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얀 파이프리치는 유고슬라비아 공습 이후 파괴된 건축물의 변화과정을 직접 촬영한 사진, 컬렉션 아카이브사진, 비디오 프로젝션, 슬라이드쇼, 출판물 등으로 구성된 작업을 선보여 왔다. 당시 공산주의 시대의 상징으로 인식될 수 있는 건물을 통해 그 시대의 기억과 거대한 자본으로 인해 개발되는 과정을 기록했다. 태국의 작가 사룻 수파수티벡은 현재 관광지가 돼버린 콰이강의 다리를 역추적해 잊힌 역사와 기억을 환기시킨다. 전시장에 의례적 공간을 차림으로서 역사와 정체성이 왜곡되는 현상을 포착한다.
보얀 파이프리치 개인전 ‘이글스, 육군 본부 그리고 축구 영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출신 작가 보얀 파이프리치는 2014년부터 베오그라드의 건축 유적지인 육군 본부, 베오그라드 워터프론트, 몬테비데오 영화 세트장을 촬영하고 기록해 왔다. 그가 기록한 6000장의 사진을 바탕으로 작업한 비디오 작품을 대안공간 루프에서 진행 중인 ‘보얀 파이프리치 개인전: 이글스, 육군 본부 그리고 축구 영화(Bojan Fajfrić: Eagles, Army Headquarters, and Football Films)’(2월 15일~4월 12일)에서 만나볼 수 있다.
보얀 파이프리치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부터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다. 헤이그의 왕립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아카데미에서 레지던시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개인적인 기억, 집단적 역사의식, 필연적인 사건의 과정을 결합해 역사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제시하며 주로 무빙이미지와 사진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영상작품에서는 베오그라드 도심의 물리적 환경과 인프라, 사회 문화적 네트워크를 파괴하고 손상시키는 분쟁과 역사적 수정주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투기의 이면을 살피도록 안내한다.
대안공간 루프 전시장에서는 6000장 이상의 사진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한 3-채널 영상 대형 스크리닝을 설치했다. 6000장이 넘는 사진으로 구성된 작가의 방대한 개인 아카이브는 도시의 황폐함과 재건 사이의 진화과정을 추적한다. 주요 촬영지는 1999년 나토(NATO) 공습으로 파괴된 육군 본부, 도시 구조를 재편하는 베오그라드 워터프론트 부동산 개발 현장, 1930년대 베오그라드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이다. 이 장소는 전쟁의 비극과 부동산 개발, 도시의 급격한 변화를 드러낸다.
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은 코소보 전쟁 기간 동안 북대서양 조약기구가 벌인 군사작전으로 1999년 3월 24일부터 1999년 6월 10일까지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가 들어섰다. 공습 기간 동안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 시설, 교량, 공공시설, 산업단지 등이 파괴됐다.
전쟁 이외에도 신자유주의로 인한 도시의 변화는 당시 유럽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반영한다. 작가는 이런 변화가 좀 더 큰 역사적 수정주의 운동으로 재맥락화되며, 정치적 이념과 상업적 이익을 위해 과거 반-파시스트 저항 운동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고 밝혔다. 파이프리치는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함으로써 역사를 망각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예술가의 대응태도를 보여준다.
육군본부 건물은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한 모더니즘 건축 프로젝트로 지어진 것으로 유고 연방의 정체성을 새로운 건축적 미감으로 담기 위해 공모를 진행했다. 당시 공모를 통해 선정된 건축가 니콜라 도브로비치는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영감을 받아 ‘베르그송의 도표(Bergson’s diagrams)’를 제안했다. 도브로비치는 새로운 국가 정체성의 핵심 요소로 공백을 강조했다. 그간 소비에트 건축에서 자주 등장했던 견고함과는 다른 개인의 공간감과 부재도 담았다. 공습 때 파괴된 육군 본부 건물은 지금도 여전히 총탄 자국이 남아 있어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최근 몇 년간 세르비아 정부는 이 건물의 사유화를 추진한 결과 2024년 도널드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쉬너가 설립한 사모펀드가 이 육군 본부 건물을 99년간 임대하고 재개발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현재는 세르비아 군대 모집을 광고하는 젊은 여성 중위의 얼굴의 배너가 걸려 있다.
다른 채널에는 베오그라드 워터프론트가 위치한 사바 강변의 건너편에 위치한 영화 세트장을 다룬다. 세트장은 세르비아 역사 드라마인 ‘몬테비데오: 꿈의 맛(Montevideo: Taste of a Dream)’을 위해 만든 것이다. 건축가 도브로비치가 처음 계획한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큰 도시 개발 프로젝트인 뉴 베오그라드 중 하나다.
1930년대 베오그라드의 테라지헤 광장을 상세히 재현한 영화 세트장은 이후 테마파크로 사용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패했고 중앙분수 외에 모든 세트는 철거됐다. 파이프리치는 로마족의 불법 정착지, 벼룩시장, 건설 현장, 매립지와 같은 많은 임시 용도로 바뀌는 과정을 기록했다. 이 밖에 축구영화는 1930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월드컵에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이 참여하는 여정을 향수어린 시선으로 담았다.
