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3호 김금영⁄ 2024.01.08 11:59:23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즐겨 불렀던 전래동요로 익숙한 이 가사가 합창단 단원들의 목소리를 통해 아름다운 선율로 새 생명력을 얻어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화음을 맞추다가 헌집 가사 부분만 불러야 하는 테너 단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새집을 드릴 수가 없다”고 지휘자와 서로 농담이 오가며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코웨이 물빛소리 합창단의 연습실에서 마주한 풍경이다.
코웨이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경영 일환으로 문화예술을 통한 장애인 인식개선과 공연 활동 지원을 위해 시각장애인 단원으로 구성된 ‘물빛소리 합창단’을 2022년 12월 창단했다. 특히 단순 지원 차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단원들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평일 오전 연습실에 출근해 노래 연습을 하는 게 이들이 맡은 직무로, 기자가 현장을 찾은 날도 이들은 열심히 근무 중이었다.
목소리로 예술을 창조하는 물빛소리 합창단의 연습시간은 예상보다는 평범했다. 여타 노래 연습현장과 굳이 다른 풍경을 꼽자면 이들 앞에 악보만 없었을 뿐, 눈을 감고 지휘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사와 음정이 흥얼거려졌다. 이처럼 음악이 주는 힘은 장애를 넘어 마음을 관통하고 있었다. 오히려 ‘시각장애인의 노래 연습현장은 무언가 특별하고 색다를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편견이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인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연습시간을 묵묵하게 또 즐겁게 보내고 있었고, 그 평범한 일상은 유별나지 않아 오히려 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들의 노래는 연습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구로구청, 금천구청, 서울시, 국회 등 다양한 지역사회 행사에서의 공연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했다. 대학교 등과 교류해 장애인 인식개선 캠페인을 펼치며 사회적 공감대를 넓히는 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이런 물빛소리 합창단의 여정에 함께하고 있는 함정민 지휘자를 만났다. 이화여대에서 합창지휘를 전공하고,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국립음악원 합창지휘 석사 과정을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물빛소리 합창단 창단부터 현재까지 발자취를 함께 해오고 있다.
- 최근 물빛소리 합창단에 좋은 소식이 있었죠. ‘2023 전국장애인합창대회’에서 국무총리상(금상)을 수상했어요. 불과 창단 1년 만에 이룬 성과라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소감은?
“전국장애인합창대회는 ‘세계 장애인의 날’을 기념해 장애인 문화예술의 발전,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매년 열리는 자리입니다. 물빛소리 합창단은 각 지역 시·도 예선에서 1위에 올라 서울지역 대표로 본선에 진출했고, 본선에서 금상을 수상했어요. 1기에 이어 올해 2기 단원들까지 새로 뽑는 과정에서 연습 기간이 다소 부족했는데, 단원들이 열정으로 이를 극복하고 노력 끝에 얻은 결과라 더 값지고 뿌듯했어요. 더 성장하는 기회이기도 했고요.”
- 경연곡이 ‘담쟁이’었는데, 어떤 곡인가요?
“경연 대회에서 보다 수상 가능성을 노려볼 수 있는 기교 많은 곡들이 있긴 하지만, 이보다는 듣는 사람들의 가슴에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곡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담쟁이는 도종환 시인의 시를 가사로 한 곡인데요.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을 함께 손잡고 이겨내자’, ‘내 앞의 벽을 뛰어넘자’는 내용을 담은 노래가 마치 우리에게 말을 거는 느낌이었어요. 우리가 노래를 부르며 느낀 희망, 용기의 감정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 이 노래를 택했습니다.”
- 오늘 연습현장에서는 ‘두껍아, 두껍아’ 친근한 가사가 들리더군요. 평소 연습하거나 대회를 준비할 땐 어떤 노래들을 부르고 있나요?
“각 자리의 성격에 맞는 곡들을 택하고 있어요. 경연 무대에서는 담쟁이처럼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곡을 고려하고, 초청 연주회에서는 청중의 귀에 익숙한 대중적인 곡을 선택해 부르기도 해요. 지난해 가을엔 ‘가을이 오면’,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편곡해 불렀는데 청중의 호응이 좋았어요. 오늘 연습한 노래는 전래동요 ‘두꺼비’ 그리고 웅장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노르웨이곡 ‘노던 라이츠(Nothern Lights, 북쪽의 빛)’인데요. 대중적인 곡뿐 아니라 이처럼 음악적으로도 합창단의 가능성과 능력을 깊이 보여줄 수 있는 곡도 여럿 시도하고 있습니다.”
- 그간 불렀던 곡 중 단원들은 어떤 곡을 가장 좋아했나요?
