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전시장 공간에 들어선 하얀 가벽 4개. 본래라면 일렬로 늘어서 전시되는 것이 통상인 그림들이 각 벽에 걸려 평면 그림인 동시에 입체 설치 작품이 되는 풍경을 만들었다.
두산갤러리, 지원 범위 확장…한나 허 국내 첫 개인전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가 한나 허 작가의 국내 첫 개인전 ‘한나 허: 8’을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국내 작가를 소개하는 데 집중해 왔던 두산갤러리가 지원 대상의 범위를 국제적으로 넓히는 장이기도 하다.
두산갤러리 장혜정 수석 큐레이터는 “2007년 문을 연 두산아트센터는 국내의 젊은 작가, 큐레이터에 주목해 왔다”며 “대표적으로 두산연강예술상을 통해 연극, 미술, 아트랩 부문 등을 지원해 왔다. 특히 두산갤러리는 두산아트랩 전시를 통해 35세 이하의 젊은 국내 작가들을 적극 소개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올해를 기점으로 두산갤러리는 지원의 장을 더 넓혀 재능 있는 국내 작가의 작업을 해외에 알리고, 반대로 해외의 좋은 작업 또한 소개하고자 한다”며 “이 일환으로 첫 소개하는 작가가 바로 한나 허로, 두산갤러리가 지원의 대상을 한국 국적의 예술가에서 한국계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국에 살면서도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를 잃지 않는 민족)로 확장하는 시도”라고 짚었다.
한나 허는 캐나다 토론토 출생으로, 미국 LA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한국계 작가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 관람객과 처음 만나게 됐다.
작가는 “교포 작가로 활동해온 내게 이번 전시는 흥미로운 동시에 두려움도 공존하는 전시였다. 많은 가족이 한국에 살지만, 실질적으로 내 삶은 주로 해외에서 이뤄졌고, 여전히 선입견이 존재하기에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어디서나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라며 “흥미로운 무게감을 느끼며 작업하고,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뉴욕 기반 큐레토리얼 오피스 C/O의 설립자 크리스토퍼 Y.류(Christopher Y. Lew)와 공동 기획했다.
장혜정 큐레이터는 “작가의 작업 그리고 좋은 작가를 소개하고자 하는 두산갤러리의 방향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큐레이터와의 협업이 중요했다”며 “과거 두산갤러리는 뉴욕에 전시 공간을 운영했었는데, 이때부터 크리스토퍼는 두산갤러리의 미션을 이해하고 있었다. 2022년 프리즈 서울에서 진행된 ‘포커스 아시아’에서는 공동 어드바이저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크리스토퍼를 통해 한나 허 작가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는 “약 1년 전부터 한나 허 작가, 장혜정 큐레이터와 전시를 논의, 준비했다. 약 5년 전 LA 개인전에서 작가를 만났는데, 당시 섬세하고 정교한 기법으로 ‘문턱, 한계점’ 주제를 심도 있게 파고든 작업이 인상적이었다”며 “한국에서는 처음 열리는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이런 작가의 작업을 소개함과 동시에 작가 스스로 또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스텝의 전시”라고 말했다.
‘문턱’의 의미
작가는 회화와 설치를 통해 관람객의 시지각 체계를 시험하는 복잡한 화면을 구성한다. 이를 통해 구체적인 현실 너머 초월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에 다다르기 위한 탐구를 이어간다. 이번 전시에서도 탐구가 이어지는데, 여기에 새로운 시도도 포함한다.
전시장에 기둥처럼 세워진 벽 4개에 그림을 설치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마치 등을 맞대어 선 듯 설치된 회화 연작들은 감상 순서가 따로 없다. 관람객은 벽의 안쪽, 바깥쪽 공간을 자유로이 오가며 작품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벽 사이를 오가면서 관람객은 동선을 만드는 행위자의 역할로서 작품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작가는 “이번 전시 제안을 받고 두산갤러리에 초대받았을 때 큰 전시 공간에 흥미를 느꼈다. 내가 그간 전시를 가졌던 곳들 중 가장 넓었고, 이에 제약을 벗어나 여러 시도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일반적으로 전시라 하면 벽에 나열된 그림을 예상하기 쉬운데 그러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 그림이 함께 모였을 때의 상황을 구성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가벽을 설치해 여기에 그림을 전시하는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전시장에 설치된 ‘8’(2024)은 하나의 설치 작업이자 8점의 개별 그림이기도 하다. 이 작품들은 모두 ‘문턱(Threshold)’이라는 동일한 제목을 공유한다. 안과 밖을 연결하는 지점에 존재하는 문턱은 어느 한 분야에 속하지 않고,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무한한 확장성을 지녔다.
또한 결국 넘어야 하는 문턱은 한계를 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도 드러낸다. 작가 또한 매번 작업하는 순간이 한계의 연속이라고 한다. 반복적으로 화면을 칠하고 또 칠하는 행위는 마치 수행과도 같은데, 여기서 한계를 맞닥뜨리고 또 넘기를 반복한다는 것.
그렇게 탄생한 그림들에서는 ‘8’이라는 형태가 눈길을 끈다. 작가는 “대칭적인 구조를 지닌 ‘8’의 형태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고 부연했는데, 이는 벽의 안과 밖에서 서로 대칭을 이루듯 설치돼 있는 그림들의 상황과 연결되기도, 그리고 작품을 통해 무한히 반복되는 작가의 수행 과정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윈도우갤러리를 활용한 협업도 보여준다. 윈도우갤러리엔 작가가 직접 초청한 동료 작가 나미라의 신작 ‘화음(Chord)’(2024)이 설치됐다. 두 작가는 서로의 작업을 깊이 이해하며 주기적으로 협업해 온 관계로, 이번 전시를 위해 나미라는 한나 허 작업의 주재료가 되는 시각적 효과와 색상 모티프를 참조해 새로운 설치 작업을 제작했다.
그는 일상적인 재료를 통해 작품을 마주하는 관람객의 인식 가장자리를 뒤흔드는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다. 특히 그의 작업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빨간색은 빛이 희미해질 때 시야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색으로, 지각 너머 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통로로서 활용된다. 이번 설치 작업은 거울과 빨간색 유색 필름을 활용해 두 개의 상반된 공간을 만들며, 비워지고 채워짐이 반복되는 공간을 창조한다.
두산갤러리 측은 “이번 전시는 한나 허 회화 고유의 특성과 이에 상응해 섬세하게 구축된 환경, 확장된 협업의 방식을 통해 인식의 경계를 끊임없이 흐트러트리고 여닫는다”며 “관람객은 현실을 초월한, 고양된 시각적, 신체적 경험의 문턱에 위치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두산갤러리에서 12월 21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