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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in] 서울 중구 도보 탐방, 해설사 얘길 들으니 숭례문·덕수궁·명동이 달라 보이네

중구,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관광프로그램으로 엮은 도보 탐방 9개 코스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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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51호 김응구⁄ 2023.06.13 17:23:38

서울 중구는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관광프로그램으로 엮은 도보 탐방 9개 코스를 운영 중이다. 사진=김응구 기자

1990년 4월 한국을 떠나 미국 하와이에 자리 잡은 김윤석(54) 씨. 그의 여권 표지에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United States of America)’라고 새겨져 있다. 유명 일식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일한 그는 5~6년에 한 번꼴로 한국을 찾았다. 그마저도 10년 전 온 식구가 지금의 라스베이거스로 옮기고 나선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다.

윤석 씨는 서울 태생이다. 한국엔 고등학교 시절 친구 둘 셋 정도만 남아있다. 이민 가기 전에는 시내 나가길 즐겼다. 주로 고궁이나 번잡한 거리를 다니는 걸 좋아했다.

얼마 전 윤석 씨가 친구 김규태(55)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의 여름휴가 시즌에 맞춰 들어오겠다고 했다. “십수 년 전보다 많이 변했을 테지만 그래도 핫플레이스보다 어릴 적 다녔던 곳들을 돌아보고 싶다”는 윤석 씨에게 규태 씨는 “그럼, 변한 듯 그대로인 시내가 낫겠다”고 말해줬다.

규태 씨는 그날 저녁 인터넷으로 갈만한 곳을 찾았다. 그러다 한 기사에 시선이 꽂혔다. 서울 중구가 진행하는 도보 관광프로그램이다. 문화해설사와 함께 걸으며 중구의 지정문화재·문화유적을 두루 알아보는 시간인데, 오래전 추억과 맞물릴 듯해 오히려 자신이 더 들떴다.

중구는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관광프로그램으로 엮은 도보 탐방 9개 코스를 운영 중이다. 문화해설사로부터 숨겨진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익히 알던 명동과 남산도 새롭게 보인다.

△한양도성 남산구간(광희문~숭례문) △광희문 달빛로드(흥인지문~무당천) △장충단 호국의 길(장충단비~자유센터) △정동 한바퀴(정동극장~서울시립미술관) △순례역사길(명동대성당~약현성당) △순례역사길 2(약현성당~우포도청터) △명동 역사문화투어(문화공원~문예서림터) △남산, 기억로(장충단공원~조선신궁터) △중구역사문화코스(남산~청와대) 등 9개 도보 코스에 △장충단 기억의 공간 시설관람코스 1개도 마련돼있다.

이중 ‘순례역사길’은 올해부터 두 개 코스로 분리해 진행한다. 명동성당에서 김범우 집터까지가 1코스,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우포도청터까지가 2코스다. 각각 3㎞에 달하는 거리로 코스당 1시간 30분쯤 걸린다.

올해 처음 기획한 ‘중구역사문화코스’는 남산 백범광장~덕수궁~명동~청계천~광화문광장~경복궁~청와대까지 6㎞ 거리를 3시간 동안 걷는 도심 속 ‘대장정’이다. 청와대 개방과 연계한 프로그램으로, 조선시대부터 대한민국 근현대사까지 한 번에 훑어볼 수 있다.

도보 관광프로그램은 중구청 홈페이지나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시스템에서 예약·신청하면 된다. 문화해설사 없이 나 홀로 즐기길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비대면 문화해설 도보 관광프로그램도 준비했다. 스마트폰에 중구 스마트관광 전자지도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으면 된다.

김길성 중구청장은 “3년여의 코로나19 여파로 한동안 여행의 자유를 누릴 수 없어 아쉬웠는데, 지난 3월부터 시작한 도보 관광프로그램으로 특별한 시간 여행을 떠나며 아쉬움을 만회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보 관광프로그램 코스 가운데 익히 알고 있는 몇 곳을 소개한다. 모두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얘기다. 읽다 보면 알겠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도 꽤 된다. 미리 알고 가면 숭례문도, 덕수궁도, 명동성당도 다르게 보일 게 분명하다. 규태 씨도 그렇게 말했다.

