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면 편집위원(연극영화학 박사)⁄ 2023.09.15 15:04:52
1910년대 전반 무렵 이미 성공한 문학 작가로 인정받고 있던 30대 후반의 헤세에게는 제1차대전(1914~1919년) 중에 전쟁 반대 문제와 가족들의 와병으로 큰 위기가 닥쳐왔지만, 그는 1916~1917년 스위스 루체른 근교의 요양원에서 정신 치료를 받으며 점차 위기를 극복해갔다. 이 시기에 헤세는 특히 미술 테라피 방법을 시도하며 출구를 찾았으며, 또 그림을 통해 예술적으로도 유익한 자극을 받았다.
정신적 위기를 극복한 헤세 – 몬타뇰라에서 다시 시작하다
당시(1917년, 40세) 헤세의 미술 공부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루체른에서 멀지 않은 로카르노 근교에 있는 스위스 화가 구스타프 감퍼(Gustav Gamper 1873~1948년)로부터 수채화를 배운 점이다. 그러니까 헤세는 본래 미술에 대해 일찍이 20대 초반부터 깊은 관심을 갖고 이론서들을 읽으며 공부했고, 이탈리아에 여행 가서 미술관을 방문할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는 뮌헨 등지에서 여러 전시회를 관람하며 미술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고 있었다. 당시 뮌헨은 표현주의 운동을 시작한 청기사파의 활동지였으며, 헤세 그림에서도 그 영향을 볼 수 있다.
직접 그림 그리는 작업은 그의 나이 39~40세 때부터 시작됐다. 그의 나이 40세 때 만난 미술 선생 구스타프 감퍼는 시와 비평, 에세이 등을 쓰는 작가이고 음악가였기에 역시 문학-미술-음악에 관심이 많은 헤세에게 영양가 높은 자극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서 헤세는 1917~1918년 취리히 등 인근 지역을 여행하고 전시를 둘러보았다. 1910년대의 취리히는 혁신적 예술운동이었던 다다이즘(dadaism)의 주요 무대였다. 이 운동은 헤세가 동조-공감하는 당시 유럽의 여러 사상적 경향과 예술 방식을 포함하고 있었다.
다다이즘 예술가들은 제1차대전에 대한 비판과 평화주의, 反민족주의 생각을 바탕으로 현실 재현적인 리얼리즘을 거부하며 추상을 옹호했기에 입체파, 미래파, 표현주의 운동 등과 같은 맥락에 있었다.
헤세는 펜과 목탄, 파스텔, 수채, 유화 등 여러 수단으로 그림을 시도해보았는데, 특히 수채에 매력을 느꼈다. 그것 역시 당시의 미술 선생 감퍼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감퍼는 주로 자연 풍경을 수채화로 그렸기 때문이다. 감퍼의 작풍은 헤세의 풍경 수채화에 – 특히 초기(1920년대) 수채화에 -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런 요소들을 감퍼와 헤세의 풍경 수채화에서 찾아보면, 단순하고 편안한 구도에 온화한 색감의 사용, 그림 속의 시적 서정성과 가벼운 리듬감의 함유 등이 있다. 더불어 동시대 미술의 표현주의 청기사파의 영향 등이 보인다.
이렇게 헤세는 그림에 몰두하면서 30대 후반에 닥쳐온 정신적 위기에서 벗어났고, 문학 활동도 재개했다. 1919년 들어 그동안 집필했던 <데미안>을 출간했고, <동화집>과 정치 평론서 <짜라투스투라의 귀환>도 냈다. 헤세는 문화 예술 잡지 <비보스 로코>(Vivos roco)를 창설하고 편집에 참여했다.
