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5호 김금영⁄ 2023.09.07 09:47:49
1991년 여름, 작가는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관’(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서 초록빛의 이끼를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후 이 퍼포먼스는 1993년부터 2020년까지 세 패널의 회화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으로 재구성됐다. 첫 퍼포먼스부터 회화로의 재탄생까지 무려 30년여의 시간이 걸린 셈. 퍼포먼스 당시 옷을 입고 있었던 작가는 그림엔 나체로 등장했고, 대신 주변의 수풀들이 그의 몸을 감쌌다. 가장 원초적인 자연에 도달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는 보다 강하게 드러났다.
이보다 앞선 1981년에도 작가는 자신이 설립한 ‘야투(野投: 들로 던진다)-야외현장미술연구회’의 창립 야외전 당시 금강 변에 자란 풀잎으로 몸을 동여매고 백사장으로 걸어가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는데, 이 또한 2016년부터 올해까지 걸쳐 회화 ‘온몸에 풀꽂고 걷기’로 새 생명을 얻었다. 회화에선 본래 퍼포먼스 시 수풀에 가려져 있던 인물의 형태가 더 잘 드러나 눈길을 끌었다.
거슬러 올라가 1975년엔 작가가 자연 현장 기반 퍼포먼스를 시작하게 된 근본적인 계기가 있었다. 1975년 8월 1~4일 안면도 꽃지 해변에서 이뤄진 한국미술청년작가회의 ‘제1회 야외작품을 위한 캠핑’에서 작가는 공룡알이 나뒹구는 태초의 자연을 상상하며 길이 70cm, 지금 40cm의 알 모양 석고 조각 30여 개를 해변에 배치했다.
태초 자연의 모습처럼 아무런 규칙 없이 놓인 조각들을 보고 작가는 해방감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느꼈고, 이는 그가 자연미술을 지속하는 동력이 됐다. 해당 퍼포먼스도 2015~2020년에 걸쳐 회화 ‘1975 여름 안면도 꽃지 해변의 기억’으로 탄생했는데, 특히 해변가에서 두 팔을 크게 벌려 자연과 호흡하고 있는 작가의 형상이 눈에 띄었다.
이 모든 퍼포먼스 당시의 사진과 회화가 한 전시장에 함께 걸렸다. 같은 화면인 것 같으면서도 세세하게 살펴보면 또 다른 모습이 발견되며 각각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드러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퍼포먼스와 회화의 주인공, 바로 임동식 작가다. 가나아트가 ‘자연미술가’로 불리는 임동식 작가의 개인전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 임동식’을 10월 1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관에서 연다.
작가가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지속해 온 회화는, 과거 진행한 야외작업의 순간을 단순 그린 차원에서 더 나아가 자연 현장에 중심을 두고 수행해온 예술의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 그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주목해 가나아트는 전시 제목과 동명인 작품 ‘이끼를 들어올리는 사람’을 비롯해 ‘예술과 마을’, ‘친구가 권유한 풍경’, ‘비단장사 왕서방’ 등 작가의 주요 회화 연작을 선보이면서 한국 실험 미술의 가능성은 물론 예술의 영역을 일상으로 확장해 온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한다.
