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최근 AI(인공지능)를 그룹 핵심 화두에 둔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리밸런싱)을 추진 중이다. AI와 반도체, 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분야에 초점을 맞춰 계열사들과 사업을 정리하며 이른바 ‘선택과 집중’ 전략을 이어가고 있는 것. 이를 위해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국내외에서 업계 주요 인물들을 만나고, 현장을 점검하는 등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SK이노베이션과 SK E&S 합병 작업 역시 이 같은 전략의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최태원 회장, 국내외 현장 점검 등 광폭 행보
최태원 회장은 AI 및 반도체 분야 글로벌 협력을 위한 행보를 지난해 연말부터 이어왔다. 지난해 12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생산기업인 네덜란드 ASML 본사를 찾아 SK하이닉스와 기술협력 방안(EUV용 수소 가스 재활용 기술 및 차세대 EUV 개발)을 끌어냈다.
올해에도 10차례 이상 AI 관련 행보를 했다. 올해 초 열린 세계 최대 전자·IT 전시회 ‘CES 2024’를 시작으로 AI 산업의 잠재력을 강조하며 그룹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 왔다. 특히 AI 업계 주요 인물들을 꾸준히 만나 눈길을 끌었다.
1월에 한국을 찾은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의 회동을 시작으로,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웨이저자 TSMC 회장 등을 잇달아 만나며 양사 파트너십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6월 미국 출장에서는 올트먼 CEO를 다시 만나고, 사티아 나델라 MS CEO, 앤디 재시 아마존 CEO, 팻 겔싱어 인텔 CEO 등과도 만나며 AI 동맹 강화에 나섰다. 7월 미국 출장에서도 SK 바이오팜과 SKC 자회사인 앱솔릭스 등 현지법인을 잇달아 찾으며 반도체 소재, 바이오 등 SK 미래사업 현장 점검에 나섰다.
미국 출장 당시 최 회장은 “지금 미국에서는 AI 말고는 할 얘기가 없다고 할 정도로 AI 관련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며 “그룹 보유 역량을 활용해 AI 서비스부터 인프라까지 ‘AI 밸류체인 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월엔 SK하이닉스 본사인 이천캠퍼스를 찾아 SK하이닉스 곽노정 대표 등 주요 경영진과 함께 HBM 생산 라인을 둘러보고, AI 메모리 분야 사업 현황을 점검했다. 이때도 최 회장은 “AI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위기에서 기회를 포착한 기업만이 살아남아 기술을 선도할 수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흔들림 없이 기술경쟁력 확보에 매진하고 차세대 제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최근 해외 빅테크들이 SK하이닉스의 HBM 기술 리더십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내년에 6세대 HBM(HBM4) 조기 상용화해 대한민국의 AI 반도체 리더십을 지켜며 국가 경제에 기여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8월 19~20일 열리는 SK그룹 지식경영 플랫폼인 이천포럼에서도 AI 시대에서 SK그룹이 어떻게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해 그룹 차원에서 논의가 이뤄질 예정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최 회장은 SK의 AI 밸류체인 구축을 위해 국내외를 넘나들며 전략 방향 등을 직접 챙기고 있다. 이런 행보는 한국 AI/반도체 산업과 SK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글로벌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며 “앞으로 최 회장의 출장 결과를 바탕으로 SK하이닉스, SK텔레콤 등 관련 멤버사가 빅테크 파트너사들과 함께 SK AI 생태계 경쟁력 강화를 위한 후속 논의 및 사업 협력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2026년까지 80조 원 추가 확보…AI·반도체에 투입 계획
SK그룹은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라 미래를 위한 투자도 강화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6월 말 열린 그룹 경영전략회의에서 그룹 차원의 AI 성장 전략을 주문했다. 경기도 이천 SKMS연구소에서 최태원 회장, 최재원 수석부회장, 최창원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주요 계열사 CEO 20여 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영전략회의를 열어 이 같은 전략 방향에 뜻을 모았다.
