶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