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8호 김금영⁄ 2024.03.20 14:12:12
2022년 11월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이 작품이 등장해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바로 AI(인공지능) 기반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의 작품. 8m 높이에 달하는 초대형 미디어아트 작품은 MoMA가 200년 동안의 긴 역사 동안 수집해온 13만 8000여 점의 미술품을 학습한 AI가 여기에 관람객의 움직임, 소리 등 데이터까지 실시간으로 반영해 새로운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형태였다.
LG와 구겐하임 미술관은 기술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는 작가들을 발굴, 지원하는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운영 중이다. 1회 수상자인 AI 아티스트 스테퍼니 딘킨스는 올해 1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LG 올레드 디스플레이를 통해 작품을 구현했다. 두 번째 수상자로는 최근 가상현실(VR), 코딩 등 신기술을 활용해온 ‘넷 아트(Net Art)’의 선구자 슈리칭을 선정했다.
디지털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은 우리의 삶을 편하게 바꿨지만, 그래도 예술 창작의 영역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AI가 예술 영역에도 발을 들이며 범위를 넓히는 가운데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다.
‘기술을 활용한 실험적 예술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선이 있는 반면,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목소리로 예술을 표현하는 한 아티스트는 AI 기술이 흉내 낸 노래 영상에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가운데 AI를 작업에 적극 활용하는 필립 파레노가 “AI는 훌륭하지만, 창작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스스로 움직이는 벽과 연주자 없이 음악 흘러나오는 피아노
리움미술관이 전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의 개인전 ‘보이스(VOICES)’를 7월 7일까지 전시장 전관에 선보인다. 작가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이 둘이 결합되는 영역을 탐구하는데, 특히 이 이야기들을 데이터 연동과 AI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해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마련된 이번 대규모 개인전은 작가의 1990년대 초기작부터 대형 신작까지 아우르는데 역시 AI 기술 활용이 눈에 띈다.
이는 전시장 밖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다. 리움미술관 야외 데크에 설치된 탑 형태의 대형 신작 ‘막(膜)’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인지 능력을 지닌 인공두뇌학적 성격을 담은 작품이다. 탑에 설치된 센서를 통해 주변 기온, 습도, 풍량, 소음, 대기오염, 미세한 진동 등 환경적·사회적 자극을 흡수하는데, 미술관 바깥에서 수집한 이 정보들은 전시장 내부로 전송돼 다채로운 소리로 전환된다. 전시장을 거닐다 보면 듣게 되는 소리의 정체이기도 하다. 전시장 내·외부 다수의 목소리가 모여 이번 전시 ‘보이스’의 서사를 만드는 셈인데, 이 목소리를 모으는 역할을 AI가 담당한다.
이 목소리의 기저엔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예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배우 배두나와의 협업으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즉 배두나의 목소리가 AI에 의해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로 재탄생된 것. 그리고 이 새로운 목소리는 작가가 설정한 새로운 언어인 ‘∂A(델타 에이)’를 배우며 성장하다. 이 언어의 특징은 VSO(동사-주어-목적어) 순이다. 때로는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된다. 이처럼 실재와 가상을 연결하고, 여기서 또 새로운 창작 과정을 거치는 여러 지점의 교차점엔 AI가 있다.
M2 1층에 설치된 ‘세상 밖 어디든’(2000)은 이 목소리를 적극 활용한다. 일본 만화 캐릭터 ‘안리’에 목소리를 부여한 영상 작품이다. 아무런 이름도 역할도 없었던 이 가상의 캐릭터는 배두나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된 델타 에이 언어를 떠들며 현실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를 비롯해 이 공간엔 작가가 여러 협업자들과 제작한 1990년대~2000년대 초기작을 선보인다. 프랑스 그래픽 디자인 듀오 M/M(Paris), 네덜란드 패션사진 듀오 이네즈 앤 비누드, 동료 작가 피에르 위그 등과 제작했던 작품 10여 점을 한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M2 B1은 아날로그적인 소재와 첨단기술과의 만남의 장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장소다. 특히 석양이 물드는 듯 주황빛이 강렬한 전시장 곳곳을 부유하는 물고기 풍선, 그리고 조금씩 녹아가는 눈덩이, 연주자 없는 피아노가 눈길을 끈다. 먼저 ‘여름 없는 한 해’(2024)는 자동 연주 피아노를 전자센서로 연결해 연주자 없이도 원격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작품이다. 피아노엔 인공 눈이 계속해서 떨어진다.
‘내 방은 또 다른 어항’(2022)은 부유하는 물고기 풍선과 함께 전시장을 하나의 거대한 어항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작품을 보러 전시장에 온 것 같지만, 이들 또한 어항 속 물고기처럼 전시장을 부유하게 만드는 역할로 치환시키며 또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몽환감을 준다. 이 느낌은 태양이 사라지고 멸망한 지구의 해 질 무렵 석양빛으로 영원히 물든 상태를 시각화한 설치작품 ‘석양빛 만(灣), 가브리엘 타드,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2022)과 만나 더 극대화된다.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1995~2023)을 비롯해 전시장 한켠에 놓인 거대한 눈덩이들은 상상과 현실이 중첩된 몽환적인 전시장에서 전시 기간 내내 조금씩 녹아가며 현실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존재다. 그리고 이 아날로그적 소재들 사이사이 첨단 센서가 설치돼 실시간으로 전시장 내·외부 상황 정보를 받아들이며 움직이고, 소리를 낸다. 언뜻 보면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조합을 작가는 자연스럽게 아우른다.
