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2호 김금영⁄ 2023.07.13 14:59:22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다다른 백화점 3층. 커다란 크기의 작품 이미지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이뿐만 아니라 백화점을 걸어 다닐 때도 매장 사이 벽, 통로, 라운지, 엘리베이터 앞 곳곳에 작품들이 설치돼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아 탐험하는 느낌이 들었다. 때로는 주황색, 때로는 붉은색 배경을 바탕으로 설치된 작품들은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한 몰입감이 있었다. 이곳은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풍경이다.
글로벌 아트마켓 달군 아마노 타케루와 신세계의 만남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이 일본 작가 아마노 타케루의 전시를 1M(중층)에 위치한 메자닌 갤러리, 3층에서 7월 23일까지 열었다. 노랑, 분홍 등 명쾌한 배경 위에 간략한 선으로 천진난만한 검은 눈의 여인을 그린 ‘비너스’ 시리즈로 유명한 그가 한국 첫 공식 개인전을 신세계백화점에서 가진다는 소식에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이 쏠렸다.
주혜인 신세계갤러리 강남점 디렉터는 “신세계갤러리는 고객 수요를 파악함과 동시에 미술계 트렌드와 접점이 있는 작가의 전시를 기획해 선보인다. 이에 따라 쿠사마 야요이, 이우환 등 컬렉터의 수요가 높고, 아트마켓에서 강세를 보이는 거장들의 작품을 많이 선보여 왔다. 미술계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갖춘, 재능이 입증된 젊은 작가들에게도 주목한다”며 “또, 국내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글로벌 작가를 발굴해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노 타케루가 이에 부합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순수예술 영역부터 조각, 아트토이, 에어스프레이 작업, NFT(대체 불가 토큰)까지 섭렵하며 다양한 시각예술 활동을 전개해온 그는 일본에서도 요지 야마모토 등 유명 의류 브랜드를 비롯해 백화점과도 컬래버레이션을 하며 대중과 폭넓게 소통해 왔다”며 “꾸준히 그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다가 전시 제안을 했고, 작가 또한 열린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197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아마노 타케루는 다양한 시각 체험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당시 일본은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서브컬처들이 본격화돼 나온 시기이자, 미술계에서는 모노하(물체 자체에 대한 탐구에서 미학적인 면을 발견한 미술운동) 등을 통해 독자적인 미학을 탐구함과 동시에 서구의 팝아트(대중문화적 시각이미지를 활용한 대중예술) 등 선진 미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시기이기도 했다.
20세에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뉴욕에 온 작가는 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판화, 스트리트아트(거리예술)에 매료돼 미국의 다양한 문화를 온몸으로 습득하며 그만의 독특한 작업 스타일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이후 일본을 비롯해 미국, 프랑스, 홍콩 등 세계 곳곳에서 전시를 열고, 글로벌 아트마켓에서도 활약해 왔다.
국내엔 아트페어, 경매 등을 통해 소개됐는데 주로 판화만 소개됐을 뿐 원화를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면밀히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원화 신작 총 54점을 선보이며 국내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주혜인 디렉터는 “아마노 타케루의 국내 첫 공식 개인전이라, 한 주제에 치우치기보다는 작가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작업 세계를 살펴볼 수 있도록 포괄적으로 작품을 선정했다”며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 비너스를 비롯해 거친 붓질로 마감된 풍경화의 매력이 돋보이는 ‘산’ 시리즈, 레몬 등 정물을 감각적으로 화면에 옮긴 ‘정물’ 시리즈, 실제 자신의 반려동물을 모델로 한 정감 있는 ‘동물’ 시리즈,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에어스프레이 드로잉 작업까지 다양하게 구성했다”고 말했다.
특히 비너스는 아마노 타케루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작품으로, 언뜻 봐선 일본 망가(일본풍의 만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데 미술사 관점에선 팝아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평가받는다. 과거 팝아트가 마릴린 먼로 등 대중적 아이콘을 모티브로 삼아 통일된 취향을 담았다면, 작가는 모던한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두고, 여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팬덤과 환상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는 설명이다.
작가의 독특한 화면은 일본 망가의 장면들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들, 때로는 동시대 걸그룹의 모습까지 한데 뒤섞은 결과물인데, 이를 통해 각각 개별적인 취미를 찾아 나서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을 대변해 MZ세대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주혜인 디렉터는 “일본에서는 팝아트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 이후 차세대 작가로 아마노 타케루가 주목받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감각적이고, 개성 넘치는 화면이 MZ세대 코드와 부합되는 점이 있다”며 “과거 미술품 컬렉터 층은 5060세대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현 시대엔 MZ세대의 취향, 코드가 미술계에 유행처럼 번지며 3040세대의 유입이 많아졌다. 현장에서도 이 관심이 체감됐다”고 말했다.
작품은 백화점 3층과 1층과 2층 사이 마련된 ‘메자닌 갤러리’에 설치됐다. 메자닌 갤러리는 2020년 8월 신세계가 아트와의 접점을 늘리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신세계갤러리는 평균 한 달을 기점으로 작품을 재배치하고, 중간중간 상설전 및 기획전도 꾸준히 선보이는데 3층과 메자닌 공간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3층은 붉은 벽을 배경으로 각각의 작품이 돋보이는 소규모 갤러리가 곳곳에 배치된 느낌이고, 메자닌은 열려 있는 화이트 큐브 같은 느낌으로 각각의 개성이 있다.
