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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마우리치오 카텔란 떠난 자리에 김범이 풀어놓은 수수께끼들

읽어야 하는 그림부터 수업 듣는 돌까지…상상에 한계 짓지 않는 작품들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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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53호 김금영⁄ 2023.08.02 10:53:29

다큐멘터리 속 쫓는 것은 영양, 쫓기는 것은 치타다. 사진=김금영 기자

영상에서 치타와 영양이 서로 쫓고, 쫓기고 있다. 흐린 눈으로 빠르게 훑으면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을 그저 틀어놓은 것이라 여길 법하다. 그런데 가만히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쫓는 것이 영양, 쫓기는 것이 치타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다큐멘터리를 녹화한 뒤 원본 영상에서 치타, 영양의 위치를 바꿔놓은 결과다. 아주 거대한 변화를 준 것도 아니고 단지 위치만 바꿨을 뿐인데 반전의 충격은 상당하다.

리움미술관이 한국 동시대미술작가 김범의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을 12월 3일까지 연다. 올 상반기에 25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끌어들이며 흥행한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에 이어 하반기를 여는 대규모 전시이자, 국내에서 13년 만에 열리는 김범의 단독 개인전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회화, 드로잉, 조각, 설치, 영상, 책 등 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르며 김범의 1990년대 초기작부터 대표 연작까지 아우른다.

'임신한 망치'는 평범한 망치의 손잡이 부분을 볼록하게 만들어 평범하지 않게 만들었다. 사진=김금영 기자

앞선 카텔란의 전시는 벽에 바나나를 붙여놓은 대표작 ‘코미디언’을 비롯해 벽에 걸린 작가를 똑 닮은 조형물, 히틀러를 연상케 하는 무릎 꿇은 조각, 운석을 맞고 쓰러진 교황의 모습, 벽에 처박혀 얼굴이 보이지 않아 뒷모습이 메인이 된 말 등 작품마다 한눈에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비주얼이 특징이었다. 이슈도 많았다. 노숙자 모양을 한 조형물 옆에 어떤 관람객이 바구니를 두고 가 이곳에 사람들이 모금(?)을 하기도, 전시장을 방문한 한 대학생이 바나나 작품을 먹어버리기도 하는 등 전시기간 내내 이슈가 이어졌다.

그와 비교해 이번 전시는 다소 비주얼적으로, 분위기적으로도 차분해진 느낌이다. 캔버스엔 직관적인 그림 대신 여러 텍스트가 보이고, 전체적인 색감 또한 단정해졌다. 그런데 마냥 차분해진 것은 아니다. 조용한 줄 알았던 전시장 어느 한켠에선 “악!” 하는 의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너무 익숙해서 이미 알던 것들이라 여겨졌던 작품들은 보면 볼수록 수수께끼를 푸는 듯 묘한 매력을 드러내면서 뜻밖에 뒤통수를 맞는 흥미로운 반전까지 준다.

'자화상'엔 그 어떤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김금영 기자

카텔란과 김범의 전시를 모두 기획한 리움미술관 김성원 부관장은 “김범은 단순한 한 마디,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기 특히 힘든 작가”라며 “허구의 세계를 어떻게 현실로 가져오고, 이 과정에서 미술의 역할은 무엇인지 늘 질문을 던지는 그의 작업은 언뜻 보면 볼거리가 없어 보이지만 오히려 무궁무진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김 부관장에 따르면 김범은 평소 작업을 할 때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지만, 이를 표현할 땐 가능한 최소화하는 스타일이다. 예컨대 전시장 초입에 망치 하나를 덩그러니 갖다놨는데 망치 자체는 흔한 사물이다. 그런데 손잡이 부분이 볼록한 것이 단순한 망치는 아닌 듯 싶다. 작품명은 바로 ‘임신한 망치’.

바닥에 눕혀진 캔버스와 벽 모양으로 꿰매진 캔버스 등이 설치됐다. 사진=김금영 기자

김 부관장은 “김범은 모든 사물에 생명,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또 망치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도구적 특징이 있다”며 “작가는 ‘낳다’는 표현이 가진 중의성, 즉 배 속의 아이를 내놓는다는 뜻과 공구가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뜻을 하나의 작품 안에 포개 놓았다”고 설명했다.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읽어야’ 하는 캔버스들도 가득하다. 이는 작가가 캔버스의 물성을 탐구한 작업들이다. 캔버스는 일반적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뒷배경이라고 인식되는데, 작가는 이 캔버스를 앞으로 끌어내며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부순다.

'두려움 없는 두려움'은 벽을 캔버스로 사용한 작품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대표적으로 ‘자화상’엔 그 어떤 인물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캔버스에 뚫린 세 개의 구멍에 주머니가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는데, 이 안에 작가가 여러 메시지를 넣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관람객은 주머니를 직접 열어볼 수 없어 안에 무엇이 들어있고,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있을지 상상만으로 각자의 자화상을 머릿속에 그려가야 한다. 즉 캔버스는 단순 도구가 아니라 사람들 머릿속에서 상상을 그려내는 무한의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

김 부관장은 “김범은 보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과 다양한 인식, 생각을 나누는 인터랙티브(상호작용)한 화면을 보여준다. 텍스트를 작업에 적극 차용한 그의 실험적인 작업은 비물질로서의 예술이 가능함을 입증한다”며 “관람객은 각자의 머릿속에 풍경화 등 여러 그림을 그리고 소유하는 경험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리미인줄 알았던 것은 구멍이 뚫린, 물을 부을 수 있는 주전자였고, 라디오 아래엔 다리미판이 달렸으며, 주전자엔 주파수를 잡을 수 있는 안테나가 설치돼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보이는 것과 실체 간의 간극, 거기서 생기는 상상의 가능성

