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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로니 혼 드로잉 속 ‘같은, 다른’ 그림 찾기

국제갤러리서 ‘프릭 앤 프랙스’ 드로잉 연작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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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62호 김금영⁄ 2023.11.29 10:25:42

로니 혼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그림 하나를 감상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관련해 지난해 리움미술관이 소장품 중 한두 작품을 10분 이상씩 감상하고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만큼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짧은 경우 30초, 1분이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국제갤러리에 꼼꼼히 들여다봐야 하는 작품이 등장했다. 미국 현대미술가 로니 혼의 개인전이 12월 31일까지 열린다.

국제갤러리 K3 전시장엔 과슈 및 수채화 드로잉이 설치됐는데 8개가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형태다. 처음 드로잉을 보면 뭔가 여러 형태가 각각 그려져 있는 것 같지만, 작품 앞에서 몇 초 더 시간을 보내면 8개의 드로잉 중 같은 형태와 색으로 구성된 짝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한다. 그런데 또 몇 초 시간이 흐르면 완전히 같은 줄 알았던 그 형태와 색도 미묘하게 조금씩 다르다는 걸 알아챈다.

로니 혼의 작품을 들여다 보면 같아 보이지만, 또 자세히 살펴보면 미묘하게 다른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 차이점들은 작품 앞에서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더 자세히 보인다. 마치 얼굴의 점처럼 아주 작은 점이 한 그림에선 왼쪽 아래에 찍혀 있는데 다른 그림에선 오른쪽 아래에 찍혀 있고, 밖으로 향하는 듯 보인 선이 똑같은 그림이라 여겨졌던 또 다른 그림에선 안으로 향하고 있는 등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같은 그림을 찾다가 나중엔 그 안에서 또 다른 그림을 찾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마주한다.

여기에 관람객이 작품을 언제, 어느 위치에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도 작품은 다르게 보인다. 그 결과 같은 작품을 두 번, 세 번 이상 경험하는 느낌이 들고, 작품을 단순 감상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이 작품과 저 작품은 같은가?’, ‘왜 나란히 걸었는가?’, ‘각각의 드로잉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는가?’ 등 궁금증과 나름의 해석의 가능성도 찾아가게 된다.

국제갤러리 윤혜정 이사가 전시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국제갤러리 윤혜정 이사는 “보통 관람객은 작품 앞에 긴 시간 머물지 못한다. 실제로 평균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여기서 로니 혼은 같아 보이는 드로잉을 전시장에 다양하게 배치하는, 일종의 더블링(이중성)과 페어링(쌍을 이루는 것) 방식을 활용해 관람객이 보다 작품에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이끈다”며 “여기서 로니 혼은 속 시원한 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렵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 모호함이야말로 사람들의 상상력과 가능성을 무한대로 자극하는 요소이자,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라고 짚었다.

이 드로잉들은 ‘프릭 앤 프랙스(Frick and Fracks)’란 이름을 지녔다. 이는 스위스의 코미디 아이스 스케이팅 듀오의 예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르너 그뢰블리와 한스 마우흐 듀오는 1930년대 처음 협업하기 시작해 50년 가까이 파트너로 일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이주해 아이스쇼 투어 등을 하며 유명해짐에 따라 그들의 예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심지어 둘 간의 구분이 불가능한 관계를 칭하는 은어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로니 혼은 이번 전시에서 유리 조각이 아닌 수채화 드로잉 연작들을 선보인다. 사진=김금영 기자

실제로는 프릭은 스위스의 작은 마을 이름, 프랙스는 스케이트를 할 때 입는 코트를 칭하는 용어로,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두 단어가 조합됐음에도 현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뜻하는 은어로 자리 잡은 것이 역설적이면서도 인상 깊다.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해 보이는 로니 혼의 드로잉과도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윤혜정 이사는 “같음과 다름, 그리고 유사성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게끔 만드는 로니 혼의 작품은 관람객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도 한다.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감각하기 위해선 느껴야 하고, 그 느낌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이 여기 실재한다는 것이 증명된다”며 “그리고 감각을 자극함과 동시에 혼란을 주기도 한다. 쌍둥이 그림이라고 인식했던 그림에서 차이점을 드러내며 어떤 것을 규정하는 정체성을 뒤흔들고,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을 다시 한번 의심하고, 생각하게끔 한다”고 말했다.

드로잉, 유리 조각 모두에 존재하는 ‘고정관념 뒤흔들기’

작품을 살펴보는 관람객. 사진=김금영 기자

이 감각의 혼란은 로니 혼의 ‘유리 조각’에서도 일찌감치 이어져 왔다. 투명한 유리는 재료의 특성상 액체 또는 고체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유리를 활용한 조각은 로니 혼의 대표작이자, 그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는 BTS(방탄소년단) 멤버 RM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며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드로잉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드로잉은 로니 혼 작업의 주축을 이루는 것으로, 그가 작가 활동을 시작한 이래 꾸준히 유지해온 유일한 매체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드로잉들은 작가가 2018년부터 올해 사이에 제작한 프릭 앤 프랙스 연작들이다.

'프릭 앤 프랙스' 연작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윤혜정 이사는 “로니 혼을 조각가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는 자신을 ‘그리는 사람’이라 말한다. 특히 드로잉이 자신의 주된 활동이고, 양식이 무엇이든 매체가 무엇이든 모든 작품의 공통분모가 드로잉이라고 강조한다”며 “그는 실재의 복합성을 다루는 데 조각뿐 아니라 드로잉, 출판 등 다양한 매체를 적극 활용한다. 특히 드로잉은 미완성된 작품의 출발점이라 보는 시선도 있는데, 로니 혼은 드로잉 자체를 완연한 작품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드로잉 작업을 이어 왔다”고 말했다.

여기에 수채화 드로잉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는 가변적이고, 변화무쌍하면서도 동시에 취약한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다. 윤혜정 이사는 “일반적으로 수채물감은 아크릴보다 물리적으로 취약하다는 인식에 아마추어적인 재료로 평가받고, 미술시장에서도 유화보다 낮게 평가받는 경향이 있어 왔다”며 “로니 혼은 세간의 평가나 미술계의 기준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존재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고 몰두한다. 그만의 수채화 드로잉의 매력을 이번 전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로니 혼 작가. 사진=Belén de Benito,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무의식적으로 시작된 작품 앞에서의 기억력 게임은, 이처럼 고정된 관념을 뒤흔드는 시도까지 이어진다. 윤혜정 이사는 “이번 전시가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관찰과 고찰을 이어가며 무엇이, 어떻게, 왜, 가까워지고 멀어지는지, 다양한 관계 맺기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나누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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