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0호 한원석⁄ 2023.11.13 10:01:40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벌어진 지 벌써 600일이 지났다. 3일 안에 항복할 것이란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러시아군의 민낯이 드러난 데다, 서방의 지원으로 우크라이나가 반격에 성공하며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냉전 종식 후 30여년 간의 평화를 누리던 유럽 각국은 재군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군수산업 기반이 무너진 유럽과 달리 최후의 냉전이 벌어지는 한반도에 위치한 대한민국은 세계 최상위권의 제조업 역량을 바탕으로 군수산업 분야에서 전 세계에 ‘K-방산’을 각인시키고 있다. 이를 끌고 나가는 현대로템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우리나라 방산업계를 살펴본다.
폴란드,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 후 ‘K-방산에 올인’
지난해 7월 폴란드 정부는 한국 방산업체들과 K2 흑표전차와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등 124억 달러(약 16조6000억 원) 규모의 대형 방산 계약을 맺었다. 폴란드가 구매하는 물량은 K2 흑표전차 980대와 K9 자주포 648문, FA-50 전투기 48대, K239 천무 다연장로켓(MLRS) 288문 등이다. 이는 대한민국 방산 수출 역사상 최대 규모로, 폴란드가 한국 방위산업의 ‘큰손’ 역할을 한 것이다.
이어 같은해 8월 현대로템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폴란드 군비청과 K2 전차 180대 및 K9 자주포 212문 수출을 위한 총 57억6000만 달러(약 7조5000억 원) 규모의 1차 이행 계약을 체결했다.
폴란드 정부는 우리 측에 신속한 인도 요청을 했고, 이에 지난해 12월 K2 전차 10대와 K9 자주포 24문이 우선 인도됐다. 이어 현대로템은 예정보다 빨리 K2 전차 올해 인도분 18대를 납품했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도 올해 들어 10월까지 3차례에 걸쳐 42문을 배송했다. KAI가 생산하는 폴란드 수출형 경공격기 FA-50GF는 올해 11월까지 이미 10대를 납품했고, 연말까지 추가로 2대가 더 인도될 예정이다.
폴란드는 군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 무기 대금 전체를 한꺼번에 지불하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분산 지급하는 방식을 취했다. K9 자주포는 2026년까지, K2 전차와 천무 다연장로켓은 2027년까지, FA-50 경전투기는 2028년까지로 계약을 맺었다. 그럼에도 무기 인도는 빠르게 이뤄지길 요구하고 있다. 폴란드 군비청은 경전투기 48대 도입과 관련해 계약금의 약 30%를 선수금으로 지급하면서도 ‘납기 준수’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폴란드가 우리로부터의 무기 수입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 국영 방산그룹 PGZ는 국내 방산업체들과 폴란드 현지 생산과 후속 군수지원, 무기 공동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올해 9월 마리우시 브와슈차크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이종섭 국방장관과 회담을 가진 뒤 공동기자회견에서 “한국과 폴란드 내 한국 군사장비 생산을 포함한 방산협력 2단계를 준비 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PGZ그룹과 산하 방산업체 WZM은 현대로템과 올해 3월 폴란드 성능개량형 K2 전차(K2PL) 생산·납품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컨소시엄 이행합의서를 체결하는 등 세부 협의를 진행 중이다. K2PL 전차는 K2 전차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폴란드형 지상 무기 체계로 폴란드 군의 요구사항에 따라 적군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능동방호장치와 특수장갑 등 최신화된 사양으로 향상된 성능을 보일 계획이다.
방산 업계의 폴란드 수출 금액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계약 체결 당시 업계에서는 거래 규모가 148억 달러(약 19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으며 관련 제품 수출액까지 포함하면 30조 원대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호주, ‘한화 레드백’ 선택… 이집트 K9‧UAE 천궁Ⅱ 잇달아 계약
우리 방산업체들에 러브콜을 보낸 곳은 폴란드뿐만이 아니다. 지난 7월에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미래형 IFV(보병전투장갑차) ‘레드백’이 독일 라인메탈사(社)의 ‘링스’를 제치고 호주군 현대화 사업인 ‘랜드 400’ 3단계(IFV 도입)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가 됐다. 공급물량은 129대로 24억 호주달러(약 2조 원) 규모다. 라인메탈의 입찰가가 더 낮았지만, 성능 면에서 ‘레드백’이 ‘링스’보다 더 나아 호주 정부가 선택했다고 호주 언론은 전했다.
적의 대전차 미사일 공격을 먼저 감지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동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최신 IFV인 ‘레드백’은 일반적으로 우리 국군의 소요에 맞춰 개발하는 것과 달리 처음부터 수출을 목표로 기획·개발한 무기체계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그동안 K-9 자주포와 장갑차 등 지상장비를 생산하면서 축적한 기술과 경험으로 개발됐다.
이번 계약이 최종적으로 이뤄지면 레드백은 2027년부터 호주 빅토리아주 질롱시에 건설 중인 공장에서 생산될 예정이다. 해당 공장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호주형 K9 자주포인 헌츠맨 AS9과 탄약운반차인 AS10을 생산하는 곳으로 2024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앞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해 2월 이집트 국방부와 K9 자주포와 K10 탄약운반장갑차 등을 공급하는 2조 원 상당의 ‘K9 패키지 수출’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와 함께 공동 생산에도 합의해 내년 하반기까지 초도분을 납품하고 이후 잔여 물량은 기술 이전을 통해 현지에서 생산할 예정이다. 이집트는 생산 물량으로 자체 수요를 충당하고 나아가 아랍과 아프리카 등에 수출할 계획이다.
이로써 K9 자주포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9개국에서 활약하며 세계 자주포 시장의 50%를 장악했다. 폴란드 추가 계약이 이뤄지면 시장 점유율은 70%에 달할 전망이다.
