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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아슬아슬 곡예하며 탑 쌓고 천진난만 전쟁놀이 하는 그들의 사연

아르코미술관, 기획 초대전 ‘노원희: 거기 계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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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54호 김금영⁄ 2023.08.17 08:47:12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노원희: 거기 계셨군요'에 작품이 설치된 모습. 사진=안용호 기자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적 팬데믹 이후 지역의 재정의에 접근하는 ‘일시적 개입’전, 아르코미술관의 역사와 장소의 특수성에 주목하는 ‘기억·공간’전 등 현 시대의 여러 담론에 접근하는 전시를 선보여 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이 이번엔 한 작가에 주목했다. 그간 주로 단체전을 열어왔던 터라 더욱 주목되는 자리다. 전시의 주인공은 노원희 작가.

아르코미술관이 기획 초대전 ‘노원희: 거기 계셨군요’를 연다. 노원희는 1948년 경북 대구 출생으로,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 1977년 문헌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80년 소그룹 미술운동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82년부터 2013년까지 부산 동의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시대의 변천에 따른 역사와 현실 인식을 토대로 개인과 집단이 만들어 낸 사회·정치·문화의 정황을 심리적인 풍경으로 포착하면서 우리시대의 모습 이면을 표현해 왔다.

아르코미술관 임근혜 관장. 사진=안용호 기자

아르코미술관 임근혜 관장은 “아르코미술관은 지난 3년 팬데믹을 겪으며 환경, 생태, 지역 등 첨예한 사회 의제를 전시 주제로 발굴, 선보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 가운데 재조명이 필요한 중진·원로작가에 주목하는 기획 초대전 또한 꾸준히 열어 왔다”며 “이번 기획 초대전의 주인공인 노원희는 지역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조용히 활동해 왔다. 젊은 세대에게 영감을 주고 비전을 제시하며 존경을 받아 온 작가”라고 소개했다.

작가는 아르코미술관과도 오랜 인연이 있다. 작가가 멤버로 활동했던 현실과 발언 창립전이 본래 1980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검열로 인해 취소됐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2023년 아르코미술관에서 그의 개인전이 마련된 것. 임근혜 관장은 “본래 아르코미술관과 연이 있는 작가의 개인전은, 내년 개관 50주년을 앞둔 아르코미술관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예술의 사회적 역할도 고민해보는 뜻 깊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원희 작가. 사진=안용호 기자

특히 임근혜 관장은 노원희를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용기를 가진 작가”라고 강조했다. 하루하루 바쁘고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사회에서 제 삶 하나 살아내는 것도 버거운데 작가는 시선을 자신에게만 두지 않고 오히려 주위에 적극적으로 뒀다.

 

이번 전시는 그런 작가의 시선을 크게 공적, 사적 영역으로 나눠 보여준다. 특히 작가의 신작 회화들도 첫 공개된다. 회화, 대형 천 그림, 참여형 공동작업, 신문 연재소설 삽화 등 작가의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작업세계를 아우르는 작품 95점과 아카이브 자료 39점을 선보인다.

그림에 덕지덕지 붙은 포스트잇의 존재감

헐벗은 나무 위 수십 개의 스피커가 달린 '나무'에선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적으로 이뤄지는 억압적 소통이 느껴진다. 사진=안용호 기자

공적 영역을 다루는 제1전시실은 작가가 한국사회의 변화의 모습을 감지하고 그려낸 심리적 풍경의 작품으로 전시의 문을 연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거리에서’(1980), ‘한길’(1980), ‘나무’(1982)도 여기서 볼 수 있다. 모두 1980년대 초기작으로, 밝고 희망차기보다는 음울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공통적으로 발견돼 눈길을 끈다.

전시를 기획한 아르코미술관 노해나 큐레이터는 “1980년대는 오랜 군부독재를 거쳐 빼앗긴 정치적 자유가 회복되면서 민주화, 산업화의 성숙단계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민중문화운동을 추동한 거대서사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사라지고, 산업재해를 비롯해 자본주의 경쟁에서 외면당한 사람들도 여럿 발생한 시기이기도 했다”고 짚었다.

예컨대 ‘거리에서’는 대구에서 실업자들이 모여 야바위를 구경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산하다. ‘한길’ 속 전쟁놀이를 하는 주역은 어린 아이들이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도 하는 이 작품에서 아이들은 먹구름 아래 뛰놀고 있는데 그 모습은 천진난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폭력성도 엿보인다. 헐벗은 나무 위 수십 개의 스피커가 달린 ‘나무’에선 쌍방향이 아닌,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억압적인 소통이 느껴진다.

산업재해를 다룬 신작 '탑'. 의수와 의족을 낀 여러 사람들이 서로를 지탱하며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탑을 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안용호 기자

산업재해를 다룬 신작 ‘탑’(2023)도 눈길을 끈다. 의수와 의족을 낀 여러 사람들이 서로를 지탱하며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탑을 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노해나 큐레이터는 “노동에서 항상 과거부터 문제시돼온 하청구조에서 발생하는 인권문제의 취약함과 여러 모순을 재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작품들을 보다보면 말풍선 같은 하얀색 사각형이 그려진 경우가 있어 호기심을 자아낸다. 이 사각형은 때로는 비어 있기도, 때로는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힌 포스트잇처럼 작품에 등장한다. 이는 ‘말 없는 그림으로 발언하기’로 풀이되는 작가의 표현 방식 중 하나다. 과거 ‘말의 시작’(2015)엔 하얗게 지워진 빈 사각형 프레임을 들고 있는 한 사람이 등장했는데, 이 사각형 프레임은 인물의 입 부분에도 자리했다. 프레임들은 거대한 권력 아래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침묵의 공간을 상징하면서도 그 침묵 아래엔 어떤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지 스스로 생각해보게끔 이끌었다.

