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0호 김예은⁄ 2025.02.24 17:06:41
정치와 경제는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자본시장 밸류업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의 정책은 물론, 이것이 실효성 있는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적 기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난해 말, 정부가 ‘기업가치 제고(밸류업)’의 주요 제도적 장치로 마련한 세제 개편안 등 5개 제도가 야당의 반발에 부딪혀 모조리 ‘백지화’됐다.
5개 제도 안에는 국민 자산 형성을 촉진하기 위한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세제 지원 확대, 기업의 고용 확대를 유인하기 위한 ‘통합고용세액공제’ 개편안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야당은 ‘부자 감세’를 이유로 이들을 모두 폐기 처리했다.
정부는 해당 법적 제도의 보완을 재추진한다는 입장이지만 글로벌 기업 경쟁이 심화되며 자본 시장 활성화가 시급한 이때, 글로벌 속도전에 뒤처진 결과를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가 자인한 꼴이 됐다.
정부의 밸류업 정책은 투자자, 기업, 그리고 시장 시스템이라는 3대 축을 중심으로, 다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정책이다.
투자자에게는 ‘세제 혜택’을 통한 장기적 자산 형성 기회 제공, 기업 입장에서는 밸류업의 실행을 가로막는 각종 ‘세금 감면과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기업의 정책 참여 유인을 확대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시스템 측면에서는 ‘공매도 전산화 및 대체거래소(ATS) 출범’ 등 인프라 개선 등이 오는 3월 시장 도입을 앞두고 있다.
정부는 올해 1월 1일부터 투자자와 기업의 유인을 위한 세제 개편 적용을 추진해 왔으나, 지난 12월 해당 법 개정안이 최종 백지화되며 일단 오는 3월부터 신규 자본 시스템 도입만을 먼저 추진하게 됐다.
지난 12월 10일 국회에서 폐기된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국민 재산 형성 기회와 '부자 감세'
먼저 정부는 ‘투자자’ 입장에서 밸류업 기업에 대한 투자 유인을 제공하기 위한 법 개청을 추진했다. 우선, 주주의 배당 소득을 ‘저율’로 분리 과세해 개인 투자자들이 국내 주식에 장기 투자할 유인을 제공하는 배당소득 분리과세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현행법상 배당소득·이자소득을 합한 금융소득은 2000만 원을 넘으면 다른 종합소득과 합산해 최대 49.5%의 누진세율을 적용하도록 하고 있어, 주주 배당을 통한 주주환원 증대라는 밸류업의 추진 목표와 배치된다.
이에 정부는 개인주주에 대해 현금배당의 일부를 분리과세하고, 분리 과세자의 세율은 14%에서 9%로, 종합과세자는 최고 45%에서 25%로 감세하는 정책을 올해 1월 1일부터 개시하도록 추진해 왔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해당 개정안이 “초부자 감세의 완결판”이라고 비판하며, 조세 부담의 수직적 형평성을 제고하는 차원에서 수정안에서 이 내용을 삭제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세제 지원 확대 방안도 무산됐다. ISA는 한 계좌 내에서 주식·펀드·채권 등 여러 금융상품을 투자하면서 절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통장이다. 비과세 혜택을 통해 일반 서민의 자산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도입된 이 제도는, 정부의 세제 혜택으로 최근 계좌 가입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ISA 가입 시 투자액에 따라 배당·이자소득의 비과세 혜택이 주어지는데, 정부는 ISA의 납입한도를 연 2000만 원(총 1억 원)에서 연 4000만 원(총 2억 원)까지 2배 확대하고 비과세 한도는 연 400만 원에서 1000만 원으로 2.5배까지 늘리는 내용의 법 개정을 추진해 왔다. 또한 국내투자형 ISA를 연 2000만 원(총 1억 원) 한도로 신설하고 그간 가입이 제한됐던 금융소득 종합과세대상자의 가입을 허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해당 내용 역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는 ISA가 출시 목적인 국민 자산 형성 지원기능을 강화하고 국내 자본시장의 수요 기반을 확충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다만 ISA 납입한도 및 비과세 한도까지의 인원·비중을 감안하면 한도 상향 조정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으며, 특히 고액 자산가도 ISA 가입을 허용하는 건 제도 취지에 맞지 않다며 반대했다.
밸류업 정책이 투자자 개인의 차원에서는 자산 확대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는 투자자를 위한 자본 시장 활성화, 기업과 국가 차원에서는 국내 기업 성장과 국가 경제를 지원할 장기적 자본시장 확충에 있음을 고려해 볼 때, 금융소득 종합과세대상자가 소유한 거대 자본의 국내 증시 유도책이 ‘부자 감세’를 이유로 폐기된 셈이다.