우리나라 방산업계는 경쟁이 아닌 협업에 나서기도 한다. 지난해 1월에는 LIG넥스원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UAE(아랍에미리트)의 국방 조달계약을 관리하는 타와준 경제위원회와 35억 달러(약 4조5500억 원) 규모의 ‘천궁Ⅱ’ 계약에 서명했다. 한화디펜스는 천궁의 발사대와 적재·수송차량 장비를 제작하고 이를 공급받은 LIG넥스원이 최종적으로 UAE 공군에 전달하는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다.
KAI, ‘항공산업 본고장’ 미국 시장 진출 노려… 수출 1000대 목표
‘K-방산’의 성과는 하늘 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KAI(한국항공우주산업)는 폴란드에 FA-50GF 12대와 블록(Block) 20으로 개량된 36대를 수출하기로 계약한 데 이어, 올해 5월에는 FA-50 18대를 9억2000만 달러(약 1조2000억 원)에 말레이시아로 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FA-50와 그의 모태인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 등을 합치면 지금까지 인도네시아(22대), 이라크(24대), 필리핀(12대), 태국(14대) 등에 모두 140대 가까이 수출됐다.
KAI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 항공산업의 본고장 미국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올해 1월 KAI는 “정부 조달 물량은 줄이고 대신 해외 수출에 중점을 두는 경영 방침을 확정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를 위해 KAI는 FA-50을 단좌형으로 개량한 F-50 전투기를 2028년까지 개발하고, 미국 수출 버전인 TF-50도 개발해 미 공군의 고등전술훈련기(ATT) 사업, 미 해군의 대체전술항공기(TSA)와 후속 신형 고등훈련기 프로그램(UJTS)도 함께 따내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FA-50이 미국 방산업체 록히드 마틴과 공동개발한 기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 7월 강구영 KAI 대표는 한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미 해군의 고등·전술 입문기 및 공군 전술 훈련기 사업은 총 500여 대 규모로 추산된다”며 “FA-50이 미국에 진출하면 해외 고등훈련기 및 경전투기 시장에서 1300대 이상의 판매와 50% 이상의 시장 지배력을 갖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밖에도 KAI가 개발한 4.5세대 전투기 KF-21이 있다. 지난해 7월 시제 1호기가 비행에 성공한데 이어 시제 6호기까지 투입돼 조종안정성 및 AESA(능동주사식위상배열) 레이다를 포함한 항공전자 장비에 대한 성능검증, 무장시험 등 다양한 비행시험을 수행하게 된다. 우리 공군은 총 120대를 도입해 노후화가 심각한 F-4 팬텀과 KF-5 제공호 등을 대체할 계획이다. 블록 1은 2028년까지 40대를 양산해 실전 배치되며, 이후 2032년까지 블록2 80대를 생산해 배치될 예정이다.
KF-21은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국산 전투기 개발 선언 이후 시험 비행에 성공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현재도 각종 문제들이 발목을 잡고 있다.
먼저 인도네시아가 KF-21 개발비용의 20%인 약 1조7000여억 원을 분담키로하고 공동개발국에 이름을 올렸지만 차일피일 개발비용 납부를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11월 10일 국회 국방위원회의 2024년도 방위사업청 소관 예산안 예비심사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올해까지 총 1조3344억 원 상당의 분담금을 내야 하지만, 올해 8월 현재 2783억 원만 납부해 총 1조561억 원을 미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KF-21 초도 생산물량을 기존 계획의 절반인 20대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사업타당성조사 결과 보고서에서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자 군을 비롯해 산업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적정 전투기 보유 대수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서 공군의 전력공백이 예상되는 데다, KAI와 500여개 이상의 협력사들의 추가비용과 유휴인력 발생 등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초도 양산 물량이 반토막나면 당초 800억 원대이던 KF-21 대당 가격이 1000억 원대로 치솟을 것으로 추산된다.
결국 20대로 초도 양산을 진행하고, 향후 유럽 MBDA사(社)의 미티어 공대공 미사일 발사시험 결과에 따라 20대를 추가해 총 40대를 확보하는 단서 조항이 달린 절충안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지난 3월 KF-21의 미사일 분리 시험이 성공했는데 이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맞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 군사전문가는 “소프트웨어 오류로 앱이 먹통이 되면 이를 두고 스마트폰 제조사인 삼성이나 애플에 항의하는 격”이라고 절충안을 꼬집었다.
전면 부인에도 KAI 매각설 ‘모락모락’
한편 일각에서는 KAI가 매각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KAI 측은 이를 여러 차례 전면 부인했지만, 시장에선 KAI 매각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한화와 LIG 넥스원이 꼽힌다. 국내 방산업계의 양대산맥인 두 회사 중 한곳이 KAI를 인수하게 되면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화는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해 한화오션을 출범시키면서 ‘한국의 록히드마틴’을 지향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았다. LIG넥스원의 경우 천궁Ⅱ와 같은 미사일 관련 사업 등 방위산업 한 우물만 파는 회사여서 KAI를 인수하게 된다면 시너지가 극대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당사자인 한화와 LIG넥스원은 KAI 인수에 대해 “검토한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재계에서는 KAI가 매물로 나올 경우 한화그룹이 가장 유력한 인수 후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한화그룹 입장에서 KAI는 대단히 탐나는 기업”이라며 “매물로 나오면 적극적으로 인수전에 뛰어들어 높은 가격을 써서라도 갖고 오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화그룹이 KAI를 인수할 경우 기존 육상에 이어 해운(한화오션)과 항공에 이르기까지 육‧해‧공을 장악해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면서 “그룹 규모나 보안 문제를 봤을 때도 가장 (인수)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문화경제 한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