이제 1919년 5월, 42세가 되어가던 해 봄에 헤세는 스위스 남부 지역 테신(Tessin/이탈리아어 지명은 티치노/Ticino) 주의 산동네 작은 마을 몬타뇰라(Montanola)로 이사했다. 헤세(1877~1962)는 여기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43년을 살았고 이곳에 묻혔는데, 인생 후반기를 몬타뇰라에서 보낸 셈이다. 그래서 몬타뇰라는 그에게 ‘제2의 고향’(die zweite Heimat)이다. 그러면, 몬타뇰라는 대체 어디이고, 어떤 곳인가? 국내 독자들에게 생소한 작은 동네이기에 이곳 지형과 환경을 먼저 설명한다.
산동네 몬타뇰라
몬타뇰라는 이탈리아 쪽으로 뻗어있는 테신 주의 남쪽, 이탈리아어 사용 지역이다.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접경 지역이며, 알프스 산마루에 동서로 말발굽(U자) 모양으로 걸쳐있는 거대한 루가노 호수에 둘러싸여 있다. 여기서 잠시 지도를 보며 테신 주와 몬타뇰라를 찾아보자.
한마디로 몬타뇰라는 알프스 산중의 루가노 호수를 끼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해발 467m 산언덕에 있기에 높은 산 속은 아니고, 약간 올라간 정도이다. 오늘날 몬타뇰라에 가려면 루가노 시 중앙역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가량 산으로 올라가면 된다.
헤세가 왜 이런 산동네로 가 오랫동안 살았는지에 의문을 가질 만 하지만, 실제로 이곳에 직접 가보면 그 의문의 절반 이상이 풀린다. 필자 역시 그런 질문을 갖고 있다가 2019년 8월에 몬타뇰라를 직접 가본 후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이곳은 기후가 좋다. 거의 매일 흐리고 비가 오고 추운 겨울이 있는 독일과또는 대부분의 중북부 유럽 나라들과는 달리, 테신 지역은 맑은 날이 많다. 여름에는 아주 덥지 않고,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오고 습도가 낮아서 쾌적하다. 겨울에는 아주 춥지 않아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고, 눈이 와도 다음 날이면 녹는 정도라고 한다. 알프스 산중 마을이라기엔 믿기 힘든 기후인데, 이는 알프스 남쪽이 북쪽과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몬타뇰라의 헤세 기념관 주변을 돌아다녀보면, 높은 산들 사이에 거대한 호수가 루가노가 이쪽저쪽 어디를 가든 잘 보인다. 산 언덕 여기저기에 야자수가 있고, 여름에는 배롱나무(일명 백일홍)의 흰색ㆍ분홍색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어 참 보기 좋다. 게다가 주변에 대도시나 산업 시설이 없어 공기도 좋으니, 온화한 기후에 멋진 자연 풍경을 즐기며 살기 좋은 지역이다. 가히 천혜의 지역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렇기 때문에 몬타뇰라 인근 루가노 지역은 19세기 전부터 유럽 부호들의 휴양지로 널리 알려졌으며, 결핵이나 호흡기 질환 등의 치료를 위한 병원과 요양원도 있다.
이제 헤세가 살았던 시절의 몬타뇰라를 상상해보자. 물론, 그가 살았던 1919~1962년 동안의 몬타뇰라는 현재와 많이 다를 것이다. 자연과 기후는 유사하되, 그동안 인구가 많이 늘었으니 주택들이 많아지고, 도로가 넓어지고 새로 생겼을 것이다. 통계를 보면, 헤세가 이곳에 온 직후 1920년의 인구는 약 670명이고, 노년이 되었을 1950년에는 930명에 불과했으니 한적한 산동네였다. 2000년 인구는 약 2100명으로 50년 전보다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헤세 당시의 옛 사진을 보면 산 여기저기에 집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헤세는 이러한 알프스 남쪽의 작은 마을 몬타뇰라로 1919년 5월 혼자 넘어왔다. 정신질환을 앓던 부인 미아와는 이혼했고, 그녀와 낳은 세 아들(브루노, 하이너, 마르틴) 중 마르틴은 병원에 입원했고, 두 아들은 지인들에게 맡겨놓은 상태였다. 분명 고독한 상태였고, 또한 고국 독일 사회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며 알프스 산마을로 왔을 듯 하다.