이에 따라 SK그룹은 2026년까지 80조 원을 추가로 확보해 AI·반도체에 투입키로 했다. SK그룹은 AI/반도체 투자를 통해 ▲HBM을 필두로 한 AI 반도체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로 꼽히는 AI 데이터센터 ▲개인형 AI 비서(PAA)를 포함한 AI 서비스 등 AI 밸류체인을 더욱 정교화하고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 SK하이닉스는 2028년까지 향후 5년 간 총 103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HBM 등 AI 관련 사업 분야에 약 80%(82조 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SK텔레콤, SK브로드밴드는 AI 데이터센터 사업에 5년간 3조 4000억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또한, 회의에서 CEO들은 AI/반도체 밸류체인에 관련된 계열사 간 시너지 강화를 위해 7월 1일부로 수펙스추구협의회에 ‘반도체위원회’를 신설하고,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을 위원장으로 보임하기로 했다.
SK그룹 관계자는 “다가올 큰 기회에 대비해 성장의 밑거름을 충분히 확보하자는 것이 이번 회의의 출발점이자 결론”이라며 “미래 지향적인 투자 활동은 SK 기업가치 제고 외에 경제 활성화 등을 통해 국가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SK E&S 합병…106조 ‘에너지 공룡’ 출범
SK그룹의 리밸런싱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SK이노베이션과 SK E&S 합병 소식이다. 7월 18일 SK는 임시 이사회를 열고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 동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8월 27일 합병안이 임시 주주총회에서 승인되면 11월 1일 공식 출범한다. 양사 합병으로 자산 100조 원, 매출 90조 원 이상의 초대형 에너지 기업 탄생이 예고됐다. 계열사만 219개에 달하는 SK그룹은 관리가 어려운 곳과 중복투자 사업을 정리해 효율적인 경영체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양사의 합병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AI 데이터센터에 대한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고 솔루션 개발을 하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관련해 최 회장은 7월 19일 대한상의 제주포럼 기자간담회에서 “두 회사가 합치면 훨씬 좋겠다고 생각한 게 AI 쪽”이라며 “AI에도 지금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 두 회사가 합병되면 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에너지 문제를 풀 수 있는 상당한 시너지가 난다”고 강조하며 리밸런싱 전략 중심에 AI가 있음을 밝혔다.
이날 최 회장은 최수연 네이버 대표와 함께한 AI 토크쇼에서도 “2028년에는 현재 AI 데이터센터 전력소비량의 8배가 필요하다. 현재 데이터센터의 탄소배출량이 항공산업 전체 배출량보다 1.5배다. 이대로라면 매년 2배씩 늘어나 환경문제에 부딪힌다”며 “(두 회사가)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소 등 관련 사업 구성을 갖추고 있기에 AI 데이터센터 솔루션이 상당한 사업이 될 거라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SK이노베이션은 정유·석유화학, SK E&S는 천연가스 등의 분야에서 독자적인 사업영역을 구축해왔다. SK이노베이션은 1962년 정유회사로 출발해 석유화학, 윤활유, 석유개발사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왔다. 또한 전기차 배터리, 소형모듈형원자로(SMR), 암모니아, 액침냉각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에너지 회사로 성장했다. SK이노베이션은 SK에너지와 SK지오센트릭, SK온, SK엔무브, SK인천석유화학,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 SK어스온, SK엔텀 등 9개 사업 자회사를 두고 있다.
1999년 SK이노베이션에서 분할된 SK E&S는 도시가스 지주회사로 출범한 이래 액화천연가스(LNG) 밸류체인을 완성하며 국내 1위 민간 LNG 사업자로 자리매김했다.
양사 합병으로 거대 에너지 기업이 탄생하면 석유에서 LNG, 신재생에너지, 배터리, 수소까지 이어지는 에너지 밸류체인의 수익성이 증대될 전망이다. SK그룹은 리밸런싱 등 운영 개선을 통해 3년 내 30조 원의 잉여현금흐름(FCF)을 창출해 부채비율을 100% 이하로 낮춘다는 목표다. 2026년 세전이익 목표는 40조 원이다.
SK그룹 관계자는 “HBM, 퍼스널 AI 어시스턴트 등 현재 주력하고 있는 AI 분야에 더해 AI 데이터센터 구축 등 AI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