숭례문은 개성의 ‘남대문’, 평양의 ‘보통문’과 함께 우리나라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됐다. 사진=김응구 기자

숭례문… 현재 남아있는 城門 중 가장 크고 오래돼

조선왕조를 세우고 3년째인 1394년(태조 3)에 한양이 새 도읍으로 정해졌다. 이어 새 도성(都城) 건설계획에 따라 먼저 종묘와 사직(社稷)을 건설하고 곧바로 경복궁을 건립했다. 아울러 수도 전체를 방어할 목적으로 도성을 둘러싼 네 산에 성곽을 쌓았다. 성곽 동서남북에는 각각 네 개의 큰 문과 작은 문을 두고 도성 내외로 출입하기 편하게 했다. 그중 정문인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이름 지었다.

숭례문은 개성의 ‘남대문’, 평양의 ‘보통문’과 함께 우리나라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됐다. 1396년(태조 5) 착공해 1398년(태조 7년) 완공했다. 이후 1448년(세종 30), 1479년(성종 10), 1868년(고종 5)에 수리해 비교적 잘 보존됐고, 1962년 12월 20일 우리나라 국보 제1호로 지정됐다.

숭례문은 외국 사신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나라의 관문 역할도 했다. 특히, 중국에 우리 사신을 보내거나 군사를 출병시킬 때 관료들이 숭례문 밖에서 전송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영조가 숭례문 문루(門樓)에서 죄인을 다스렸다거나, 정조가 수원 현륭원(顯隆園)으로 행차할 때 숭례문 안팎에 척후·복병을 배치했다거나, 순조가 능에서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신주를 숭례문 밖에서 맞이했다거나 하는 기록으로 숭례문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숭례문은 화강암을 높이 쌓아 만든 홍예문(虹蜺門·무지개 모양의 문)을 출입구로 삼아 도성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그 위쪽에는 2층 목조건물(문루)을 세웠다. 이 문루를 오르내리도록 동서 양쪽에는 돌계단을 설치했다. 문루 둘레는 전통 벽돌 담장으로 두르고, 돌계단과 만나는 곳에 작은 문을 내 문루 출입구로 삼았다. 문루 밑층 내부 바닥 가운데 한 칸은 마루를 깔고 나머지는 모두 흙바닥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층마다 모두 겹처마로 만들었다.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 용마루 양쪽 끝에는 취두(鷲頭)라고 하는 장식용 기와를 각각 세워 지붕에 위엄을 더했다.

1899년 홍예문 아래로 전차가 통과하기 시작하면서 도성 안팎의 출입 통제와 군사적·의례적·사상적 기능은 사라졌다. 이후 도로 확장에 따른 성곽의 철거, 도시 확장에 따른 도성의 해체 등을 겪으며 숭례문을 비롯한 도성의 4대 문은 축대와 문루로만 이뤄진 성문으로 남게 됐다.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 이후인 1910년에는 숭례문 주변에 원형 석축이 만들어지고, 그 주위로 전찻길과 도로도 생겼다. 일제강점기 시절 숭례문은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나 박람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홍예문 내부로 출입과 접근마저 금지됐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숭례문 석축과 문루가 총탄·포탄 등으로 훼손돼 1953년 긴급 수리하기도 했다. 1961~1963년에는 석축 일부와 문루 전체를 수리해 전쟁으로 훼손된 부분이 거의 복구됐다. 2000년대 들어 서울시는 숭례문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한 뒤 2006년 3월 숭례문까지 시민에게 개방했다.