그는 제1차대전 당시 ‘전쟁 반대자’, ‘조국 배신자’ 같은 비난을 받으며 배척당했기에, 독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소외감과 배신감,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혼과 아들의 와병 후 자신의 정신 치료 등으로 인한 고뇌를 안고, 헤세는 홀로 몬타뇰라로 왔다.
몬타뇰라의 작가-화가 헤세
42세가 되어갈 무렵 헤세는 몬타뇰라의 온화한 기후와 멋진 자연 환경 덕에 정신적 평온을 다시 찾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며, 문학 창작에도 다시 몰두하며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헤세는 40대 초부터 60대 중반에 해당되는 1919~1943년까지 인생에서 다시 보람찬 생활을 보내며 역작들을 썼다. 몬타뇰라 주변 풍경을 그린 ‘테신의 화가’가 되어 여러 번 전시회도 열었다.
이 당시 나온 소설들이 그에게 국제적 인정과 명성을 가져다준 <싯다르타>(1922년), <황야의 이리>(1927년), <나르시스와 골트문트>(‘지성과 사랑’, 1930년), <유리알 유희>(1943년)이었다. 시집으로는 <화가의 시>(1920년), <시 선집>(1921년), <밤의 위안>(1929년), <신시집>(1937년) 등이 있다. 사실, 헤세의 주요 문학 작품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성장기와 도약기를 거쳐 몬타뇰라에서 인생 후반기를 살면서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고 할 만하다.
1919년 5월 헤세가 몬타뇰라로 와서 거주한 집은 카사 카무치 하우스(Casa Camuzzi)였다. 3층 바로코 양식의 다소 요란한 장식이 달린 주택이었다. 건물 아래로는 나무들과 덤불이 있는 언덕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루가노 호수도 보여 전망이 좋은 곳이다. <헤세 기념관>은 이 주택의 바로 옆 건물이다. 주변은 거대한 루가노 호수에 둘러싸여 있어, 집 주변 여기저기에서 호수가 보인다. 이제 그의 그림을 살펴보자.
여기서 헤세는 그림 그리기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스케치하고 그림 그리는 것은 내게 깊은 휴식을 준다”는 말에서 그가 그림에서 정신적 안식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문학 작품을 쓰다가 시간만 나면 화구를 들고 야외로 나가 몬타뇰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이런 방식은 미술사에서 19세기 유럽의 외광파(外光派, pleinairisme)와 비교할 만하다. 이것은 화가가 실내 아틀리에를 벗어나 야외의 화창한 햇빛 아래에서 자연의 인상과 색감을 보고 느끼며 그리는 방법이다. 다만 표현에서 헤세는 19세기 외광파 화가들처럼 자연 현실의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하지 않았고 다소 추상화된 형태를 그린 점이 다르다.
헤세는 주로 수채화를 그렸지만, 펜과 색분필, 크레용 등을 사용하는 드로잉 작업도 겸했다. 대개 작은 종이(엽서, 편지)에 글을 쓰고 그 위나 아래에 그림을 그렸으며, 큰 그림이라 해도 A4 종이 정도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소품이라 할만하다. 그의 나이 40~50대였던 1920~30년대에 왕성하게 그렸고, 모두 3000여 점 정도를 남겼다.