‘이글스, 육군 본부, 풋볼 필름’ 외에도 ‘코소보로부터의 인사 1989(Greetings from Kosovo 1989)’도 유고슬라비아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아카이브 영상작품이다. 코소보로부터의 인사 1989는 1989년 코소보에서 열린 집회에서 촬영된 영상으로 세르비아 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연설로 유명하다. 20세기 말 역사적 전환점이 된 사건을 다시 조명한 것에 의미를 둔다. 특히 100만 명이 군집한 군중 앞에서 한 연설은 지금도 회자되는데 ‘무장전투’에 대한 언급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예고한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다.
이 사진 시리즈는 ‘물질적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작가는 이 아카이브를 통해 미래를 이어가기 위한 기록을 제공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사룻 수파수티벡, ‘콰이강:고인을 기리며 열린 추모식’
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사룻 수파수티벡은 지리적, 정치적 사실에 기반을 둔 시각작업으로 역사의 왜곡과 정체성의 해체를 탐구한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진행 중인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에서는 ‘콰이강: 고인을 기리며 열린 추모식(River Kwai: This Memorial Service was Held in the Memoryof the Deceased)’ 작업을 선보인다.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은 백남준아트센터가 동시대의 실험적인 젊은 작가를 소개해온 프로그램으로 올해 네 번째 선보인다. 올해는 고요손, 김호남, 사룻 수파수티벡, 얀투, 장한다, 정혜선, 육성민, 한우리가 참여했다. 사룻 수파수티벡의 ‘콰이강: 고인을 기리며 열린 추모식’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태국 점령기에 미얀마-태국 철도 건설 과정에서 희생된 수십만 명의 전쟁 포로와 아시아 노동자들을 위한 가상의 추모공간을 구현했다.
메인 스크린과 희생자들의 묘지에 놓였던 꽃다발을 형상화한 조각과 3대의 모니터로 구성돼 있다. 메인 스크린에서는 태국관광청이 희생자들을 기리며 매년 개최하는 ‘콰이강 다리 빛과 소리 쇼’의 축제 현장을 담았다. 이 작품은 1957년에 발간된 책과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흥행으로 인해 매클롱 강의 한 구간이 ‘콰이강’으로 재정의 되면서 발생하게 된 장소성의 왜곡을 추적해간다.
몰입형 멀티미디어 설치 작품을 통해 관객을 피사체의 감정적 풍경 속으로 안내한다. 특정 지역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에 뿌리를 둔 그의 작품은 구전 역사와 지역 사회의 생생한 경험을 수집한다. 이러한 증언은 역사와 정체성의 창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대중적인 내러티브와 나란히 배치된다.
‘리버 콰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철도 건설로 인한 희생의 규모를 다루고 있다. 잘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아시아 노동자의 수는 7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역사적으로 정확한 아시아 노동자의 수는 27만 명을 넘었다. 이 멀티채널 비디오는 태국 관광청이 주최하는 기념행사가 더 이상 공동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스펙터클이다. 관람석에 앉은 관객들은 마치 연극무대에 보내는 찬사처럼 박수를 보낸다. 역사적 비극은 이제 여행, 관광코스의 하나로 인식된다. 역사의 비극적 사건을 상기시키는 일은 작가의 몫이 됐다.
작가는 꽃과 조각, 영상을 통해 가상의 공간을 구현했다. 관람객들은 이 공간에서 잊힌 역사의 비극을 길어 올리는 경험을 통해 철도 건설이 여러 문화권에 남긴 상처를 조명한다. 공간을 에워싼 푸른빛은 슬픔과 진실 안에서 잠시 들러 쉬어가는 영혼을 상징한다. 작가는 의례적인 공간 설치, 이미지, 소리를 결합된 작품을 통해 사회·역사적 장소에 도착한 것과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 작가소개 >
보얀 파이프리치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출신으로 1995년부터 네덜란드에서 거주하고 있다. 헤이그 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암스테르담 라익스아카데미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했다. 그의 작업은 개인의 기억, 집단적 역사 의식, 필연적인 사건의 흐름을 결합해 역사에 대한 독창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주로 무빙 이미지와 사진 매체를 활용해 작업한다. 최근에는 팔레 드 도쿄(파리), 발틱 현대미술센터(게이츠헤드), 산 텔모 박물관(산세바스티안), 드 아펠(암스테르담), 베오그라드 10월 살롱, NGBK(베를린), 베오그라드 문화정화센터 등에서 전시했다. 파이프리치의 영화는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 빈 국제영화제, 독 라이프치히, 샤르자 국제영화제, 템포 다큐멘터리 영화제(스톡홀름), 렁콩트르 앙테르나시오날 파리/베를린/마드리드, 임팩트 페스티벌(위트레흐트) 등 다양한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사룻 수파수티벡은 태국 방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로 다양한 연구방식을 통해 여러 지역과 장소의 재해석을 시도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지리적, 정치적 사실뿐 아니라 기억과 담론 속 장소성에 주목해, 역사의 왜곡과 정체성의 해체를 탐구한다. 설치, 이미지, 소리가 결합된 작품을 통해 사회·역사적 장소의 만질 수 없는 아우라를 불러일으키는 총체적인 감각 경험을 구축한다. 특히 형광빛으로 둘러싸인 초현실적 공간 속에서 잊힌 역사와 기억을 환기시키며, 의례적 요소를 연구하는 그의 예술 실천은 그 자체로 기억의 의례가 된다. 2017년 방콕 예술문화센터가 선정한 ‘EARLY YEARS PROJECT #2’에 선정됐으며, 싱가포르미술관(SAM), MAIIAM 현대미술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글: 천수림
이미지 제공: 대안공간 루프, 백남준아트센터