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3호 김금영⁄ 2023.12.28 09:38:02
“사람들의 삶 속에 가까이 다가가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한진섭 작가의 바람은 결실을 맺었다. 한국 작가 최초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신부상을 세우며 전 세계에 김대건 신부를 알리고, 관람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됐다.
이 과정을 보다 자세하게 접할 수 있는 자리가 국내에도 마련됐다. 가나아트는 한진섭 작가의 개인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바티칸에 서다’를 1월 14일까지 연다. 가나아트에서 10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간 정신없이 지냈다. 마치 꿈같은 시간이었다”며 “지난해 9월 16일 바티칸에서 김대건 신부 조각상 축성식이 열렸는데, 이후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이 이 이야기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으면 좋겠다며 전시를 제안했고, 내 마음 또한 같아 바로 전시 준비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가톨릭사제(신부)이자 순교자로,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 인물로 선정됐다. 그의 조각상을 만드는 역할을 작가가 맡았다. 반세기 동안 돌이라는 하나의 물성에 천착해 온 그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삶’을 다뤄왔다. 또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준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을 만드는 것은 운명처럼 느껴졌다.
이를 말해주듯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중요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대성전 오른쪽 외벽에 벽감이 있는데, 550년의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자리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바로 안쪽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바로 그 옆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외부에서 제일 중요한 자리인데 비어 있었다는 것이 나 또한 신기했다”며 “마치 그 자리가 오랜 시간 김대건 신부를 기다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작업이 이어지는 과정조차도 운명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재료를 찾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김대건 신부 조각상은 최종적으로 높이 3.77m, 가로 1.83m, 세로 1.2m 크기로 만들어졌는데 이를 만들기 위한 거대한 돌을 찾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작가는 비앙코 카라라(흰색 대리석)를 채석하는 대리석의 고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 지역으로 떠났다. 작업에 적합한 돌을 찾는 데만 5개월의 시간이 걸렸다고.
그는 “돌은 단순한 물질적 재료가 아니다. 그 이상의 고유한 영역을 펼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아무 돌이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또 겉으로는 좋아 보이더라도 안으로 깎아 들어가다 보면 겉과는 전혀 다른 무늬가 나오거나 금이 가 있는 변수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조각가들은 ‘돌 속은 사람 속보다 모른다’고 말하는데, 신기하게도 김대선 신부 조각상을 위해 찾은 돌은 작업 시작부터 끝까지 다른 무늬나 금이 나오지 않았다. 기적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작업을 하다가 4m 높이의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순간도 있었는데 다행히 단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는 “김대건 신부가 지켜준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조각상이 설치되는 마지막 순간조차 기적이었다고 한다. 작가는 “대형 조각상을 설치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조금만 잘못해도 금방 수평이 어긋나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수평이 한 번에 맞았다”며 “또 조각상을 설치될 자리에 너무 밀어 넣으면 빼지도 못하는데 한 번에 적정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김대건 신부가 ‘여긴 내 자리야’ 하면서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스스로 들어간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김대건 신부 조각상은 갓과 도포 등 한국 전통 의상을 입고 두 팔을 벌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조각상의 뒷모습까지 정교하게 마무리했다. 작가는 “김대건 신부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굉장히 용기 있고 포용력이 넓은 분이라고 느꼈다. 여러 포즈 후보가 있었지만, 그 담대함과 포용력을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말했다.
운명적 순간들과의 조우…“나 혼자 이룬 성과 아냐”
존경하는 인물의 조각상을 만든다는 건 큰 기쁨이기도 했지만, 부담이기도 했다. 작가는 “나 혼자 한 것이 아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대건 신부 조각상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설치될 수 있었던 배경엔 2021년 로마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취임한 유흥식 추기경의 노력이 있었다.
유 추기경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조각상 봉헌 의사를 밝혔다. 이후 바티칸은 이탈리아 현지 조각가에게 제작을 맡기려 했으나, 유 추기경은 “한국 성인이니 한국 조각가가 더 그 정신을 잘 표현할 것”이라며 꾸준히 설득해 결국 작가가 이를 맡게 됐다. 이때 작가 또한 이미 이탈리아에서 10년 동안 유학을 한 경험이 있어 현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인이 많았고, 바로 작업 가능한 준비된 상태였기에 조각상 제작을 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난해 1월부터 8월 말까지 이탈리아 서북부 도시 피에트라산타에 머물며 8개월에 걸쳐 김대건 신부 조각상을 제작했다. 1년여 동안의 모형 제작 기간과 돌을 찾고, 작업한 기간을 합하면 어언 2년에 이른, 지난하지만 뜻깊은 시간이었다는 고백이다.
이번 전시는 김대건 신부 조각상이 만들어진 과정과 더불어 예술적 가치를 살피고 작가의 폭넓은 작업세계까지 만날 수 있도록 구성됐다. 먼저 1전시장에선 김대건 신부 조각상 제작을 위해 바티칸 교황청에 제출했던 모형 샘플들과 제작 과정을 기록한 영상 및 사진 자료, 연표를 볼 수 있다. 또한 지난해 9월 16일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진행된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성 베드로 대성전 수석 사제)의 감사 미사와 축성식 현장을 공개하는 아카이브도 볼 수 있게 구성했다.
이어 2, 3전시장은 그동안 작가가 작업해온 소품 위주의 성상(聖像) 조각을 포함해 약 3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특히 3전시장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설치된 것과 동일한 형태의 60cm 크기 조각상 ‘김대건 신부님’과 김대건 신부 조각상 제작 시 사용한 돌의 일부를 함께 소개하며 그동안 고민을 거듭해 온 작가의 시간과 노력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가 최근까지 작업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가나아트 측은 “작가는 화강암, 현무암, 대리석 등의 석재를 주로 사용하며 돌의 자연스러운 형태를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개입한다. 딱딱하고 차가운 돌 속에서 형상을 꺼내고 생명을 불어넣어 재창조하는 작가는 한국 조각의 전통적인 재료와 작업 방식, 서구 조각의 현대성과의 조화를 추구하며 조형 세계를 구축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를 보여준다”며 “다양한 형태와 주제를 탐구하며 전통적인 표현 방식을 고수해 온 작가의 석재에 대한 응축된 열정도 재조명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또한 이번 전시가 한국 작가 최초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조각상을 다시금 조명하고, 전시장을 찾은 이들에게 마음 속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평화로운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작가는 작업 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순간순간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는 “긴 작업시간 동안 혼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 김대건 신부가 항상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힘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이 있어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어쩌면 내게 일어났던 일들이 결국 바티칸 대성전에 김대건 신부상을 세우기 위한 훈련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든 것이 다 신의 계획이 아니었을까”라며 감회를 밝혔다.
한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1979년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후 1981년 동 대학원 조각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한국 현대 조각의 1세대인 전뢰진과 유영교에게 사사했다. 같은 해 이탈리아 카라라로 건너가 카라라 국립 미술아카데미 조각과를 졸업했다. 그는 1983년 이탈리아 피사(PISA) 국제미술공모전과 카라라 국제조각심포지엄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 일본 하코네미술관에서 개최된 로댕미술대상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1997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감사장,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감사장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그의 작업은 프랑스 대통령궁, 툴루즈 미술관, 일본 하코네미술관,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시립모형미술관, 카스텔란자 시립미술관을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