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전 법무장관은 자신이 지난 연말 펴낸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장하리’인 데 대해 인터뷰에서 “장하다, 장할 것이다라는 의미”라고 해석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은 필자에겐 그런 의미보다는 장‘하리’로, 즉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기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해내고야 마는 주인공의 특징이 더욱 다가왔다. 그래서 필자는 주인공 이름을 장‘하리’로 읽길 추천한다.
소설 속 장하리가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는 행동을 펼치는 한 장면을 보자.
소설 206쪽에는 2020년 12월 당시 공수처 관련 법 개정을 앞두고 여야가 국회에서 극한 대립을 벌이던 날, 장하리 법무장관이 국회 국무위원 석에 가장 일찍 도착해 사진기자들이 보는 가운데 파란 책(검찰 출신 이연주 변호사가 쓴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을 꺼낸 뒤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가 밑줄을 친 부분은 나중에 대통령에 당선되는 용건석이 자신이 모시던 검찰총장을 밀어내면서까지 특수부 조직 유지를 위해 반발했던 장면이었다.
당시 이른바 추-윤 갈등(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사이의 알력)이 한창이던 시절, 검찰 개혁에 대한 의지를 마음속으로만 되새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하나의 행동으로, 즉 사진기자들이 찍으라고 책을 꺼내 읽으며 밑줄을 치는 행동으로 보여주고야 마는 장‘하리’의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실 ‘소설 장하리’는 소설이 아니다. 픽션이라고 해봐야 추미애 → 장하리, 윤석열 → 용건석, 한동훈 → 하도훈, 손준성 → 소성준, 노영민 → 나민영 등으로 이름을 바꾼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일화는 기사 검색을 통해 당시 실제 세계에서 벌어질 일들과의 대조와 확인이 가능하다.
어쨌든 이 소설에서 크게 대비를 이루는 인물군을 나누자면, ‘플레이’를 펼치는 용건석 등 검찰 그룹과, 이에 행동으로 맞서는 장하리 장관, 그리고 그 반대 극에는 행동 없이 생각과 기대만 하는 청와대 사람들(‘안 하리’ 그룹)이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하리’의 장한 행동들의 실례를 몇 개 보자.
*다음 날 장하리는 용건석의 도 넘은 측근 감싸기에 제동을 걸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도훈을 고검 차장검사의 직무에서 배제하고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발령 냈다. 그리고 하도훈의 비위에 대해 법무부가 직접 감찰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168쪽)
*장하리는 임기 초반 6개월 동안 수사준칙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227쪽)
*11월 30일 장하리는 검찰총장 직무대리 조남북에게 임수정 검사가 수사할 수 있게 중앙지검 검사 직무대리로 발령을 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232쪽) --- 이는 이른바 ‘한명숙 모해 위증교사’ 사건에 대해 임은정 검사가 감찰-수사가 가능하도록 지시를 내렸다는 의미다.
*장하리는 사표 접수를 확인하기 전까지 퇴근하지 않겠다고 엄명을 했다. 못 이긴 검찰과장은 퇴근 시각 직전에 사표 접수가 되었다고 결재판을 들고 나타났다. 장하리가 바로 결재를 한 직후 국회법제사법위원인 김정민 의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우주 차장검사가 실수로 사표를 냈는데 돌려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장하리는 결재가 끝나 되물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퇴근 후에도 김정민 의원은 사표를 없었던 일로 해달라며 조르는 전화를 세 번 더 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김우주 차장검사는 장관에게 결코 충성할 사람이다. 우리 편이다.’라는 내용이었다. (240쪽) --- 이 일화는 2020년 12월 당시 이성윤 중앙지검장에 반기를 들며 사표를 내겠다고 공언한 김욱준 중앙지검 1차장검사에 대해, 추미애 법무장관이 “사표가 접수되기 전까지는 퇴근 않는다”고 선언하고 사표를 받아내고야 만다는 스토리다. 행동하는 장하리는 ‘말로만 행동하는’ 상대방을 용납하지 않는다.
흔히 ‘정치는 말로 한다’고 한다. 하지만, 장하리는 말보다는 ‘내가 지금 무얼 해야 하지?’라며 생각 뒤 실행에 반드시 나서는 스타일이다.
장하리의 반대편 극에서, 행동 없이 생각과 기대만 하는 게 특징으로 그려진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행태 몇 대목을 보자.
