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8호 김금영⁄ 2024.08.20 14:51:55
“발 연주로 박수를 받는다.”
얼핏 들으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갸웃할 만하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들으니 바로 납득이 갔다. 무대 위 오르간 앞에 앉은 연주자는 손뿐 아니라 발도 바쁘게 움직이며 페달을 밟았다. 그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양손과 양발이 건반과 페달을 각각 누를 때마다 깊고 웅장한 소리가 거대한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7월 말, 무더운 여름이 청량한 음악으로 시원하게 물든 순간이었다.
롯데콘서트홀의 시그니처 프로그램 ‘오르간 오딧세이’ 현장을 찾았다. 2017년부터 8년째 공연돼온 오르간 오딧세이는 단순히 연주뿐 아니라 악기가 연주되는 방식, 역사 등 흥미로운 스토리도 들려주며 관객과 함께 파이프 오르간을 깊이 탐구해 가는 음악회다.
‘세상에서 가장 큰 악기’로도 불리는 파이프 오르간은 거대한 파이프를 통해 소리를 내기에 단순히 ‘만드는’ 개념이 아닌 건축물의 일부로서 ‘건축되는’ 예술품과도 같다. 롯데콘서트홀의 파이프 오르간은 오스트리아 리거사에서 제작한 악기로, 4단 건반, 68개 스톱(음색), 5000여 개의 파이프를 장착, 거대한 규모와 높은 퀄리티를 자랑한다. 국내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공연장은 롯데콘서트홀과 부천아트센터 두 곳이 전부다.
이 무대에 이민준 오르가니스트가 올랐다. 2021년 제10회 생모리스 국제 오르간 콩쿠르 우승 후 주목받는 오르가니스트로 급부상하며 전 세계 주요 도시의 역사적인 오르간이 있는 장소에서 다채로운 리사이틀을 가진 주인공이다. 여기에 지난해 롯데문화재단이 주최한 ‘제2회 한국국제오르간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올해 7월 오르간 오딧세이를 포함, 9월 독일에서 열리는 슈투트가르트 리사이틀 특전까지 얻었다. 10월엔 한국국제오르간 콩쿠르 우승자 자격으로 다시 한 번 롯데콘서트홀 무대를 찾아 ‘오르간 리사이틀’을 열 예정이다.
화려한 경력 외에도 그는 ‘피아니스트 출신 오르가니스트’라는 독특한 이력으로도 주목받았다. 관련해 어떤 음악 여정을 걸어왔는지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지난해 제2회 한국국제오르간 콩쿠르 우승자로서 올 하반기 두 차례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오르게 됐는데 간단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사실 제1회 콩쿠르도 준비를 했었는데 갑자기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대회가 취소되면서 출전하지 못해 매우 아쉬웠습니다. 지난해엔 다행히 대회가 열렸고, 한국에서 열린 첫 오르간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해 매우 영광이었습니다. 여기에 부상으로 한국 제일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어 기뻤습니다. 한국 관객에게 오르간 음악을 더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 뿌듯합니다.”
- 세계 각국, 다양한 환경에서 오르간을 연주해봤을 텐데 롯데콘서트홀 오르간은 어떤가요?
“오르간마다 각각의 특성과 스타일이 있는데요. 현재 제가 살고 있는 독일 뤼벡의 야코비 교회에 있는 오르간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오르간 중 하나인데, 바로크 시대 악기입니다. 그래서 거의 바로크 시대 작품에 최적화돼 있어, 이후의 낭만주의 작품이나, 프랑스 작품들을 연주하기엔 조금 제약이 있습니다. 반면 롯데콘서트홀 리거사의 오르간은 최신식 악기로, 모든 레퍼토리를 다 연주할 수 있다고 보면 됩니다. 특히 오케스트를 모방한 듯한 웅장한 풀 사운드가 매력적입니다.”
- 롯데콘서트홀에서 7월 30일 오르간 오딧세이에 이어 10월 31일 리사이틀을 앞두고 있는데 어떤 곡들을 만나볼 수 있나요?
“오르간 오딧세이에선 학교 선배이자 가이드인 피아니스트 김경민 씨와 영화 ‘해리포터’ OST, 조지 거쉬인의 ‘랩소디 인 블루’ 등 대중에게 친숙한 음악들을 피아노-오르간 듀오곡으로 만날 수 있게 구성했습니다. 10월 리사이틀에서는 좀 더 학구적이고 오르간 음악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대곡들도 연주할 예정입니다. 바흐 파사칼리아 외에 레거의 코랄 ‘깨어나라고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 의한 판타지 그리고 일본 작곡가 니시무라 작품들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또한 제1회 한국국제오르간 콩쿠르 위촉곡이었던 박영희 선생님 곡 중에 오르간을 위한 ‘기도중에’라는 곡이 있는데요. 당시 코로나19로 취소돼 연주하지 못했었는데, 이번 10월 공연에서 연주할 수 있어 기쁩니다. 이를 위해 이미 박영희 선생님도 독일에서 뵙고 왔습니다.”