“담쟁이요. ‘희망을 잃지 않고 함께 나아간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노래는 단원들의 마음에도 큰 공감과 울림을 줬어요. 저 또한 이 노래가 뜻깊은데요. 특히 저는 이 노래를 통해 무의식중 편견도 뛰어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신 앞을 가로막는 장벽을 뛰어넘자’는 이 노래를 부르는 단원들의 모습을 보고 ‘장애에 대한 핸디캡을 뛰어넘자’는 메시지로 받아들인 분들도 많을 거예요. 그게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들이 들려주는 음악이 장애의 편견에 머무르거나, 사연 등에 더 집중되는 게 아니라 똑같이 예술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장애가 있는데 이 정도면 잘 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우리는 배려라고 여기며 무의식중 이들의 가능성에 한계를 그어 버리거나 기대치를 낮출 때가 있거든요. 이런 생각 자체가 장애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이 될 수 있어요.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무대를 함께 꾸리고 싶었어요.
음악을 사랑하는 단원들은 기량 또한 뛰어나고 갈수록 더 발전하고 있어요. 이들의 음악적 성장을 보다 마음껏 보여드릴 수 있는 곡들을 앞으로도 찾아서 연습하려 합니다.”
- 오늘 연습현장을 지켜보니 이미 단원들이 가사와 멜로디를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던데요. 평소 연습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좋은 소리를 들어야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죠. 그래서 곡이 선정되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각 파트별로 녹음한 음원 파일을 단원들에게 미리 제공해요. 음원을 녹음할 때 저도 직접 부르지만, 모든 파트를 혼자 소화하기엔 무리가 있어서 주변의 뛰어난 음악인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단원들은 음원을 듣고 음과 가사를 외운 뒤 연습실에 와서 함께 노래를 불러봅니다. 오늘 연습한 곡들은 지난주 금요일에 음원을 제공했는데요. 리듬 변화가 많은 곡이고, 한국어가 아니라 숙달이 어려운 부분도 있었는데, 일주일도 안 되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호흡을 맞춰볼 수 있을 정도로 단원들이 정말 많이 노력하고 습득력도 좋아요.
또 단순히 노래를 입으로 부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곡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에 작곡가는 어떤 사람이고, 가사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노래에 어떤 역사가 있는지도 함께 공부합니다. 새로운 곡에 도전할 때마다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지만, 단원들 모두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아요.”
- 연습할 때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나요?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어요. 다만 단원들이 지휘자의 손짓이나 눈빛 등 신호를 볼 수 없기에 최대한 많은 부분을 소리를 내 설명하고요. 호흡 소리로 필요한 부분에 신호를 주기도 합니다. 예컨대 반주가 있는 음악은 선율로 신호를 대신할 수 있어 큰 어려움이 없는데, 무반주곡이나 반주가 없는 부분에서의 도입은 지휘자의 신호가 꼭 필요해요. 그래서 평상시 지휘자의 호흡을 듣고 노래의 도입 시점을 맞추는 연습을 많이 하고 있어요.
또 리허설 등을 할 때 지휘자 입장에서는 보다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고 싶어서 공간의 분위기, 템포 등에 따라 즉흥적으로 변화를 주고 싶을 때도 있는데요. 갑작스러운 변화를 단원들이 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어 이보다는 원래 약속된 것들에 충실하는 방식에 집중하고 있어요.”
- 창단 인원 10명으로 시작해 최근엔 신규 단원 입사식도 열리는 등 현재는 20여 명으로 단원이 구성돼 있는데요. 단원 선발 과정에서는 무엇을 중요하게 보나요?
“서로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지를 봅니다. 개인이 본래 가진 기량이나 체화된 뛰어난 실력 또한 중요하겠지만, 합창단은 혼자 무대를 꾸리는 게 아니라 서로 협업해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무엇보다 융합하는 과정이 중요해요. 꾸준히 노래하고 싶은 의지도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내가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더 즐거운 무대를 꾸릴 수 있으니까요.”
- 그 결과 어떤 분들이 모였는지 궁금한데요.
“본래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합창단 활동을 일찌감치 해왔던 분들도, 음악을 사랑해서 음반을 냈던 분들도, 합창단 도전 자체가 아예 처음인 분들도 있어요. 합창단 창단 때부터 함께 한 1기 단원들은 그간 많은 연습 기간을 거치면서 기량이 많이 향상됐는데, 지난해 10월 합류한 2기 단원들이 1기 단원들의 실력을 보고 놀라기도 했어요. 서로 배려해가면서 호흡을 맞춰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 합창단 운영에 있어 코웨이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고 있나요?
“합창단 단원들은 모두 코웨이에 채용된 직원이에요. 합창단의 연습시간이 바로 근로시간이 되는데요. 주 5일 근무로 상황에 따라 다른데, 평균적으로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 반 정도까지 연습이 이뤄져요. 건강검진이나 복지 포인트 등 직원들의 복리후생도 동일하게 누립니다. 또 연습실 임대, 공연 의상 등 합창단 운영에 있어 필요한 전방위적인 부분을 모두 지원받고 있습니다.”