앞과 뒤가 다른 사자 모형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또 다른 공간에서는 벽에 걸려있어야 할 캔버스를 바닥에 눕히고 여기에 발자국을 찍어 놓았다. 캔버스 위에 서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를 상상하게 하는 구도로 일반적 그림 감상법과는 다르게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두려움 없는 두려움’은 벽을 캔버스로 사용한 작품이다. 언뜻 보면 벽에 진짜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착시 현상이 일어나는데, 벽에 그린 그림 앞에 여러 그림 종이 조각들을 흩뿌려 놓은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허구적 설정이 어떻게 현실 공간과 관계를 맺어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노란 비명 그리기' 영상엔 한 강사가 나와 추상화 그리는 법을 알려준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처럼 캔버스의 물성을 시험한 작업은 ‘당신이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며 스스로를 고정된 시야, 인식의 틀에 가두지 않고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흔히들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라는 말을 쓰는데 전시장엔 앞과 뒤가 다른 사자가 등장한다. 앞에서 보면 사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형태가 보이는데, 뒤로 돌아가면 나름의 복잡한 방식으로 설계된 사자의 내부 구조가 보인다. 각각의 단면만 한정된 시각으로 봐서는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구조다.

이를 또 체감하게 한 것은 다리미, 라디오, 주전자다.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다. 다리미인줄 알았던 것은 구멍이 뚫린, 물을 부을 수 있는 주전자였고, 라디오 아래엔 다리미판이 달렸으며, 주전자엔 주파수를 잡을 수 있는 안테나가 설치돼 있어 각각의 정체성을 부인한다. 그런데 그 부인이 억지라고 느껴지기보다는 색달라 흥미롭다.

'바위가 되는 법'이 전시장 벽에 적혀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무제’와 ‘현관 열쇠’는 각각 소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관점, 열쇠의 골을 확대해 그린 그림이다. 이 사실을 모르면 그저 그런 산의 능선처럼 보인다. 이처럼 작가는 때로는 벽돌모양으로 캔버스를 꿰매 벽과 캔버스의 사이의 경계를 흩뜨리고, 어떤 방엔 난폭한 가정에 초청을 받은 상황이라는 가정을 공간에 던져놓고 관람객에게 스스로의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는 등 결코 관람자를 수동적인 위치에 있기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방식의 접근으로 사람들의 웃음이 터지는 공간도 있다. ‘노란 비명 그리기’ 영상엔 한 강사가 나와 추상화 그리는 법을 “참 쉽죠?”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밥 아저씨처럼 가르쳐주는데 붓질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매번 소리를 지른다.

사람처럼 수업을 듣고 있는 사물들. '교육된 사물들' 연작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강사는 그림을 그리는 선의 움직임에 슬픔, 고통, 외로움 등 다양한 감정의 비명소리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며 선 하나를 그릴 때마다 매번 다른 톤으로 비명을 지르는데, 너무도 진지한 태도와 상반되는 상황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해학적인 상황을 만든다. 작가는 이를 통해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과 관념을 포착하는 불가능한 과업에 기꺼이 매진하는 예술가의 애환을 드러낸다.

전시명이기도 한 ‘바위가 되는 법’은 ‘한 장소를 정하되 가능하면 다른 바위가 많은 곳에 자리 잡으면 도움이 된다’, ‘움직이지 않고 숨소리를 죽인다’ 등 사람들에게 사물이 되는 법을 지시하는데, 바위, 나뭇가지, 물뿌리개, 선풍기 등 사물들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학생이 돼 수업을 듣고 있는 정반대의 상황도 함께 펼쳐진다. ‘교육된 사물들’ 연작으로, 여기엔 작가가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바위에게 정지용의 시를 읽어주는 영상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사진=김금영 기자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은 테이블 위 자리한 돌에게 정지용의 시를 읽어주고 설명하는 교육 과정을 기록한 영상으로 구성된다.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에선 드넓은 바다 위를 누비고 있어야 할 배가 오히려 바다가 없이 지구가 육지로만 돼 있다고 배운다. 마치 교육보다는 세뇌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배웠던 것, 또는 쌓았던 지식이 때로는 통제된 교육을 통해 한정된 세계의 이야기만 다뤘던 것은 아닐지, 그 너머엔 더 넓은 세계가 있는 걸 우리는 보지 못했거나, 또는 보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닌지 전시는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을 권유한다.

리움미술관 김성원 부관장. 사진=김금영 기자

실제로 각 작품들은 짧은 시간 지나치는 것보다 앞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해야 더 보는 맛이 있다. 다만 충분히 오래 생각한 뒤에 작품명을 보기를 바란다. 작품명을 보는 순간 ‘이걸 표현한 것이었구나’ 즉 작품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된다. 이 스포일러는 미궁에 빠졌던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전해주지만, 작품명을 먼저 볼 시엔 이미 한정된 시야와 상상 안에 갇히는 한계가 발생할 수 있다.

김 부관장은 “김범은 1990년대 한국 동시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작가”라며 “그의 작업은 보이는 것과 그 실체의 간극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특유의 재치로 우리를 웃게 만들지만, 농담처럼 툭 던진 의미심장한 이미지는 자기성찰의 장을 열어주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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