그림은 그에게 정신적 안정과 심적 평온을 안겨주었고, 문학 창작에 또다른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몬타뇰라 초기 1919~1925년에는 문학 작품에 자신의 그림(삽화, 일러스트)을 곁들여 출간하는 시도를 했다. ‘문학과 미술의 동행’이 시작된 것이고, 그의 문학 작품에서 ‘글과 그림’(word and picture)이 공존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몬타뇰라에 온 직후 1919~1920년의 그림을 곁들인 문학 작품들로는 동화 <험난한 길>(Der schwere Weg, 1919년), 산문집 <방랑>(Wanderung, 1920년), 표현주의적 소설로서 자전적 내용을 담은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Klingsors letzter Sommer, 1920년)과 10편의 시에 각기 그림을 곁들인 시집 <화가의 시>(Gedichte des Malers, 1920년)가 있다. 실린 그림들은 몬타뇰라 주변의 한 채 집이나 건물, 언덕과 나무-꽃처럼 단순하고 작은 조각 풍경들이다. 그의 ‘글과 그림’은 이렇게 소박하게 시작되었다.
1920년대 자연풍경
그럼 이제 헤세가 몬타뇰라에서 주로 그렸던 풍경 수채화들을 1919년부터 둘러보자. 앞서 말했듯이, 그는 집 근처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변 풍경을 그렸다. 주된 소재는 마을 풍경이고 조금 넓게 보면 테신 주의 풍경이다. 즉, 헤세가 고국과 떨어져 알프스 산중으로 들어와 그린 건 자연이었다. 그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의 세부 모습을 발견하고 그렸다. 몬타뇰라의 집과 교회, 창고, 나무와 꽃-덤불, 산과 호수, 언덕과 샛길이었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한적한 자연 풍경들이다.
<정원 일>은 큰 집 한 채와 몇몇 초록 나무들, 녹색 풀밭이 있는 간단한 구성이다. <테신의 산 마을>에서는 산 아래 여러 채 집들이 단순화된 형태로 그려지고, 몇몇 나무들이 사이사이에 있다. 전체적으로 연한 주황색 톤이라 따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다음 1922년에 그린 <테신의 마을>도 집들이 기하학적 구성으로 단순화-추상화되었고, 전체 색감은 녹색이 지배적이다.
이처럼 헤세는 자연의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단순화된 형태로 재구성해 그렸다. 빨강과 노랑, 녹색 등 원색에 가까운 색을 사용해 물체들에 산뜻한 색감을 부여한 그림은 온화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20~30년대 그림들의 특징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소간 가감-변형되며 미학적 폭이 넓어진다.
몬타뇰라에서 그림 그리기에 심취한 헤세는 1920년 1월 바젤 미술관(Kunsthalle Basel)에서 수채화 전시회를 열었다. 여기서 그는 몬타뇰라 초기에 그린 주변 마을(테신)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듬해 1921년에는 화집 <테신의 11점 수채화>(Elf Aquarelle aus dem Tessin, 1921년)를 출간했다. 이때 헤세는 벌써 화가가 된 듯하다.
헤세는 몬타뇰라와 인근 여기저기를 그렸기에, 그의 그림들은 전반적으로 ‘테신의 풍경’(Tessiner Landschaft)이라 불린다. 이곳은 이탈리아어 사용 지역이라 그림 제목에 이탈리아어 지명이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아그노(Agno), 비오기오(Bioggio), 소렌고(Sorengo), 바렌고(Barengo) 등이다.
두 번째 수채화 전시회는 다음 해 1922년 취리히 근처의 소도시 빈터투르에서 북부 독일의 거장 화가 에밀 놀데(Emil Nolde)의 작품과 함께 열렸다. 그런데, 이때 헤세의 그림은 혹평을 받기도 했다. 사실, 당시 헤세의 그림이 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고, 이름있는 ‘글쓰기 작가의 그림’이란 평이 적합할 것이다.