- 한국국제오르간 콩쿠르 우승의 또다른 특전으로 9월엔 슈투트가르트 리사이틀이 예정돼 있는데요. 10월 롯데콘서트홀 공연과 같은 레퍼토리로 준비 중인가요?
“완전히 같진 않고요. 해당 오르간 연주가 열리는 페스티벌 주제가 ‘판타지’입니다. 그래서 주최 측에서 판타지 곡들을 부탁해 프랑스 알랑의 판타지, 그리고 막스 레거의 바흐 주제에 의한 오르간 판타지 등을 연주할 예정입니다. 이 밖에 제가 뤼벡 국립음대에서 오르간 박사과정을 마칠 때 연주했던 곡들도 몇 개 선보일 예정입니다.”
- 공연을 통해 관객이 느꼈으면 하는 바는?
“‘오르간 음악이 무겁지 않고, 이렇게 재미있구나’를 느꼈으면 해요. 또 오르간이라는 악기가 생소하지 않고 좀 편하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 실제로 오르간은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악기죠. 관련 콩쿠르나 공연의 기회도 많진 않은데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를 오래 해오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하면 할수록 오르간이 대중적인 피아노와 비교해서는 생소하고, 마이너 악기로 많이 여겨진다는 걸 느꼈어요. 실제로 국내에서는 아직 오르간 콩쿠르가 2~3개 정도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 규모의 오르간 콩쿠르도 롯데문화재단이 주최한 한국국제오르간 콩쿠르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무대가 더 소중했어요. 제가 오르간을 시작한 건 아무생각 없이 정말 바흐 오르간 곡 하나의 매력에 빠져서였는데요. 좋은 파이프 오르간을 갖춘 롯데콘서트홀 환경에서 많은 관객을 만나 제가 그랬던 것처럼 오르간의 매력을 더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이런 장이 앞으로 국내에서도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 본래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오르간을 부전공했죠. 그러다 오르가니스트의 길을 걷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전공을 아예 바꾼 건 아니고요. 피아노도 꾸준히 치고 있습니다. 오르간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당에서 새벽 미사 연주를 하면서 13년 정도 연주해 왔어요. 새벽 미사 연주는 자발적으로 했던 건 아니고, 어머니가 시켜서 했는데요(웃음). 어릴 때부터 악기에 관심이 많긴 했어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갑자기 사라져서 ‘어디 갔나’ 찾아보면, 혼자 피아노 학원에 가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오르간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어릴 때 오르간이 너무 쳐보고 싶어서 미사 반주자 선생님 옆에 앉아 있다가 연주가 끝나면 쳐보기도 했고요. 한번은 오르간 선생님이 열쇠를 숨겨놓았는데, 제가 그 열쇠를 찾아 혼자 오르간을 열어서 모든 음색을 다 빼서 막 쳐보다가 수녀님이 지진이 난 줄 알고 깜짝 놀라서 올라온 적도 있었습니다(웃음).
이후 한예종에 입학했을 때 타 전공을 공부할 수 있는 기악실기 수업이 있었는데, 오르간을 레슨받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유아라 선생님이 바흐의 음악을 연주해보라고 권했는데, 그 작품이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내림 마장조 작품 번호 552였습니다. 그 작품을 연주하며 오르간 음악에 깊이 매료됐어요. 기악실기 수업은 비전공자가 듣기엔 제한이 많아 좀 더 오르간 연주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오르간을 부전공하게 됐습니다.”
- 전공을 아예 바꾼 게 아니라면 추후 피아니스트로서의 모습도 볼 수 있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오르간을 한국에서 부전공으로 시작했고, 피아노로 한예종 예술사를 졸업함과 동시에 오르간 전문사로 입학했다가 더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어 독일로 유학을 떠났어요. 뤼벡 국립음대에서 오르간 전공으로 석사 과정부터 시작해 3년만인 올해 6월 박사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또 지난해부터는 피아노 전문 연주자 과정에 입학해 수학 중입니다. 피아노를 그만둔 것이 아니기에 피아니스트로서의 모습도 보여드릴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기를 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 피아노를 전공한 경험이 오르간을 연주할 때 많은 도움이 됐나요?
