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를 패닉에 빠뜨리며 국가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유근택 작가에게도 이 시기는 많은 변화와 아픔, 깨달음을 준 시간이었다고 한다. ‘일상’이라는 화두에 몰두해 온 그의 작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갤러리현대가 유근택 작가의 개인전 ‘반영’을 12월 3일까지 연다. 2017년 ‘어떤 산책’전 이후 갤러리현대에서 6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이 시간은 작가에게 강렬한 시간이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맞은 아버지와의 사별은 여전히 가슴 깊이 존재한다.
작가는 “요양병원에 격리돼 있던 아버지에게 면회도 갈 수 없고, 직접 통화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직감적으로 아버지와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며 “그래서 매일 그림을 그려 이를 찍은 사진을 간병인에게 보내 ‘아버지에게 보여달라’로 부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그림들은 작가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간절한 편지와도 같았다. 10개월의 시간이 지나 어느덧 300여 점의 그림이 쌓였고,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경험은 작가에게 큰 전환점이 됐다. 특히 그의 대표 연작 중 하나인 ‘분수’에 영향을 미쳤다. 작가는 1990년대 중반부터 분수를 작품의 소재로 그려왔다. 갤러리현대 측은 “물의 파편이 풍경을 자르고 해체하는 분수의 모습은 작가에게 회화의 조형성을 사유하는 원천이었다”고 설명했다. 본래 분수는 작가에게 풍경 요소의 이미지가 강했으나, 아버지와의 사별로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을 바라보고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삶을 성찰하며 존재론적 차원에서 더 깊이 접근하게 됐다.
작가는 “과거 분수를 보면 물방울들이 위로 치솟았다가 쓰러지는 모습이 비극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쓰러졌다가 이내 다시 위로 올라오는 방식이 인간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쓰러짐을 반복하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꼈고, 여기서 비극뿐 아니라 역설적인 찬란함도 느껴졌다”며 “전엔 분수를 그릴 땐 풍경을 그리듯 선을 긋는 행위부터 시작했는데, 이번 전시를 준비할 땐 위로 솟아오르는 분수의 물방울 하나하나의 존재감에 집중해 그림을 그렸다. 그릴수록 더 많은 존재들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지하 1층의 전시장에서 이 분수 연작들을 볼 수 있다. 멀리서 봤을 땐 평온해 보이는 분수의 물줄기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친 질감과 더불어 역동적인 생명력을 뿜어내며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인생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이는 작가의 신체적인 흔적과 숨결, 물리적인 힘이 가해진 결과물이기도 하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작업에 한지를 사용하는데, 그에게 한지는 대상을 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와 그림이 만나는 무대이자 스스로 회화적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다. 작가는 두꺼운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해 그 위에 드로잉과 채색을 한 뒤 전면을 물에 흠뻑 적셔 철솔로 한지의 표면을 거칠게 올리며 다시 채색한다.
특히 매끄러운 한지를 날카로운 철솔로 수백 번, 수천 번을 문지르는 노동 집약적인 작업을 통해 자신의 신체성을 화면에 적극 반영한다. 작가는 “작업을 할 때 큰 화면을 눕히지 않고 세워서 작업한다. 눕혀서도 해봤지만 맞지 않더라”며 “내게 그림은 직면하는 대상이자 신체성을 맞부딪히는 대상”이라고 말했다.
지루한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 환기시키기
분수뿐 아니라 ‘창문’, ‘봄-세상의 시작’, ‘이사’, ‘말하는 정원’, ‘반영’ 등 작가를 대표하는 주요 연작 40여 점도 전시된다. 특히 전시 타이틀이기도 한 반영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집약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반영이라는 단어는 ‘빛이 반사해 비침’, ‘다른 것에 영향을 받아 어떤 현상이 나타남, 또는 어떤 현상을 나타냄’ 등 다양한 사전적 의미가 있는데, 지루한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 환기시키는 작업을 이어 온 작가에게는 일상을 다르게 보여주는 방법으로 쓰였다.