*이미 한 명의 장관이 취임한 지 겨우 한 달 만에 용건석은 그 가족을 기소하고 구속시켜 물러나게 하지 않았던가? 그걸 지켜보고도 아무런 위험을 감수할 의지가 없이 그저 우아하고 점잖게 개혁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라면 의리가 없거나 한심한 것이다. (37쪽)
*대통령은 악함을 인식하고도 어디까지나 선의로 대하면 용건석을 콘트롤할 수 있다고 정말 믿고 있는 것일까? (100쪽)
*대통령은 ‘더 이상 검찰 뉴스가 1면에 보이지 않게 하라’고 했을 정도로 검찰개혁에 지친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로써 안타깝게도 검찰개혁은 접은 것으로 정리가 됐다. 개혁은 개혁 저항세력, 즉 잃을 것이 많은 기득권과의 전쟁인데 신문 1면에 시끄러운 전쟁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개혁 피로감을 그 누구도 아닌 대통령이 호소했던 것이 안타까웠다. (257쪽)
*70년 친일세력에 뿌리를 둔 강고한 기득권의 방패 역할을 한 검찰과 언론의 협공을 한꺼번에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적당히 상황관리만 하다가 개혁의 의지가 약해지고 시기도 놓치고 말았다. (…) 뿌리 깊은 제약 앞에 머뭇거리다가 장애물을 뛰어넘지 않았다. (260쪽)
*사실 한 방에 처리하지 않았던 것은 검찰총장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대통령이었다. 두 명의 법무부 장관 때에 네 번의 기회가 있었다. 명성 때 한 번, 장하리 때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용건석이 명성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지 마라, 그러면 자신이 물러나겠다고 민정수석을 통해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인사권자에 대한 노골적 항명을 그냥 눈감아주었다. 장하리가 채널A 검언유착 사건으로 측근을 감싸기 위해 감찰방해와 수사방해를 한 이유로 1차 수사지휘를 했을 때 지휘를 불수용하고 검사장 회의를 소집하는 난동을 부렸을 때 두 번째 해임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놓쳤다. 그 다음으로, 용건석 총장 본인과 부인, 장모의 비리를 한데 묶어서 이른바 '본부장 비리'라고 하는데 장하리가 이를 수사하도록 두 번째의 수사 지휘를 했을 때가 세 번째의 해임 기회였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하리가 감찰 결과 확인된 비위로 대통령이 징계 의결을 재가하면서도 검찰총장의 거취를 봐주었다. 오히려 장하리를 물러나게 함으로써 용건석의 간을 더 키웠다. 그것이 네 번째 놓친 기회였다. (319쪽)
‘플레이하는’ 검찰 세력을 묘사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눈에 띄는 것은 “쟤네 플레이 못해”라는 하도훈의 말에서 “플레이”라는 단어이다. 이것은 그들의 사고관과 연결되는 핵심어였다. 그들에게 정치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플레이”였다. 그들이 검찰 쿠데타의 과정에서나 그리고 실제 집권 후에도 ‘정치는 플레이’라고 여겼다. (…) 전 정부가 여론조사에 끌려다니며 여론에 눈치 보다가 정작 마땅히 해야 할 결정을 해야 할 때 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 실책이었다면 정반대로 검찰 세력은 여론에 앞서 결정을 하고 밀어붙이고 여론을 통한 ‘플레이’를 한다는 것이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192쪽)
장하리 관점에서 보면 플레이하는 검찰에 맞서 행동에 나선 장하리를, 행동 않은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해임시킴으로써 결국 검찰 세력의 승리를 도와줬다는 스토리다.
이 소설의 발간을 전후해 추 전 장관은 여러 인터뷰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섭섭한 감정을 여러번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검찰 개혁이라는 큰 싸움이 벌어진 결정적 순간에 문 대통령이 자신을 사임시키면서 검찰 개혁은 흐지부지됐다는 공개 비판이다.
소설은 이러한 대판 싸움 뒤에도 잠을 잘 자는 장하리의 모습으로 끝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녀는 살아있는 만큼 할 일도 끝이 없는 것이라고 대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 조롱도 두렵지 않다. 고립도 두렵지 않다. 더디더라도 결국에는 무엇이 본질인가로 수렴되어 올 것이다.’ 그날 밤 장하리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3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