자연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다
전시 도입부엔 작가가 스스로 직접 행한 퍼포먼스에서 출발한 작품들이 주로 설치됐다. 작가는 “작업 초창기엔 퍼포먼스를 주로 했다. 일탈과도 같았다”며 “사진과 비디오 등을 통해 퍼포먼스를 기록했는데, 지나간 행위를 현재로 소환하고자 1992년부터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릴 때 많게는 무려 30년까지 시간이 대체로 오래 걸리는 건 작업에 대한 작가의 애착, 그리고 상당한 작업량 때문이다. 작가는 “적게는 1~2년부터 어떤 작품은 다 그릴 때까지 30년까지 걸리기도 한다. 그림을 그릴 때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그림을 보면 아까와 다르게 보여 덧칠해 그리고 또 그리는 경우가 많다. 마음에 들 때까지 그린다. 30년 걸린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의 경우 처음엔 어둡게 그렸다가 햇빛 찬란하게 바꾸자는 생각에 밝게 고쳤는데, 또 너무 밝아지면 어색해서 적절하게 융합시키는 과정이 또 오래 걸렸다”며 “또 30년 동안 한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수없이 새로운 그림들을 그려 많게는 80개 그림을 동시에 진행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나는 사서 고생한다. 생각이 웬수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그림은 미련해야 그린다’고 말한다”며 작가는 웃었지만 마치 스스로를 다스리고 성찰하는 수행과도 같은 작업, 그 결과물은 작품들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작가는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 보니 나름의 문맥도 생기고 양도 어느새 많아졌다. 우스갯소리로 담배피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재떨이가 꽁초로 가득 차는데 무의식 중 꾸준히 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겐 10~20분씩 조금이라도 매일 그림을 그리는 습관이 있었고, 꽁초가 수북하게 쌓인 재떨이처럼 내 작업실엔 그림이 가득 쌓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장 한켠엔 실제로 작가의 작업실 공간을 재현해 놓기도 했다. 자그마한 규모의 공간에 그림이 가득 찼는데 자연의 모습이 빠진 화면이 단 하나도 없다. 특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발견되는데 작가는 농민을 ‘위대한 자연생명예술가’라 칭한다. 이런 그의 생각은 대표 시리즈 중 하나인 ‘예술과 마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전시장 도입부를 지나 2층 전시장엔 작가 본인뿐 아니라 주변인의 퍼포먼스까지 아우른 작업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농민의 모습이 눈에 띈다.
10년 동안의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1990년 한국으로 돌아온 작가는 고향인 공주 원골마을에 정착해 새 프로젝트 예술과 마을을 시작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왔으며, 자연 가운데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예로부터의 사상에 기반한 이 프로젝트는 예술과 농사가 다르지 않다고 보는 ‘예즉농농즉예(藝卽農 農卽藝)’ 미학을 중심으로 한다. 이에 따라 작가는 호박을 심거나 고목에 난 구멍을 개울가의 돌로 막는 등 농촌의 일상적인 행위 모두를 예술로 여겼다.
특히 마을 농민 중 한 명인 우평남과의 협업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술과 마을은 ‘자연예술가와 화가’, ‘친구가 권유한 풍경’ 등 다양한 시리즈로 변주됐는데 우평남과 함께 산과 들로 다닌 풍경이 모두 예술이 됐다.
또 다른 화면에서는 왕서방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비단장사 왕서방’의 주인공으로, 예술과 마을이 농경문화에 대한 존중을 담았다면, 비단장사 왕서방은 잊힌 농경문화에 주목하면서 비단이라는 상징적인 주제를 통해 자연과 전통으로부터 멀어지는 세태를 비판적으로 꼬집는다.
푸른 빛의 거대한 바다, 숲 등 자연의 대지로 시작된 전시의 피날레는 대지로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듯한 빛나는 별빛들이 장식한다. 바쁘고 삭막한 시대에 자극적인 이미지까지 넘쳐나는 시대에 꾸밈없이 자연 본연의 풍경들을 담은 고요하면서도 장엄한 작가의 화면은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준다.
작가는 “현재 우리는 굉장히 발전된 도시에 살고 있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농경사회에 살았고, 더 과거로 가면 자연에서의 수렵, 채집 생활이 있었다. 발전된 사회에 사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원초적인 자연을 동경하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며 “세상이 점점 빨라지고 오래 살기 위한 기술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 우리의 원인 모를 불안 또한 커졌다. 이 기류 속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는 그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람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복 받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선희 가나아트 고문은 “최근 현대미술을 살펴보면 강력한 어법을 주로 많이 쓰는데 이 가운데 차분한 기조를 유지하는 임동식 작가의 화면은 오히려 그래서 더 돋보인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화면인데 굉장한 감동을 준다. 작가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라며 “꽃과 나무 가꾸기를 즐기고, 어린 토끼를 키웠던 이런 작가 스스로의 소박하고 행복한 경험이 다 작품에 나온다. 예술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 온 그는 ‘투명한 예술’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그는 이어 “현대인은 빠른 속도에 정신없이 살다가 공허함, 상실감을 느끼곤 한다. 이 가운데 스스로에 대한 많은 사유와 반성을 담은 작가의 고요한 풍경은 한없는 평화로움을 준다”며 “시작은 몸짓부터 드로잉, 페인팅까지 끊임없이 현실의 삶과 밀접한 자연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미술을 일상 가까이로 확장하는 작가의 작업을 만나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