주혜인 디렉터는 “유동인구가 많은 3층 에스컬레이터 쪽에 전시의 메인 작품을 배치해 공간을 찾는 순간 작품을 마주할 수 있게 했다. 꼭 전시를 보러 오지 않았더라도 이를 통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연스럽게 이 관심이 메자닌에 이어지도록 작품의 효과적 분산 배치에 신경썼다”고 말했다.
6월 24일 전시와 연계해 작가의 사인회가 진행됐는데, 다양한 팬층이 방문했다. 전시 초기에 이미 대표작 비너스를 비롯해 몇몇 작품이 판매됐을 정도로 전시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에서도 전시가 열렸다. 그랜드 조선 부산 4층에 위치한 OKNP(옛 가나부산) 갤러리에서 전시를 마련했다. 주혜인 디렉터는 “아마노 타케루의 다채로운 작업 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고 말했다.
예술과 백화점이 만나 이룬 시너지 효과
신세계백화점은 이번 전시 이전에도 각 지점을 활용해 김창열의 ‘물방울, 순간에서 영원으로’전, 청년 작가들의 작품 100여 점을 전시는 ‘대전 유스 아트 페스티벌’, 다양한 가격대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블라썸 아트페어’ 등 예술과의 만남의 장을 꾸준히 마련해왔다. 강남점에서는 아마노 타케루 전시와 동시에 옥상 정원을 활용해 김우진 작가의 야외 특별전을 여는 등 전시의 다양화를 꾀하고 있다.
지금이야 백화점의 ‘아트 마케팅’이 흔한 시대지만, 신세계가 예술과 함께 걸어온 역사는 오래 됐다. 1966년 백화점 본점에 상설 전시장을 개관하며 사진, 공예, 서예, 고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전시를 선보였고, 1995년 광주신세계갤러리, 1997년 신세계 인천점 갤러리를 신설했다. 이후 2005년 본점에 백화점 쇼핑공간과 문화홀을 활용해 복합문화 공간을 꾸렸고, 2009년 신세계갤러리 샌텀시티, 2016년 12월 대구신세계갤러리를 개관했다.
진화는 멈추지 않았다. 백화점을 찾는 고객이 보다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게 강남점을 ‘아트 스페이스’로 재구축했다. 2020년 강남점 3층 1050평의 대규모 명품 매장을 리뉴얼하면서 특히 예술과의 조화에 힘을 썼다.
백화점 곳곳을 거닐 때 예술 작품을 자연스럽게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했고, 작품 구매에 관심 있는 고객이 바로 상담할 수 있도록 전문 상주 인력을 뒀다. 각 지점마다 전시 기획부터 판매까지 담당하는 갤러리팀을 갖췄고, 본사의 갤러리팀이 이를 총 관리하며 전문성도 놓치지 않았다.
주혜인 디렉터는 “신세계갤러리는 과거 고객에게 문화 서비스 차원에서 보여주기 위한 전시를 열거나, 좋은 지역 작가를 소개하는 장으로 많이 활용돼 왔다”며 “하지만 소비력은 갖췄는데 작품에 대한 정보가 없어 진입 장벽을 체감한다는 고객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작품 구매에 대한 높은 수요를 파악했다. 이후 강남점의 아트 스페이스를 기점으로 예술과 마케팅을 보다 효과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효과는 상당하다. 기존 백화점을 자주 방문하던 고객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예술 작품으로 이어졌고, 신세계백화점은 ‘문화 예술의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 브랜드 이미지 제고는 매출 상승으로도 이어지며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냈다. 아트 스페이스 오픈 초기 당시 약 한 달 동안 강남점 명품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7.1% 신장했고, 작품 매출액은 세 달 만에 약 5배 수직 상승했다.
올해 전반적인 경기 침체에도 강남점의 흥행 기세는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매출 2조 8398억 원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엔 매출 3조 원 돌파를 눈앞에 앞뒀다. 2019년 ‘국내 첫 2조 점포’ 타이틀을 획득한 지 불과 4년 만의 성과다.
신세계갤러리는 앞으로도 기획력 있는 전시로 아트 마케팅을 적극 전개한다는 계획이다. 아마노 타케루 이후에도 굵직굵직한 하반기 전시를 준비 중이다. 이를 통해 신세계백화점을 문화·예술이 결합한 복합공간으로 만들어 ‘미래형 백화점’으로 만들겠다는 방침이다.
주혜인 디렉터는 “하반기엔 한국 현대미술 거장인 천경자의 판화전을 시작으로,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의 소품을 모은 전시를 준비 중이다. 소품전은 100~300만 원대로 작품 가격을 합리적으로 구성하며, 초보 컬렉터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한다”며 “주목되는 작가로는 류노아를 소개한다.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라익스아카데미를 거친 작가는 독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국내엔 아직 많이 노출되지 않은 작가로, 그의 재능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자리를 만들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도 신세계갤러리는 문화를 통해 고객과의 소통하고, 차별화된 쇼핑 경험을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