그렇지만, 헤세는 비평에 개의치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헤세가 자신을 화가라고 여긴 적은 없다. 그는 자신이 정신적 위안을 얻기 위해 그리는 ‘작은 수채화들’이 대단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단지 딜레탕트(취미로 예술을 즐기는 한량.)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지인에게 보낸 편지(1919년)에서 쓴 바 있다. 실제로 그림에 관해 헤세는 일생동안 소박하고 겸손한 자세를 견지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그림들은 몬타뇰라 인근 마을의 풍경이다. 모두 ‘테신의 풍경’ 제목 아래 이곳저곳 작은 산 마을 풍경을 그렸는데, 청색이 돋보이기 시작한다. 먼 산과 가까운 덤불에 청색 계열을 사용하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는 거대한 알프스 산들이 위압적이지 않고 집들을 포근하게 둘러싸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집들은 동글동글한 나뭇잎들 사이에 있다. 펜과 수채로 그린 <테신의 풍경>에서는 나무들과 집들이 단정하고 차분하게 서있고, 앞에는 휘어진 언덕길이 나있다. <바르벤고> 풍경에서는 굵은 선으로 휘어진 나무줄기와 삐죽한 나뭇잎들이 동화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20년대 중반에 그려진 이 두 <테신의 풍경> 작품은 초기 작품들의 단순-소박함을 넘어 헤세가 추구하는 구도(오브제 구성)와 색감의 측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동시에 관람자에게 편안한 안정감을 선사한다.
다음 그림들에는 루가노 호수와 산이 있다. <알보가시오>와 <루가노 호수 전망>은 루가노 호숫가 마을을 그렸다. 마을 집들이 유연하게 휘어진 호숫가와 언덕에 늘어서 있다. 약간 멀리서 그린 원경 그림인 <알보가시오>에는 푸르른 호수에 접하여 연한 녹색과 노란 산등성이 아래 나란히 서있는 붉은 지붕 집들이 다정해 보이고, 산 너머 흰 구름이 아주 평화롭다.
다음 마을 풍경들인 <코르티발로>와 <나무와 작은 마을>에서도 이런 그림 세계는 이어진다. 멀리 큰 산이 있고, 완만한 언덕 위 여기저기에 집들이 모여있고, 그 사이사이에 색깔이 다른 나무들이 서있다. 여기서도 보이는 연녹색과 노란 언덕 위의 집들은 동화 속 같아서 그림 전체는 부드럽고 정감있다.
관람자들은 이 그림들에서는 분명 인위적인 구성과 색상이 있음을 알면서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한번 현장에 가보고 싶은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게 평화롭고 동화 속 같은 그림들은 관람자를 은근히 현실에서 비현실적 환상 세계로 끌어들이며 슬며시 몰입을 유도한다. 이것이 헤세 그림의 독특한 매력이다.
헤세의 20년대 그림들에서는 특히 1916~1917년 요양 때 미술을 가르친 스위스 화가 구스타프 감퍼의 영향이 있다. 감퍼의 자연 풍경 수채화에서처럼, 헤세의 그림에도 거대한 풍경 구도가 단순하게 압축되고, 세부 대상(물체)들에는 온화함과 시적 서정성이 있으며, 약간의 리듬감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그 이전 1914년 베른 시절 때부터 알게 된 비슷한 연배의 스위스 화가 루이 모알레(Louis Moilliet, 1880~1962년)의 영향도 있다. 모알레는 특히 뮌헨의 표현주의 화가 그룹인 ‘청기사파’(Der blaue Reiter)에 참여했던 아우그스트 마케(August Macke, 1897~1914년)와 가깝게 지내며 유사한 화풍을 추구했다. 모알레는 작품에서 대상들을 축소하는 기하학적인 구도와 산뜻한 색감을 구사했다.
이런 요소들은 헤세의 그림에서 자연 현실의 단순하고 압축적인 구성, 소수의 원색적 색상으로 대상을 표현하며 환상성을 부여하는 것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헤세 그림들의 간소화되고 압축적인 표현에서는 시적인 서정성이 내포되어 있기에, 미술 전문가가 아니라도 헤세의 풍경화들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그의 그림 세계는 유아적이고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작은 세계들이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다가갈 수 있으니, 이는 헤세의 서정시와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