창건 후 600여 년간 수많은 전쟁과 고난 속에서도 건재했던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 발생한 방화로 불에 탔다. 잔해 조사 결과 문루 2층 90%와 1층 10% 정도가 피해를 입었다. 그 후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약 2년간 정밀 실측조사와 구조 안정성 검토를 마쳤고, 2010년 2월 복구공사를 시작해 2013년 5월 4일 완공한 후 일반에 공개됐다.

복구과정에선 새로운 사실도 확인돼 그간의 수리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았다. 1층 지붕 추녀마루의 잡상을 8개에서 7개로, 용마루 길이를 15.7m에서 16.6m로 고쳤다. 또 동쪽 계단 폭을 2.9m에서 5m로 늘리고 문루 1층 중앙 칸에 설치된 마루를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고쳤다. 1907~1909년 사이 헐려 나간 성문 좌우 성곽은 동쪽 53m, 서쪽 16m까지 복원했다.

명동대성당은 1970~1980년대 근현대사 격동기에 한국사회의 인권 신장과 민주화의 성지 역할을 했다. 사진=김응구 기자

한국천주교회의 상징, 명동대성당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한국천주교회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本堂)이기도 하다.

조선 역관(譯官)이자 최초 순교자인 김범우(金範禹·?~1786)의 집터 인근에 세웠다. 프랑스인 코스트 요한(E.J.G. Coste·高宜善·1842~1896) 신부가 1892년 설계해 1898년 5월 29일 완공했으며, 공사에는 1000명 가까운 신도가 자원봉사로 참여했다.

한국 초기 벽돌조 성당에 순수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 사적 제258호. 대성당의 평면은 라틴 십자가형 상량식이다. 성당 높이는 23m, 종탑 높이는 46.7m다. 건물 하나만으로 한국의 역사적·교회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하 성당에는 기해박해(己亥迫害·1839)와 병인박해(丙寅迫害·1866) 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942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주임 신부가 부임했고,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主敎)인 노기남 주교의 서품식도 열렸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1945년에는 성당 이름을 기존 ‘종현대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꿨다. 1970~1980년대 근현대사 격동기에는 한국사회의 인권 신장과 민주화의 성지로도 역할을 했다. 지금은 기도하고 선교하는 공동체로서 세상을 향하고 있다.

대성전 뒷동산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명동대성당 축성 50주년 기념으로 1948년 프랑스에서 제작해 봉헌했다. 명동대성당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성인(主保聖人)으로 한다. 그래서 성모상 하단에는 ‘성모무염시태(聖母無染始胎)’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바깥에서 대성당으로 오르는 계단 왼쪽의 루르드 성모 동굴은 노기남 대주교가 우리나라의 평화를 지향하며 제작해 1960년 8월 27일 봉헌했다. 2014년 명동 들머리 공사 때 위치가 조금 이동됐다.

대성전 안의 스테인드글라스(유리화)는 프랑스 베네딕도회 수사(修士)들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2년 고 이남규 화백이 복원했다. ‘로사리오 기도 15단’(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생애), ‘성탄과 삼왕 경배’, ‘예수와 12사도’ 등 세 가지다.

중구의 순례역사길 코스에는 김범우 집터도 포함돼있다. 김범우는 1784년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런 후 명동 자신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천주교 집회를 열었다. 결국에는 형조(刑曹)에게 붙잡혀 배교(背敎)를 강요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이후 천주교인들은 그가 살았던 명동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가 돌아온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이 됐다. 사진=김응구 기자

고종의 거처로 이용한 궁궐, 덕수궁

덕수궁(德壽宮)은 조선 초 성종(成宗)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들이 살던 집터였다.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1552~1608)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가 돌아온 후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삼으면서 궁이 됐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선조가 승하하고 뒤이어 광해군(光海君)이 이곳에서 즉위했지만, 그 해 완공된 창덕궁(昌德宮)으로 들어가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宮號)를 이어받았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 갖지 않아 별다른 기능을 하지 않았다.

