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6호 김예은⁄ 2024.12.03 10:19:07
미국 서부 텍사스의 소도시 마파(Marfa) 근교, 메마른 사막 한 가운데 프라다 매장이 놓여있다.
사막 도로변에 세워진 초라한 건물. 그와 대비해 고고한 위상을 표출하는 명품 브랜드 로고. 실제 매장 크기로 세워진 이 건축물은 바로 북유럽 출신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듀오 마이클 엘름그린과 잉가 드라그셋의 설치미술 작품이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화려한 핸드백과 하이힐이 진열되어 있다면, 인간은 과연 어떠한 유익을 위해 이 브랜드와 제품을 소비할 것인가? 작가들은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광경의 대비를 통해 현대 소비 사회의 진실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거대한 건축물과 그 속에 담긴 요소 간의 부조화를 통해 현대 사회의 민낯을 새로운 시선으로 조망하는 듀오 작가의 대규모 전시가 대한민국 서울,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내년 2월 23일까지 전개된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협업 30년을 기념하여 'Spaces' 전시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작가들의 공간 작업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첫 번째 기획이자, 아시아에서 선보이는 최대 규모의 전시이다.
이들은 초기 빈 캔버스처럼 펼쳐진 화이트 큐브를 다양한 방법으로 해체하는 조각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작품에 건축 요소를 도입해 전시 공간 자체를 예기치 못한 환경으로 탈바꿈하여 기존 공간의 기능과 의미를 전복시키고, 일상에 내재된 단면과 권력 구조를 탐구해 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이들은 집, 수영장, 레스토랑, 주방, 작가 아틀리에 등 모두 다섯 개의 공간을 대규모 설치 작업으로 전환한 작품을 선보인다. 소셜미디어에서 불특정 다수의 이미지를 스크롤 하듯, 불연속으로 펼쳐지는 전시 공간은 물리적 현실과 디지털 세상을 오가는 현대인의 일상을 살펴보게 한다.
건축물이라는 거시적 공간 안에는 인물을 비롯해 크고 작은 조각 50여 점과 연출품이 공존하며 작가들이 심어 놓은 서사를 확장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작가들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암시하고, 의도적으로 누락한 서사를 관람객이 스스로 부여하도록 유도한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관람객은 가장 먼저 '그림자 집'이라는 이름의 완전한 규모의 집과 그 건물 안에서 창문을 바라보며 서 있는 한 인물과 마주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관람객들은 그 인물과 마주 설 수 있지만, 그 인물과 눈을 마주할 순 없다는 점이다. 그 인물은 창문을 향해 서 있음에도 창밖을 응시하기보다는 자신이 그린 특정 객체와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의 부재는 이 전시 공간 속 5개의 분리된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다.
집은 가족 간의 교류와 연결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거실, 주방, 침실, 화장실까지 갖춘 완전한 규모의 집 안에 홀로 선 하나의 인물만 존재한다.
이 인물은 상호 간의 교류를 상징하는 소파, 식탁 등을 뒤로한 채로 스스로 단절된 공간 속에서 창밖을 응시하며 서 있다. 그가 몰두하고 있는 대상 역시 창밖의 또 다른 교류의 대상이 아닌 자아, 즉 창을 통해 만들어진 자신만의 상징물과 세계이다. 그는 안개 낀 창문에 새겨진 알파벳 ‘I’ (자기 자신) 또는 숫자 1(혼자)로도 해석할 수 있는 물체를 그리며 사색에 잠겨 있다.
이와 대비되게 그가 존재하는 공간 내의 사물들은 무언가와의 연결을 갈망한 채 존재한다. 부엌에 놓인 2쌍이 짝지어진 조명, 침실 속에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는 기이한 형태의 침대, 그리고 화장실에 존재하는 하나의 수도관으로 연결된 2개의 세면대 등이 누군가와의 연결을 갈망하는 인간의 내재된 욕구를 암시하고 있다.
두 번째 전시실에는 물이 빠진 대형 수영장이 자리한다. 상호 교류와 공공성을 상징하는 대형 수영장이란 공간을 통해 작가들은 역설적으로 상호작용의 부재 및 현대 사회의 고립과 단절에 관한 실존적 질문들을 던진다.