신작 '사복으로 갈아입히고'(맨 왼쪽)엔 산업재해 피해자들의 증언을 적어놓은 포스트잇이 캔버스 위에 가득 붙어 있다. 사진=안용호 기자

반면 신작 ‘사복으로 갈아입히고’(2023)엔 작은 사각형들이 캔버스 위에 포스트잇처럼 붙었는데, 여기에 각종 산업재해 피해자들의 증언을 적어놓아 회화의 말하기 기능을 보다 강화했다. 어찌 보면 여러 현장에서 추모의 기능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포스트잇을 떠올리게도 한다. 작가는 산업재해 이야기를 그릴 때 항상 각각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작가는 “산업재해는 이 시대의 노동 현실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본주의의 태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밖에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로 체제가 전환되고 경쟁이 고도화되며 생존과 존엄성을 위협받아 오히려 허무주의에 빠졌던 젊은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너나 열심히 하세요’(2015)와 ‘낮잠 좀 자지 마세요’(2005)를 비롯해 극도의 생존경재에서 청년의 고단한 삶을 그리는 ‘라면 먹는 사람들’(2002) 등도 마련됐다.

여성부터 인류 보편 서사까지 확장되는 시선

제2전시실 도입에 대형 천 그림 '몸 53'이 설치된 모습. 사진=안용호 기자

보다 사적 영역으로 접어드는 제2전시실은 작가의 여성 서사에 대한 관심부터 인류 보편 서사에 대한 작가의 성찰까지 아우르는 회화와 대형 천 그림 등을 보여준다. 노해나 큐레이터는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젠더 문제들이 가시화되고, 일련의 사건들이 소용돌이칠 때 작가는 여성으로서 자신을 일깨우고 여성 서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며 “일상과 사적 공간에 침투하는 폭력과 억압, 그리고 혐오의 정치를 목격한 작가는 사회 현실과 미래세대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작품을 통해 내비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여러 관습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고 말했다.

전시실 도입에 설치된 대형 천 그림 ‘몸 53’(2023)은 ‘몸’ 연작(2018~2019)에서 이어진 작품으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몸짓, 감정을 통해 인간사를 아우르는 파노라마를 제시한다. 이는 작가가 그간 추적해 온 인간의 보편적 서사를 망라한다.

'무기를 들고'엔 여러 인물들이 무기가 아닌 프라이팬을 들고 서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무기를 들고’(2018)엔 여러 인물들이 무기가 아닌 프라이팬을 들고 서 있다. 부엌의 평범한 가사 도구가 혁명 도구로 탈바꿈한 이 그림은 1970년대 미국에서 불거졌던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을 떠올리며 작가가 그린 것이다. 살림살이를 무기처럼 들고 항의하는 인물들은 당시 한국의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여성들의 강한 의지와도 연결된다는 설명이다.

같은 2018년 작인 ‘참전 이야기1’과 ‘참전 이야기2’는 참전 군인인 가장의 폭력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거대 국가적 차원에서 전쟁의 폭력을 경험한 한 인물의 경험이 사적인 영역인 가정에서도 이어지며 일상 속 폭력의 악순환을 작가의 예민한 시각으로 담아냈다.

2018년 작인 '참전 이야기1'과 '참전 이야기2'는 참전 군인인 가장의 폭력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에서는 2007년 연재됐던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를 위해 작가가 그렸던 삽화도 볼 수 있다. 소설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판타지적 묘사가 특징인데, 삽화 또한 이국적이고 초현실적인 장면을 담아냈다.

 

특히 105회 삽화는 소설의 주인공인 바리의 꿈속에서 실종된 남편 알 리가 닭장 같은 철망 안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이 인물의 형상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몸’ 연작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노해나 큐레이터는 “바리데기 삽화 연작은 작가의 기존 회화와는 다른 경향의 작품이지만, 영겁의 삶을 담담히 살아가는 주인공 바리와 같은 인간 서사는 작가가 그동안 주목해온 개인의 삶의 형상을 비춰볼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를 위해 노원희 작가가 그렸던 삽화. 사진=김금영 기자

또한 현실과 발언 멤버로 활동했던 시기부터 현재까지 작가의 발자취를 살필 수 있는 아카이브 자료도 제2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 제목 ‘거기 계셨군요’는 노원희의 작가노트에서 인용한 문장이라고 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누군가의 자리를 발견한 뒤 따뜻한 말을 건네는 듯한 이 문장은 작가가 지난한 투쟁의 시간, 사회에 의해 고통 받은 인간의 삶에 보낸 연민을 반영한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그림을 통해 관심을 갖고 보고자 하는 사회의 타자들의 형상을 드러낸다. 전시는 아르코미술관에서 11월 19일까지.

현실과 발언 멤버로 활동했던 시기부터 현재까지 노원희 작가의 발자취를 살필 수 있는 아카이브 자료들. 사진=안용호 기자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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