이곳에 다시 왕이 들어온 건 조선 26대 왕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에 잠시 머물다가 옮겨오면서부터다. 고종은 조선의 국호(國號)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圜丘壇)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면서 경운궁에 여러 전각(殿閣)을 세우고 궁궐의 영역을 확장했다. 당시 궁궐은 지금의 정동과 서울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였다.

서구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고종은 궁궐 안에 여러 서양 건축물을 세웠다. 이 중 석조전(石造殿), 중명전(重明殿), 정관헌(靜觀軒)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먼저,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해 1910년 완공됐다. 접견실·대식당 등 공적인 공간과 침실·서재 등 황실의 생활 공간이 갖춰진 대한제국의 대표 서양식 건물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을 겪으면서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등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됐다. 이후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의를 회복하고자 2009년 복원을 시작해 2014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중명전은 황제의 서재로 지어졌다. 당시 덕수궁과 중명전 사이에는 미국 공사관이 있어, 덕수궁 담장 밖의 별궁처럼 사용됐다. 1904년 덕수궁 화재 이후에는 편전(便殿)으로 활용됐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관헌은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Afanasy Seredin-Sabatin)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절충된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다.

석조전 뒤쪽에는 서양식 2층 건물인 돈덕전(惇德殿)이 있다.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건립했는데, 당시에는 외교를 위한 영빈관·알현관 등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일제가 1920년대 들어 이를 헐어버렸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덕수궁관리소 등 여러 가건물이 들어서기도 했다. 문화재청이 2015년 ‘덕수궁 복원정비사업’을 펼칠 때 돈덕전 재건에도 나섰다. 마침내 오는 9월에는 돈덕전을 공식 개관한다. 지난 5월 22일에는 현판 제막식도 열렸다.

서울시는 시내에 산재했던 민속자료 한옥 다섯 채를 필동으로 이전·복원해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했다. 사진은 천우각 모습. 사진=김응구 기자

한양의 명승지 터에 세운 남산골한옥마을

남산은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했을 정도로 자연과 경치가 아름다운 데다 높지도 않아 한양 백성들이 자주 찾았다. 특히, 필동(筆洞)은 한양의 명승지로 손꼽히던 곳이다. 삼청동(三淸洞), 인왕동(仁王洞), 쌍계동(雙溪洞), 백운동(白雲洞)과 더불어 ‘한양 5동(漢陽 五洞)’으로 불렀다.

서울시는 시내에 산재했던 민속자료 한옥들을 필동으로 이전·복원하고, 누각인 천우각(泉雨閣)과 연못 청학지(靑鶴池), 서울천년타임캡슐 광장 등을 모아 1998년 4월 18일 남산골한옥마을로 조성했다.

한옥은 모두 다섯 채다. 이승업 가옥은 경복궁 중건공사(1865~1868)에 참여했던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 이승업이 1860년대 지은 집이다. 삼각동 36-2번지에 있던 걸 옮겨와 복원했다. 서울민속자료 제20호. 김춘영 가옥은 조선시대 말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이다. 삼청동 125-1번지에 있던 걸 이전·복원했다. 서울민속자료 제8호. 윤택영 재실은 순종의 장인 윤택영이 딸 순정효황후가 1907년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은 재실(齋室)이다. 제기동 224번지, 서울민속자료 제24호. 민씨 가옥은 민영휘의 저택 가운데 일부다. 187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관훈동 30-1번지, 서울특별시민속문화재 제18호. 윤씨 가옥은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이 소유했던 집이다. 191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옥인동 47-133번지에 있었으나 부재가 몹시 낡아 이전하지 못하고 건축 양식을 본떠 복원했다.

서울천년타임캡슐은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아 조성했다. 서울과 서울시민의 생활을 대표하는 문물 600점을 캡슐에 담아 매장했다. 정도 1000년이 되는 2394년 11월 29일 개봉할 예정이다. 타임캡슐은 보신각종을 본뜬 모양이다. 2007년에는 국악 전문 공연장인 서울남산국악당도 들어섰다. 300석 규모.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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