물이 부재한 수영장은 오늘날 공공장소의 쇠퇴와 공동체의 상실을 암시한다. 수영장을 무대로 작품 속에는 고전 작품을 연상시키는 여러 인물의 백색 조각들이 등장한다. 작가들은 대리석 느낌의 흰 인물 조각과 균형 잡힌 자세를 통해 고전적인 조각의 미학을 활용하되, 그 소재를 비틀어 기존의 관념을 전복시키는 시도를 꾀하고 있다.
관객들은 여러 조각 속 인물이 한 공간에 있음에도 서로 눈을 마주하지 않으며, 각자가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해 상호작용하지 않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관객의 시선에 무관심한 각각의 조각들은 관객과 조각 사이의 기존 관계 역시도 뒤집는다.
나아가, 작가들은 조각이라는 유서 깊은 전통과 VR이라는 최신 기술을 대조적으로 마찰시킨 초현대적인 인체 묘사를 통해 급격한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꼬집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 듀오는 미술사에서 강조되는 응시의 개념을 전복시킴과 동시에 교류를 위해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진정한 교류가 없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조명한다.
이 대형 공간 안에는 재미있는 요소가 숨겨져 있다. 바로 수영장이 펼쳐진 벽면 한 켠에 존재하는 작은 구멍이다. 이 구멍은 관람객의 시선을 그 구멍 속에 있는 특정 작품으로 유도한다. 이 순간은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없으며, 한 번에 한사람만이 향유할 수 있는 순간의 경험이다. 이를 통해 작가들은 관람객이 공간 속에 공존하는 존재들과 분리된 채 관람객 역시 혼자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이 순간, 전시장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그곳에 존재하는 다른 인물 조각들과 함께 관람객마저도 시선의 부재와 상호 단절이 느껴지는 찰나를 연출하게 한다. 즉, 형상화된 조각과 함께 관람객 등 작품 속에 참여한 모든 인물이 공동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단절된 세계에 몰두한 모습으로 완성된다. 이처럼 참여자마저 작품의 일부로 편입시켜 고립된 자아를 경험케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교류가 부재한 현대사회 속 단면과 공간의 의미를 성찰하도록 유도한다.
이어 펼쳐지는 ‘더 클라우드’ 레스토랑 공간은 세계 각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파인다이닝 식당의 요소들을 재현하고 있다. 식당은 거대한 벽을 중앙에 두고 리셉션과 다이닝 공간이라는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 안에 서로 대비된 두 인물이 놓여있다.
최근 레스토랑은 종종 소셜미디어 소비를 겨냥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제공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 결과, 음식 향유와 상호 교류를 위해 존재하던 기존의 공간은 소셜미디어상 자기 표현과 자기과시의 무대로 전복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화려한 식당 배경과 달리 비어 있는 음식 그릇, 수많은 테이블과 의자 속에 홀로 앉아 영상 통화 속 가상의 인물에 몰두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이를 대변한다. 이를 통해 작가들은 현대인들이 정의하는 연결의 의미,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음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와 반대로 리셉션 공간에 있는 한 인물은 집 거실 소파가 아닌 식당의 리셉션 공간에 길게 누워 잠들어있다. 파인다이닝 식당이라는 화려한 배경과 대비된 편안한 복장과 자세의 인물.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세계와 자신을 차단하고 있다.
작가들은 변화된 사회적 구조 안에서 개인에 부과되는 일련의 압박과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그 결과로 현대인이 겪는 피로와 무력감을 두 작품간의 대비를 통해 상징하고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관람객은 끊임없이 무언가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인간, 교류가 있지만 교류가 없는 공간, 거대하고 화려한 공간 속에서도 자신만의 고립을 자처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작품 속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관람객들은 이 화려한 공간을 향유하는 자신을 사진에 담아 또 다른 소셜미디어 속 자아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가상 공간 속 누군가와 교류를 시도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실존적 의미의 교류가 공존하는지를 자문하게 될 것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관계자는 "물리적, 개념적 경계를 확장시켜 전시 공간 자체가 작품인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현대사회의 고착화된 단면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기회를 제안하고자 한다"며, "(전시 공간 속에서) 숨겨진 이야기를 암시하는 곳곳의 단서를 찾고 조합하여 엘름그린 & 드라그셋이 시작한 이야기를 완성해 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화경제 김예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