작가는 첨단기술과 아날로그적 소재들의 조화에 대해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존재·상황과 상호작용하는 일종의 센서”라고 짚었다. 예컨대 안정적 환경을 유지하려는 전시장에서도 미세하게 변하는 온도, 기압 등의 요소 그리고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일으키는 작은 바람 등에 의해 눈사람은 녹고, 피아노는 연주되며, 물고기 풍선은 이곳저곳으로 날아다닌다. 전시장 내 설치된 그 어떤 것도 혼자서 오롯이 존재하지 않고, 다른 존재와의 상호작용이 있을 때 비로소 더 존재감이 확실해진다.
새까만 영화관 형태의 블랙박스는 분위기를 차분하게 반전시킨다. 영화관 스크린에 상영되는 ‘최초의 차양’(2016~2024), ‘마릴린’(2012), ‘귀머거리의 집’(2021), ‘C.H.Z.(지속적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2011)은 허구와 실재를 넘나드는 시공간을 주제로 한 영상들이다. 이중 마릴린은 기계 장치를 통해 시선과 음성, 필체를 구현해 유령처럼 허구의 눈속임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라운드갤러리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멈춰 있지 않다. 설치된 모든 장치들이 미술관 외부에서 수집된 데이터와 디지털 멀티플렉스 기술과 연동돼 살아있는 생명처럼 움직이고 소리를 낸다. ‘움직이는 벽’(2024)은 말 그대로 건물의 벽면이 떨어져 나온 듯 계속해서 전시장 안을 바다에 떠다니는 배처럼 유영한다.
‘차양’(2014~2023)은 극장 입구의 화려한 불빛 차양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연작으로, 작가는 극장 간판의 원래 모습에서 영화 관련 주요 정보를 제거하고, 할로겐의 빛과 차양의 껍데기만 남겨뒀다. 영화 대신 불빛 너머의 공간과 시간에 주목하게 만드는 이 연작은 현실을 공감각적으로 직시하게 한다. 이 작품은 전시장에 소개되는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미술관 데크에 설치된 신작 ‘막’이 보내는 정보와 연결돼 야외의 환경 조건에 따라 빛을 발하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이를 통해 실내와 바깥 세계가 서로 연결돼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공간엔 살아있는 사람의 움직임으로 표현되는 ‘라이브’ 작품도 공존한다. 춤추듯, 몸부림치듯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는 몇몇 인물이 블랙박스와 그라운드갤러리를 연결하는 두 대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이는 작가가 동료 작가 티노 세갈에게 관람객과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는 작품을 의뢰한 결과물 ‘이렇게 장식하기(쉬헤라자드 파레노)(보이스 버전)’(2024)다. 이들 또한 단지 전시장에 걸린, 멈춰 있는 작품이 아니라 꾸준히 전시장 환경, 사람들과의 접촉을 거치며 상호작용을 멈추지 않는다.
필립 파레노 “AI는 일종의 도구…감성은 창조할 수 없어”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필립 파레노는 이런 전시, 이런 목적이라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작가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작업을 이어가는데, 이 또한 단순히 눈으로 보기만 해서는 안 되고, 경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항상 익숙한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을 깨며 새 형식을 실험하는 작가의 작업을 아우르는 이번 전시는 공연 같기도 하다”며 “모든 것이 마치 죽은 듯 멈춰 있던 전시장은 관람객이라는 방문자와 변화하는 내·외부 요소의 자극을 받으며 점점 살아있는 유기체로 변화한다. 또 그 시간은 매번 똑같이 반복되지 않고 처한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변하는데 마치 우리 인생같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 다양한 경험을 직접 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작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AI가 대신해 일을 하거나, 창작을 했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나는 AI를 일종의 도구로서 창작에 사용하고 있다”며 “예컨대 날씨 데이터가 기반이 된 작품은 작업 과정에서 AI만 사용하지 않았다. AI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감성 등 살아있는 생명의 감각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이 필요하다. 이번 전시에서 목소리 또한 중요한 요소인데, AI로는 생성할 수 없는 감성을 부여하기 위해 배두나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작업에 AI를 활용하는 목적이 인간과 최대한 비슷하게, 또는 인간의 의식, 지성 등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진짜가 아닌 존재를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며 “지금은 AI를 도구로만 사용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관객에게 전시장 안에서 마음껏 헤매며 자유로운 상상을 하기를 바랐다. 그는 “이번 전시는 어떤 방식과 순서대로 관람객에게 작품을 감상하라고 정해놓지 않았고, 지시하지도 않는다. 마음이 가는 대로 이동하면서 부유하길 바란다. 나 또한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요리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을 하더라도 완결됐다고 느끼지 않는다. ‘미완결 상태’인 미술과, 변화까지 받아들이고자 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어 “공상하는 시간은 중요하다. 책을 읽다가 조금 다른 생각을 하다 보면 무엇을 읽고 있었는지 망각해 다시 그 부분을 찾아보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 마법적인 순간을 좋아한다.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가 생성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라며 “이런 매우 소중한 시간을 전시장에서 보내면서 만끽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