주가 부양 위한 기업 밸류업 활성화 정책도 막혀
기업 차원에서 밸류업은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법률과 세제 지원 등이 동반돼야 시장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에 정부는 주주환원을 늘린 기업에 대해 법인세 감면 혜택을 부여하는 ‘주주환원 촉진을 위한 법인세 과세특례 신설’ 등의 세법 개정을 올해 1월 1일 적용을 목표로 추진해 왔다. 하지만, 이 역시 물 건너갔다.
개정안에 따르면, 정부는 주주환원 촉진 세제로 밸류업 자율 공시를 이행하고, 배당·자사주소각으로 주주환원을 확대한 코스피·코스닥 상장기업에 세액공제를 제공하고자 했다. 주주환원 확대 기준은 지배주주(특수관계자 포함) 지분비율을 제외하고, 직전 3년 평균 대비 주주환원 금액 5% 초과 증가분으로, 이를 통해 기업의 주주환원 유인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다. 조특법 개정이 이뤄질 경우, 적용 기간은 2025년 1월 1일부터 2027년 12월 31일까지 3년간 사업연도의 주주환원 기업이 대상이었다.
기획재정부는 "주주환원 촉진 세제 신설과 이에 따른 주주환원 확대는 주식 보유 수익률 상승으로 이어져 주식으로의 자금 유입과 기업 가치 상승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으나 해당 개정안은 조세소위원회에 법안으로 상정되지도 못했다.
이 밖에도 국내 기업들의 기업가치 상승과 자본시장 발전을 위해서 주요한 요소로 꼽히는 상속세 최고세율 문제도 지난해 말 법 개정이 무산됐다. 밸류업 프로그램의 주요 축이 상장사의 주주 친화 정책을 유도해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을 담고 있지만, 정작 지배주주는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부담하는 높은 상속세율로 기업 스스로가 주가 부양 의지를 갖기 쉽지 않다. 주가 부양 의지를 기업 스스로가 포기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어서 해당 법 개정은 무엇보다 밸류업 실현 과정에서 핵심적 논점으로 거론돼왔다.
여당은 기업 경쟁력 유지 등을 위해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인하하고, 동시에 가업상속공제 확대 등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도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와 함께 자녀 공제 확대(현행 1인당 5000만 원→5억 원) ▲최대 주주 주식 20% 할증평가 폐지▲밸류업 우수기업 공제 한도 2배 확대 등의 내용을 지난해 상속세및증여세법 개정안에 담아 추진한 바 있으나, 이 역시 무산됐다.
정부는 중소·중견기업의 밸류업 참여 유인을 확대하기 위해 해당 기업의 2·3세가 부담하는 과도한 상속세 부담을 경감하는 상·증세법 개정도 추진했다. 배당이나 투자를 늘린 기업의 상속세 공제 한도를 600억 원에서 1200억 원으로 늘려주는 내용을 담은 가업 상속 공제 확대 법안 역시 민주당의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요구에 조세소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미국 직장인의 금융 투자 잔액, 1억9000만 원 수준
선진 자본시장 문화가 정착된 미국 시장의 사정은 어떨까.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시가총액의 61%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주식시장을 떠받들고 있는 미국의 성장 기반은 ‘자본 투자’다. 미국 기업은 1990년 중반 이후부터 주식시장에서 연금과 장기투자 자본을 중심으로 한 비주거용 자본투자 비중이 GDP의 17%에 육박할 정도로 높은 비중으로 이뤄지며, 독보적인 기업 경쟁력을 확보해 왔다. 2020년 이후 미국의 실질 경제 성장률은 10%로 G7 평균치의 3배를 웃돌았으며, 이 같은 기업의 성장성은 투자자들에는 고수익으로, 기업에게는 지속적인 투자 자금 유입으로 되돌아왔다.
한국의 퇴직연금(IRP)이나 개인형 퇴직연금과 유사한 미국의 ‘401(k) 계좌’에는 총 9조 달러(약 1경2933조 원)에 달하는 자산이 예치돼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해당 자산은 주식, 펀드, ETF와 같은 상품으로 대부분 유입되고 있다.
미국의 대형 퇴직연금 운용사 피델리티 인베스트먼츠가 20일(현지시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자본시장을 뒷받침하는 퇴직연금인 ‘401(k) 계좌’의 지난해 3분기 기준 평균 잔액은 13만 2300달러(약 1억 9000만 원)였고, 65~69세 가입자들의 평균 잔액은 25만 2800달러(약 3억 6000만 원)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계좌 잔액이 100만 달러 (약 14억 원)가 넘는 백만장자 가입자도 54만 4000명으로 전체 계좌 보유자의 약 2.2%로 집계됐다.
이처럼 선진화된 미국의 자본시장과 비견할 때, 국내에서 추진하고 있는 자본시장 선진화와 기업 성장을 위한 투자 재원 확보 방안이 부자 감세라는 단어 하나로 편중될 문제인지 국민이 판단하고 주시해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