“확실히 많이 도움이 됩니다. 오르간을 늦게 시작했지만, 피아노까지 포함해 음악을 공부한 세월을 따지면 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요. 특히 피아노를 통해 기본기와 테크닉을 많이 다질 수 있었어요. 오르간 연주 시 테크닉이 엄청 중요한데, 연습할 때 어려운 점이 있으면 피아노로 연습하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가 음악을 만들기에 솔로악기 중 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낭만곡들이나 음악 표현법을 공부할 때도 피아노를 통해 많이 배웠어요.”
- 오르간과 피아노를 모두 경험한 입장에서 각각의 매력을 꼽자면?
“피아노는 아주 섬세하고, 제가 표현하고 싶은 만큼 표현이 가능한 악기 같아요. 피아노에서 제일 좋아하는 작곡가는 슈만인데, 연주할 때마다 몰입되고, 음악을 무궁무진하게 만들 수 있는 매력이 있어요.
오르간은 아주 작은 소리부터 큰 소리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데 여기서 오는 해방감과 짜릿함이 있어요. 피아노는 큰 소리를 내려면 몸에 힘을 써서 스스로 리드해야 하는데, 오르간은 크게 치든 작게 치든 파이프를 통해 나오는 소리는 똑같기에 다른 음색을 추가하거나 스웰박스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소리 크기를 조절해요. 스웰박스를 열면 소리가 커지고, 닫으면 작아지는 식으로요.
또한 피아노는 건반을 한번 누르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소리가 사라지는데, 오르간은 파이프에 공급되는 바람으로 소리가 나서 손을 떼지 않으면 계속 소리가 나요. 그래서 피아노가 건반을 치는 게 중요하다면, 오르간은 잘 떼는 게 중요하죠. 같은 건반 악기라도 이렇듯 각각의 악기적 특성과 매력이 있어요.
오르간은 거의 무한정의 스톱 조합으로 소리를 만들 수 있고, 이 거대한 악기를 내가 지배하는 느낌이 특히 매력적이에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것처럼요.”
- 오르간은 집에서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아닌데, 스톱을 조합할 때는 다 상상으로 하는 건가요?
“처음엔 저도 어떻게 하는지 몰랐어요. 지금도 솔직히 제가 잘한다고 할 수는 없는데, 그렇기에 음색을 잘 만들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고 있어요. 이것저것 음색을 더하기도, 어떤 소리가 나는지 시험하면서요. 그러기 위해 많은 오르간을 접하고, 만져보는 게 중요해요. 외국 학교에서는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접하면서 많이 배웠고요. 학교 외에도 역사가 깊은 교회 등을 찾아가 오르간을 연주하며 연습했어요. 한국엔 파이프 오르간이 거의 없어서 전자 오르간으로 주로 연습했고요.
이번 오르간 오딧세이에서 해리포터 OST곡이나 헝가리안 랩소디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듀오 버전의 악보만으로, 제가 원곡을 들으면서 소리를 상상해 스톱을 조합했습니다. 완전 오르간곡이라기보단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주 방식의 곡들이 대부분이라 어떻게 하면 오르간으로 오케스트라와 비슷한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어떻게 효과적으로 음색을 낼 수 있는지 많이 고민했어요. 랩소디 인 블루 등에 들어가는 클라리넷 스톱은 다른 오르간엔 없는 경우가 많은데 롯데콘서트홀 오르간은 이 스톱을 갖추고 있어 최대한 많이 사용해 더 다채로운 연주를 만들고자 연구했습니다.”
- 직접 곡을 쓰기도 하나요?
“그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즉흥연주 수업을 배웠는데 재능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 오르간을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추천곡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가 가장 대표적이고요. 이번 오르간 오딧세이의 랩소디 인 블루도 있습니다. 오르간곡이 어렵고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오르간으로 편곡된 여러 작품을 많이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영화 ‘인터스텔라’에 삽입된 영화 음악 등도 좋습니다.”
- 오르가니스트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해준다면?
“어떤 악기든, 직업이든 좋아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어렸을 때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서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서 피아노 학원을 갔었어요. 물론 항상 좋을 수만은 없었죠. 연습을 하다 어느 순간엔 힘들어서 피아노를 치기 싫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늘 그대로였죠. 음악을 사랑하고, 오르간의 매력에 더 빠지면 언젠가는 자신의 연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 앞으로 어떤 연주자로 불리고 싶나요?
“특별히 불리고 싶은 수식어는 따로 없고요. 그보다는 오르간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전 연주자로서 계속 열심히 공연을 하고 싶어요. 공연 프로그램도 보다 쉽게 대중적으로 짜서 관객이 오르간을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점점 시대가 변하면서 음악 트렌드도 빠르게 바뀌어 가지만, 항상 음악을 대할 때는 변함없이 진실된 마음으로 임하고 싶어요. 제 음악이 사람들에게 좀 더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요. 사람들이 치유 받고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 그것이 제가 음악을 하는 이유이자 목표입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