예컨대 1층 전시장에 설치된 ‘창문’, ‘거울’, ‘이사’ 연작엔 자택 창문 너머로 보인 성북동의 새벽 풍경, 거울에 비친 창문 밖의 모습, 삶이 재편되는 이사 과정이 담겨 있는데 이는 모두 반복된 일상을 벗어난, 변주된 일상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작가는 “지난해 8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새벽 잠깐 집에 들어왔는데 창문 밖에 비친 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굉장히 강렬하게 와닿아 바로 드로잉했다. 삶은 매일 반복되지만, 매 순간에 따라 개념이 달라지고 똑같아 보였던 풍경도 다르게 보인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이사 또한 그렇다. 똑같은 공간에서 일어나고, 씻고, 먹고, 자는 일상을 반복하면서 마치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일상이 움직이는 순간이다. 작가는 “포장되고, 옮겨지는 일상의 물건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이 물건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의외의 생물성을 느꼈고, 그 일상의 풍경이 하나의 연극, 무언극 같이 느껴졌다”며 “똑같다고 느낀 일상이 낯설어진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거울은 현실을 비추는 것 같지만,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현실이 찌그러지기도, 비틀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온전한 일상을 반영해 보여주는 존재인지 의문을 자아낸다. 갤러리현대 측은 “거울 연작의 거울도 창문처럼 이질적인 대상과 풍경의 요소를 한 화면에 결합하고 재배치하는 장치”라며 “거울에 비친 창문 밖의 모습은 입체파의 그림처럼 파편화되고, 뒤틀려 있다”고 밝혔다.
실내 공간에 머물러 있던 작가의 시선은 바깥 풍경까지 장소를 옮겼고, 이로써 일상을 반영하는 작업의 확장이 이뤄졌다. 2층 전시장에 소개되는 ‘반영’ 연작은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의 숲 풍경과 물가에 반사된 풍경을 그린 것이다. 1층의 창문과 거울이 보다 확대된 격이다.
작가는 “어디서 봤을 법한 자연 풍경 같지만,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호수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묘한 일상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어 흥미로웠다”며 “또 상단엔 숲이 자리하는데 바로 아래 물가엔 이 숲의 풍경이 이질적으로 동시에 비치는 모습, 그리고 그 가운데 산책길을 걷는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일상을 반영하는 위와 아래의 세계 사이를 유영하는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2층에 함께 자리하는 ‘봄-세상의 시작’, ‘말하는 정원’ 연작은 일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발견한 에너지에 주목했다. 특히 차가운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의 움직임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그려 온 분수의 모습도 떠오르게 했다. 작가는 “두더지 게임은 끊임없이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는데, 식물이 싹을 틔우는 모습에서도 이를 느꼈다. 일상적 사물도 이처럼 항상 같이 자라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이렇듯 작가가 일상에 주목하고, 반영하는 작업을 이어오는 건 그에게 일상은 ‘나’라는 주체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만나며, 어떻게 감각할 수 있는지를 투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갤러리현대 측은 “일상에 내재한 강인한 생명력과 삶과 죽음이 중첩된 찬란한 순간을 포착해낸 작가의 작품을 통해 우리의 익숙한 세계는 다시 낯설어지며 새롭게 다가올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갤러리현대는 이번 전시를 음악적 언어로 풀어낸 앨범 ‘유근택: 반영’도 함께 발매한다. 재즈 기반 뮤지션이자 베이시스트인 정수민이 전시의 주요 연작을 곡 제목으로 작업한 재즈 기반의 앨범으로, 11월 1일 곡 ‘분수’ 선공개를 시작으로 8일 음원사이트에서 전체 음원을 공개하고 본 앨범은 12월 400개 한정으로 제작되는 LP로 발매한다. 이번 앨범을 위해 전시장, 녹음실 등에서 만난 유근택, 정수민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은 11월 갤러리현대 유튜브와 SNS 채널을 통해 공개한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