- 그래서 오늘 본격 연습 시작에 앞서 단원들에게 전달된 공지사항에서 연차, 휴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환호가 터진 거군요. 직장인 마음은 다 똑같나 봅니다.
“그러네요(웃음). 단원들은 원할 때 연차와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어요. 이는 소속감과 안정감으로도 이어집니다. 합창단 합류 이전 프리랜서로 활동한 분들도 있는데,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어 즐거웠지만 변동성이 많아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해요. 물빛소리 합창단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활동을 안정적인 업으로 삼을 수 있어, 더 높은 의욕을 보이고들 있습니다.”
- 지금까지 했던 공연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공연은?
“합창단이 창단되고 단원 가족과 지인들을 초대해 작은 연주회를 진행하는 기회가 있었어요. 누구보다 단원들의 합창단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가족 앞에서 공연을 펼치는 소중한 자리라 지켜보는 저도 가슴이 뭉클했어요. 단원 중 한 명은 ‘누군가의 엄마나 딸이 아닌,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뿌듯했다’며 행복해했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 합창단 활동을 하며 단원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단원들의 음악적 열정과 노래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에요. 1기 단원 염경례(50, 여)씨는 어린이집 교사로 활동하던 중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었는데, 스스로 점점 위축됐다고 해요. 그런데 합창단으로 활동하면서 활기와 에너지를 점점 되찾았어요. ‘매일 아침 눈을 떠 출근하고, 동료와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행복하지만, 노래가 주는 기쁨과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아 효능감도 크다’고 감상을 들려주더라고요.
2기 단원 장현필(38, 남)씨는 지난해 3월부터 흰지팡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요. 처음엔 시각장애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회피했다고 해요. 그런데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편견을 깨기 시작했어요. 시각장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있는그대로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고요. 합창단이 노래를 듣는 이들뿐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단원들에게도 큰 의미가 됐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어요.”
- 스스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물빛소리 합창단 이전에도 장애인 직업합창단 지휘자를 맡았었는데, 이 길을 걷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솔직히 처음부터 거창한 포부나 마음을 먹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예전부터 복지시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합창단 지휘를 하는 등의 경험을 통해 소외 계층 관련 활동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이 길을 걸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계기는 우연이었어요. 2018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뜻밖의 기회로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합창단의 지휘를 맡게 됐어요. 그 과정이 결코 쉽진 않았지만, 장애를 뛰어넘는 음악이 주는 공감과 감동의 힘을 느끼면서 저 또한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됐어요. 이후 코웨이에서 장애인 인식개선을 위한 합창단을 창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취지에 공감해 함께하게 됐습니다.”
- 물빛소리 합창단을 비롯해 장애인으로 구성된 예술단체·집단의 보다 활발한 활동을 위해 사회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장애 예술인을 편견 없이 전문 예술인으로 바라보고, 인정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보다 장애인의 삶, 이들이 처한 환경 등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사회적 선입견과 편견은 여전히 존재해요. 아직 저 자신도 완전히 깨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느끼고요. 그렇기에 더 시선을 넓히려고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코웨이가 물빛소리 합창단을 창단하고 운영하는 목적이기도 해요.
사회적 인식개선과 더불어 실질적으로는 장애 예술인이 국내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활동을 선보일 수 있는 공연과 대회 등 기회의 장이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더 많은 기업의 관심과 지원이 있다면,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 같이 사는 세상에 조금씩만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 작은 관심이 바로 시작입니다.”
- 올해 물빛소리 합창단은 어떤 공연들을 준비하고 있나요?
“다양한 외부 공연을 이어가고, 대회에도 꾸준히 참가하려 해요. 지난해엔 전국장애인합창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는데, 올해는 1등도 노려보고 싶습니다. 또 물빛소리 합창단의 제1회 정기연주회를 하반기에 선보일 계획이에요. 단편적으로 끝나는 게 아닌, 물빛소리 합창단의 성장 과정과 색을 꾸준히 보여줄 수 있는 자리가 생긴다면 단원들 또한 성취감이 더 높아질 것이라 기대돼요. 정기연주회에서는 보다 학구적인 곡도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단원들이 음악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려 합니다. 여기에 캠페인 활동도 확대해 장애인 인식개선과 장애인 예술에 대한 홍보도 진행할 계획입니다.”
- 앞으로 물빛소리 합창단이 사람들에게 어떤 합창단으로 인식되길 바라나요?
“좋은 음악을 하는, 감동을 주는 합창단이요. 물빛소리는 코웨이의 대표 상징인 맑은 ‘물’ 그리고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빛’의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딱 이것이 물빛소리 합창단의 정체성이자 존재 이유라고 봐요. 열심히 연습해 실력을 더 키워서 감동과 더불어 음악적 완성도까지 갖춘 공연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